첩보하는 일입니다. 도내 각 읍의 비류(匪類)를 무찔러 체포하는 일의 형지(形止)는 남영 영관 최처규(崔處圭)와 초관 김태인(金台仁)이 병졸을 거느리고 김산(金山)과 상주(尙州) 등 고을을 향하여 출발한 연유를 이미 전후로 올린 장문(狀聞)에 빠짐없이 말씀드렸습니다. 계속하여 도부(到付)한 산청 현감(山淸縣監) 정복원(鄭宓源)의 첩정(牒呈) 내용에,
“본현에서 붙잡은 동학교도 이원극(李元極)과 조천수(趙千守)가 평민들을 침책(侵責, 재물을 내라고 침해함)하여 전미(錢米)와 조총(鳥銃)・마필(馬匹) 등을 약탈한 죄상(罪狀)을 모두 함께 자복(自服)하였으므로 이원극은 11월 29일에 결안(結案, 사형(死刑)을 판결한 문서)을 받아내 물고(物故, 사망을 말함)하였고, 조천수는 이달 초3일에 결안을 받아내 물고하였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단성 현감(丹城縣監) 윤태일(尹泰馹)의 첩정 내용에,
“본읍에서 붙잡은 동학교도 권인택(權仁宅)은 스스로 괴수(魁首)가 되어 말을 타고 읍촌(邑村)에 횡행(橫行)한 정절(情節)이 흉패(凶悖)하고, 강순서(姜順瑞)는 반민(班民)을 위협하여 조포(租包, 나락을 담은 자루)를 탈취하였고, 이재석(李在石)은 종놈[奴]으로서 도당(徒黨)에 들어가서 그 상전(上典)을 위협하였고, 김준이(金俊伊)는 촌락 사이에 작폐(作弊)하여 함부로 토색질을 하였고, 김재수(金在守)는 어리석은 백성을 유인(誘引)하여 강제로 도당(徒黨)에 가입시켰습니다. 그래서 위에 말한 다섯 놈들을 모두 취복(取服, 자복(自服)을 받아냄)한 뒤 이달 초6일에 결안을 받아내 물고하였다.”
라고 하였습니다.
거창 부사(居昌府使) 정관섭(丁觀燮)의 첩정 내용에,
“본부에서 붙잡은 동학교도 이대련(李大連)은 이른바 도소(都所)의 사통(私通, 사사로이 보내는 서한)을 자루 속에 감춰 두고 사감(辭感)하였으므로 이달 초6일에 총을 쏘아 물고하였습니다. 초9일에 무주(茂朱)의 교경(交境)에 심부름을 나간 이민(吏民) 등이 붙잡은 동학교도 아홉 놈 중에 문성술(文成述)은 삼남(三南)의 접괴(接魁)로서 힘으로 제압하기가 어려운 까닭에 붙잡은 즉시 총살하였고, 문형술(文亨述)과 허관서(許寬瑞)는 모두 거괴(巨魁)로 패호(佩號, 호패처럼 내세움)한 자들이므로 철저하게 캐물어서 실정을 알아낸 뒤 11일에 읍에서 한꺼번에 총살하였습니다. 그 외의 6명은 종적이 긴가민가 의심스러운데 모두 귀화(歸化)하기를 원하므로 모두 효칙(曉飭, 좋게 타일러서 신칙함)하고 풀어 보내주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안동 부사(安東府使) 이희원(李喜元)의 첩정 내용에,
“본읍 동학교도의 거괴(巨魁)들인 김한돌(金漢乭)・황점이(黃點伊)・김서공(金庶公) 세 놈은 낌새를 먼저 알아채고 법망(法網)을 빠져나간 자들인데 지금 막 붙잡혔으므로 이달 초7일에 연무정(鍊武亭)의 모래밭에 사람들을 많이 모이게 한 뒤 위의 세 놈을 모두 즉시 묻어 죽였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인동 부사(仁同府使) 조응현(趙應顯)의 첩정 내용에,
“본읍이 뒤를 쫓아 붙잡은 동학교도 우연석(禹連石)과 김시종(金時從)은 종놈[奴]으로서 도당(徒黨)에 들어가서 그 상전을 위협하여 노비문서를 불사르고 속신(贖身)하였고, 홍재준(洪在俊)・이덕필(李德必)・이춘실(李春實)은 하찮은 혐의 때문에 심반(沈班, 심씨 성을 가진 양반)을 결박하고 위협하여 자살하게 하였고, 신영옥(申永沃)은 김천(金泉)의 도회(都會)에 말을 타고 수행(隨行)하였고 도시근(都時根)은 약탈하는 현장에 참섭(參涉, 참여하여 관계함)하였습니다. 따라서 위의 여덟 놈을 모두 감옥에 가두고 경중을 나누어 감단(勘斷, 감죄(勘罪)하여 처단함)할 계획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문경 부사(聞慶府使) 김정근(金禎根)의 첩정 내용에,
“본부에서 붙잡은 동학교도 박여집(朴汝集)은 강제로 도당에 가입하도록 권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을 선혹(煽惑)하였고, 서덕구(徐德九)는 상주(尙州)의 군기소(軍器所)가 작변(作變)할 때 참여하여 간섭한 자인데 화약 1근(斤), 화승(火繩) 1원(圓), 철환(鐵丸) 20개가 지금 그 자의 집에 있고, 박만금(朴萬金)은 패거리를 거느리고 도회(都會)에 나아가서 불을 지르고 겁략(劫掠)하였습니다. 따라서 위의 세 놈을 이달 초2일에 읍시(邑市)의 큰길에서 모두 엄곤(嚴棍)을 쳐서 물고(物故)하였으며, 안상균(安相均)은 청산(靑山)의 군기를 약탈하여 상주(尙州)의 교경(交境)에 돌아와 범죄한 자이므로 이달 20일에 뒤를 쫓아 붙잡은 즉시 총살하였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김산 군수(金山郡守) 박준빈(朴駿彬)의 첩정 내용에,
“저번에 붙잡은 무주(茂朱)의 적괴(賊魁) 두 놈의 자루 안에 ‘전봉준(全捧準)’이라는 글자가 있고 뒤쪽에 신표(信標)의 도서(圖書)가 찍혀 있으므로 이달 19일에 본군의 소모사(召募使)와 더불어 연무당(鍊武堂)에서 개좌(開坐)하여 백성들을 크게 모이게 한 뒤 즉시 총살하였습니다. 영남과 호남의 거괴(巨魁)들인 남홍언(南洪彦)・편사흠(片士欽)・최복이(崔福伊)・김순필(金順必) 등 네 놈을 추후에 붙잡았습니다. 남홍언과 편사흠 두 놈은 효수(梟首)하여 경중(警衆, 무리를 경계시킴)하였고, 최복이와 김순필 두 놈 모두 총살하였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하동 부사(河東府使) 홍택후(洪澤厚)의 첩정 내용에,
“본부를 방어하고 수비하는 각 군진(軍陣)이 광양(光陽) 강가 위아래에 모여 있는 동학교도들과 대진(對陣)한 형지는 이미 치보하였습니다. 그사이에 붙잡은 동학 패거리 여덟 놈을 철저하게 신문하여 캐물었는바 모두 흉악한 짓을 저지르고 숨어 있던 자들이므로 이달 초6일에 모두 물고(物故)하였습니다. 초8일에 적의 정세를 정탐(偵探)하였더니 패거리를 모아 각자 무기를 쥐고 장차 강을 건너와 고을을 습격하려는 낌새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초9일에 방어하고 수비하는 각 군진이 길을 나누어 행군하여 저들 무리와 접전(接戰)하였는데 본읍의 화개면(花開面)과 악양면(岳陽面) 2면의 민정(民丁) 1백여 명이 광양의 옥룡면(玉龍面)에 건너가서 31명을 사로잡았습니다. 본읍의 의병(義兵) 4백 85명이 신암진(薪巖津)을 건너 곧장 죽천(竹川)까지 가서 그들의 둔채(屯寨, 주둔지를 말함)를 불사르고 48명을 붙잡았고, 추후에 총살하거나 사로잡은 수효도 또한 13명이었으며 빼앗은 무기들은 조총(鳥銃) 41자루, 환도(環刀) 3자루이었습니다. 각 진중의 통영군(統營軍) 1백 명이 곧장 섬진강(蟾津江)까지 가서 4명을 총살하였고, 산청(山淸)의 군병 51명이 곧장 대곡(大谷)까지 가서 그들의 소굴을 불사르고 11명을 총살하고 13명을 사로잡았습니다. 삼가(三嘉)의 군병 50명과 단성(丹城)의 군병 41명과 의령(宜寧)의 군병 50명이 오추동(烏雛洞)에서 합진(合陣)하여 옥곡(玉谷)을 향하여 들어가 8명을 총살하고 5명을 사로잡았습니다. 우병영(右兵營)의 군병 1백 명과 함안(咸安)의 군병 40명과 진해(鎭海)의 군병 20명과 창원(昌原)의 군병 29명과 김해(金海)의 군병 50명과 칠원(柒原)의 군병 23명과 본읍의 병정(兵丁) 1백 명이 광평진(廣平鎭)에 건너가서 31명을 총살하고 59명을 사로잡았습니다. 그중에 영남과 호남의 거괴(巨魁)인 전이갑(全以甲)은 진중(陣中)에서 효수하였는데, 빼앗은 무기들은 조총 20자루, 갑옷 1건, 인궤(印櫃) 1개, 나팔 1쌍, 환도 1자루였습니다. 14일에 각 군진이 차례로 고을에 돌아왔으므로 그 일의 줄거리를 물어보았더니,
‘바야흐로 길을 나누어 진을 벌여서 산을 에워싸고 화공(火攻)을 할 때 그들이 숨어 있는 굴혈(窟穴)을 탐지하여 바람을 이용해서 불에 태우고 도망하는 자를 뒤쫓자 총알에 맞아 피살된 자들이 이루 셀 수 없을 정도였으며, 차례에 따라 전진하니 광양현에서도 또한 민포(民砲)를 설치하여 거괴(巨魁)들인 김인배(金仁培)와 유하덕(劉夏德) 두 놈과 패거리 80여 명을 붙잡아 죽였으며 또 양호 도순무영(都巡撫營)의 선봉(先鋒)이 경군(京軍)을 거느리고 와서 해당 현에 머무른 까닭에 월경(越境)하지 못하게 하라는 뜻으로 각 진에 알려 왔으므로 즉시 회군(回軍)하였습니다.’
했습니다. 사로잡아서 바친 여러 놈들 중에 영남과 호남의 거괴들인 박정주(朴正周)・류윤거(柳允擧)・박사영(朴士永)・김백현(金伯賢)・김선준(金先俊)・고광신(高光信) 등 6명은 18일에 군민(軍民)을 많이 모이게 한 뒤 효수하여 경중하였고, 그 나머지 패거리들은 죄가 무거운 자는 모두 즉시 물고하고, 정적(情迹)이 용서할 만한 자는 따끔하게 타일러서 풀어 보냈습니다. 금번에 출진(出陣)한 전(前) 주부(主簿) 김진옥(金振玉)은 몸소 사졸(士卒)보다 앞장서서 위험을 피하지 않고 함정을 설치하여 괴수를 사로잡고 힘을 분발하여 적도들을 무찔렀으며, 전 장령(掌令) 황보연(黃輔淵)은 몸소 군병들을 독려하고 힘든 일을 꺼리지 않으면서 방략(方略)을 많이 설치하여 사로잡은 수효가 매우 많으니, 위의 두 사람은 그 노고와 업적을 논하건대 으뜸가는 상(賞)에 두어야 마땅합니다. 전 중군(中軍) 정찬건(鄭燦健)은 그 두 명의 괴수를 죽이고 많은 패거리를 사로잡았고, 퇴리(退吏) 김형준(金亨浚)과 김응철(金應喆)은 분개심을 일으켜서 의병을 창도하고 힘을 내어 소금을 헌납하였고, 하리(下吏) 김연홍(金演洪)은 면(面)의 총포(銃砲)를 소모(召募)하고 무기를 찾아내어 바쳤고, 산청 군관(軍官) 강병주(姜炳柱)는 매번 출군(出軍)할 때 따라가서 과감하게 앞장섰으니, 위의 5인들도 모두 포상해야 마땅합니다. 그 밖에 각 영읍(營邑) 군대의 두령(頭領)들이 한 달 넘게 군대를 지원하고 열흘 동안 적도들에게 맞선 것도 또한 마땅히 장려해야 하므로 사실에 근거하여 첩보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상주 목사(尙州牧使) 이만윤(李晩胤)의 첩정 내용에,
“영남과 호남의 교경(交境)에 모여 있는 비류(匪類, 동학교도)들을 찾아내 붙잡으려고 본주의 소모사(召募使)와 서로 의논하여 유학(幼學) 김석중(金奭中)으로 하여금 군대 1백 20명을 거느리고 나가서 체포하게 하였는데 이달 초8일에 회군(回軍)하였습니다. 붙잡아낸 거괴(巨魁) 여섯 놈 중에 김경연(金景淵)은 포덕대장(布德大將)이라고 칭하면서 귀화(歸化)한 백성들을 위협하고 공갈하였으며 서오덕(徐五德)은 선봉대장(先鋒大將)이라고 자칭하면서 돈과 재물을 강제로 빼앗고 경재(卿宰, 조정의 고관)를 꾸짖고 욕하였으며, 강경중(姜敬重)은 행군 도집강(行軍都執綱)이라고 자칭하면서 부녀(婦女)를 겁탈하였고, 허용(許用)은 행군 도금찰(行軍都禁察)이라고 자칭하면서 사대부(士大夫)를 구타하고 내정(內庭, 안방을 말함)에 돌입하였고, 정윤서(鄭允瑞)는 금산(錦山)에서 작변(作變)하였을 때 1백여 명을 살해하였고, 장여진(張汝振)은 좌익장(左翼將)이라고 불리는 자인데 재차 성주읍(星州邑)을 침범하고 경재가(卿宰家)를 세 번 공격하였으므로 모두 즉시 총살하였습니다. 초10일에 호서(湖西)의 적정(賊情)을 탐문하였더니 비류 수만 명이 황간(黃磵)・영동(永同)・청산(靑山)의 무기를 약탈하여 황간의 용산(龍山) 저자[市]에 진을 치고 점거하고 있으면서 장차 본주(本州)를 침범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본주의 군병 중에서 날래고 용감한 자 2백 명을 급하게 뽑아서 김석중(金奭中)으로 하여금 거느리고 나가서 읍의 서쪽 70리(里)에 있는 작두동[斫刀洞]의 좁은 입구에 진을 치게 하고 또 영문(營門) 및 일군(日軍)의 병참(兵站)과 부근의 이웃 고을에 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12일에 탐문하여 잡아낸 적도의 괴수 일곱 놈 중에 이득이(李得伊)와 박기봉(朴起奉) 등 두 놈은 소모사와 함께 개좌(開坐)하고 효수하여 경중하였고, 이도생(李道生)・김순오(金順五)・권화일(權和一)・박창현(朴昌鉉)・배춘서(裵春西) 등 다섯 놈은 총살하였습니다. 연이어 김석중이 치보한 것을 받아 보니,
‘12일 밤중에 청주의 병정 4백 명이 비류들과 황간의 용산 저자에서 접전하였는데, 적은 수효의 관군이 많은 수효의 적도들에게 맞서지 못하여 적진(賊陣)에 포위당하였습니다. 13일 오후에 다행히 포위가 무너져서 빠져나와 보은(報恩)과 마로(馬老) 등의 지역에 물러가 진을 쳤는데, 저들의 무리는 나날이 더욱 수효가 불어나서 대적하여 싸우기가 어려웠습니다. 이 때문에 본병(本兵)도 또한 뒤로 물러나 읍에서 60리 떨어진 율계점(栗溪店)에 진을 쳤으니 각처의 지원 군대를 속히 서둘러 기송(起送)하십시오.’
하였으므로 한편으로는 가까운 고을에 지원을 촉구하고 한편으로는 몰래 문자(文字)를 통(通)하는 비괴(匪魁) 최인숙(崔仁叔)・윤경오(尹京五)・김순여(金順汝)・김명숙(金明叔) 등 네 놈을 찾아내 붙잡아 14일에 소모사와 함께 종루(鍾樓)에서 개좌(開坐)하여 모두 즉시 효수하여 경중하였습니다. 15일 유시(酉時, 17~19시)에 용궁(龍宮)의 포군(砲軍) 20명과 함창(咸昌)의 포군 20명이 본주에 도착하였으므로 모두 즉시 율계의 유진(留陣)한 곳으로 보냈고 계속하여 정탐을 하였습니다. 15일에 일본군 28인이 황간으로부터 율계에 도착하였고 16일 저녁에 육군 대위가 20인을 거느리고 와서 합세하여 전진하였습니다. 17일 초혼(初昏)에 비류들과 보은(報恩)・풍차(風次) 등지에서 접전하였는데 총소리가 밤새도록 끊이지 않았고 적도(賊徒)들이 다치거나 죽은 자들이 많았으며 청주(淸州)의 병정(兵丁)들이 추후에 합세하였다고 합니다. 19일 오시(午時, 11~13시)에 남영(南營)의 영관(領官) 최처규(崔處圭)와 초관(哨官) 김태인(金台仁)이 병정 2백 명을 거느리고 김산(金山) 소모사(召募使)의 수행원 김응두(金膺斗)가 선산(善山)의 포군 1백 50명, 개령(開寧)의 포군 95명, 인동(仁同)의 포군 1백 명, 성주(星州)의 포군 10명을 거느리고서 율해(栗海, 율계(栗溪)의 오기)에서 회합하였다고 합니다. 안동(安東)의 군병 3백 명이 본주에 도착하였으므로 그 가운데 정예(精銳)한 자들 40명을 뽑아내고 또 본주의 군병 40명을 뽑아서 본주 서쪽 갈령(葛嶺)의 요충지에 발송(發送)하였습니다. 20일 진시(辰時, 7~9시)에 본병(本兵)의 첩서(捷書)가 먼저 도착하였고 당일 오후에 군대를 거느린 김석중이 비로소 회군(回軍)하였으므로 그 전후 일의 줄거리를 들었는데,
‘이달 17일 묘시(卯時, 5~7시)에 청산로(靑山路)로부터 행군하여 보은(報恩)의 수피(水皮)에 이르러 적들의 정세를 탐문해 보니, 적도(賊徒) 수만 명이 두 진(陣)으로 나누어 1진은 원암(元巖)에서 보은으로 들어가 관사(官舍) 및 공해(公廨)의 문호(門戶)를 때려 부수고 이민(吏民)의 집을 불태우고 재산을 탈취했으며, 1진은 수피(水皮)의 신리(薪里)에서 풍취점(風吹店)에 들어갔는데 상주의 관병이 곧 그곳에 도착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두 진이 해읍(該邑)의 북실(北實, 종곡(鍾谷))에 합거(合據)하면서 화구(火具)를 많이 갖추고 사면(四面)을 파수(把守)한다고 했습니다. 이에 따라 즉시 일본군 45인, 용궁(龍宮)・함창(咸昌)의 포군 각 20인, 본주의 군정(軍丁) 2백 명과 더불어 곧장 귀인교(貴人橋)에 들어가서 저녁밥을 먹고 밤이 되어 해각(亥刻)이 되었을 때 두 길로 나누어 향하여 하나는 북실의 오른쪽 산길로 향하고 하나는 왼쪽의 마을길로 향하여 비류의 오른쪽 파수군(把守軍) 네 놈을 덮쳐 잡고는 먼저 그들의 괴수가 있는 곳과 적의 정세가 어떤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들이 진술한 내용에,
「괴수(魁首) 최시형(崔時亨)은 저녁 전에 본동(本洞) 김소촌(金召村)의 집에 있었는데 그사이의 거취는 비록 뚜렷하게 알지 못하겠고 그다음 괴수 임국호(任局昊)・정대춘(鄭大春)・이국빈(李國賓)・손응구(孫應九)・배학수(裵學秀)・박장준(朴章俊) 등 여러 놈들은 그 집에 함께 있다가 저녁밥을 먹은 뒤 장차 진을 옮기려는 계획을 꾀하였는데 여당(餘黨)이 본동에 가득 차고 본동의 남녀는 모두 이미 도망하여 숨었다.」
하였습니다.
또 이곳에 온 이유를 물어보니,
「본래 안성포(安城包)와 관동포(關東包)로서 월전(月前)에 호남에서 누차 접전(接戰)한 것이 17차(次)나 되는데 이달 초6일에 무주(茂朱)에 들어가 설전(雪川)과 월전(月田) 두 곳의 의병을 공격하여 무찌르고, 영동읍(永同邑)을 함락시키고 황간(黃磵)의 무기를 탈취한 뒤 전진하여 영동 땅의 용산(龍山) 저자[市]를 점거하고 수석(水石) 이판서(李判書)의 집 및 정씨(鄭氏) 양반 두 집과 죽전(竹田)의 민호(民戶) 40여 집을 불태우고 이 판서의 종놈[奴子] 1명과 노씨(盧氏) 양반 2인을 총살하였습니다. 초10일에 상주(尙州) 모서면(牟西面) 당남(唐南) 지방에 들어가 상주읍에 전진하여 함락시키려고 하였으나 11일에 상주 관병에게 쫓겨서 물러나 용산을 점거하였고 또 청주 관병과 접전하여 승세를 타고 청산읍(靑山邑)에 이르러 이틀간 머물렀고 다시 상주로 향하려고 하였습니다. 또 대구(大邱) 병정과 상주의 관병이 뒤를 쫓아 급하게 도착한다고 들었으므로 물러나서 보은(報恩)의 원암(元巖)・수피・신리 등지로 향하였습니다. 또 이틀간 머물다가 상주의 관병이 이미 청산읍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17일 밤에 모두 북실에 모였는데 상주와 선산의 두 읍에 대해서는 기어코 분풀이를 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문초(問招)한 뒤에 네 놈을 모두 즉시 멸구(滅口)하고 일제히 함께 전진하여 먼저 여러 괴수들이 있는 김소촌의 집을 포위하여 다섯 놈을 총살하고 불을 던져 시체를 태우는 때에 갑자기 총소리가 왼쪽의 산 위에서 어지럽게 나는 것을 들었는데 총알이 마치 우박이 쏟아지듯이 빗발쳐 달빛 아래에서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적도의 무리들이 산에 가득했습니다. 우리 군대는 골짜기에 있으면서 해심(垓心, 포위된 가운데)에서 곤경에 빠져 있었는데 급하게 공격하는 것이 상책이기 때문에 해시(亥時, 21~23시) 초부터 계속하여 도전(挑戰)하면서 끊임없이 욕을 퍼부었습니다. 일본 군대는 안에 있고 우리 군대는 사방으로 공격하면서 전진하였는데 함성(喊聲)이 산을 뒤흔들고 총성이 골짜기를 떨게 하였습니다. 날이 밝은 뒤에 이르러 사방을 돌아보니 적도들이 산과 골짜기를 뒤덮고 구름처럼 떼를 지어 모였는데 산의 높고 낮음이 현저하게 다르고 수많은 적도들을 적은 수효의 관병이 대적할 수 없었습니다. 적도들이 앞쪽으로 튀어나오는 기세가 매우 급박해 우리 군대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면서 모두 위구심(危懼心)을 품고 있던 이때 사기(士氣)를 격려하여 한번 죽기로 맹세하고 일본 군대로 하여금 대열을 나누어 1진은 왼쪽을 1진은 오른쪽을 맡게 하고 우리 관병은 곧장 전진하여 적도들에게 맞서 싸우면서 범처럼 소리를 지르고 원숭이처럼 더위잡아 올랐으며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총을 한 방씩 쏘자 여러 사람들이 총을 일제히 발사하였습니다. 산의 허리쯤에 이르러 걸음마다 총알을 더욱 발사하니 산 위에 있는 적도들도 총을 응사(應射)하여 번번이 쓰러졌는데 별은 절벽 아래로 떨어지자 어느덧 우리가 산의 정상을 탈취하니 적도들이 마침내 조금 후퇴하였고 왼쪽의 일본 군대는 뒤를 이어 산에 올라 힘을 합쳤으나 전진하기를 싫어하였고 오른쪽의 일본 군대는 그 잿길[嶺路]을 끊어 협공(挾攻)하였습니다. 한참 지난 뒤에 해가 이미 오후가 되자 적도들의 기세가 비로소 위축되어 산으로 기어올라 재를 넘어 여우와 쥐처럼 달아나 숨었으므로 승세를 타고 총을 급박하게 쏘면서 10리까지 뒤를 추격하여 칼로 베어 죽이고 총을 쏘아 죽인 수효가 3백 95명이었습니다. 그 밖에 골짜기와 수풀 사이에서 죽은 자들이 서로 베고 누워 이어져 그 수효를 셀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흩어져 도망친 여당(餘黨)이 사방으로 뿔뿔이 달아나 숨을 때에 비로소 청주(淸州)의 관병과 옥천(沃川)의 의병이 앞쪽의 산허리에서 와서 손으로 때리고 총으로 쳐서 죽인 자들이 27명이었습니다. 즉시 흩어지는 적도들의 뒤를 따라서 보은의 남악(南嶽) 뒷재[後嶺]를 넘어갔습니다. 전투에 이긴 뒤 비로소 아군이 탈취한 무기를 계산해 보니, 총 35자루, 환도(環刀) 9자루, 활 1장(張), 창(槍) 42자루, 약환(藥丸) 2짐[負], 기수(旗數) 10면(面), 나팔 1개, 전고(戰鼓) 5좌(坐), 우마(牛馬) 12필(匹)이었습니다. 그 나머지 양총(洋銃) 및 약환과 우마도 적지 않은데 모두 일본 군대가 획득한 것입니다. 이번 토벌에 종군(從軍)한 사인(士人) 김제(金濟)・홍성걸(洪成杰)과 하리(下吏) 박명현(朴明顯)과 군교(軍校) 김재억(金在億)・유우석((劉禹錫) 등 5인은 힘을 분발하여 애를 쓰면서 물러남이 없이 전진하였으니 참으로 가상합니다. 비류들을 이미 소탕하였으니 군병을 오래 머물게 할 수가 없으므로 18일에 그대로 즉시 회군(回軍)하여 지금 막 돌아왔습니다.’
하였습니다.
바야흐로 적도를 토벌할 때 본읍의 관병 2백 명과 일본 군대 45인과 용궁・함창 두 읍의 관병 각 20명에 불과하였는데, 수백 명의 고립된 군대로 수만 명의 적병을 토벌하면서 위세를 드날리고 크게 승전하여 군대를 온전하게 하여 돌아온 것은 참으로 매우 기이하고 장(壯)합니다. 때문에 술과 고기를 장만하여 사졸들을 먹인 뒤 각처의 구원 병력을 차례로 해송(解送)할 계획입니다. 김석중(金奭中)이 앞장서서 출진(出陣)하여 이렇게 전공(戰功)을 세웠으니 특별하게 포상하는 일이 있어야 마땅하고 토벌에 종군한 여러 사람들이 위험에 임하여 적을 제압하고 힘을 합쳐 서로 도운 것도 마땅히 장려해야 합니다. 비류의 세작(細作, 간첩(間諜))인 박효식(朴孝植)과 포괴(包魁) 김흥업(金興業)・김경학(金慶學)・안소두겁(安小斗劫)・김마성(金馬成)・박기준(朴奇俊)・지상록(池尙彔)・김사문(金士文)・이상신(李尙信)・신윤석(申允石)・김오복(金五福)・이규삼(李圭三)・이태평(李太平) 등 열세 놈은 뒤를 추격하여 붙잡아서 실정을 조사하여 알아낸 뒤 박효식은 소모사(召募使)와 함께 개좌(開坐)하여 효경(梟警, 효수하여 경중함)하였고 그 나머지 열두 놈은 모두 즉시 총살하였다고 합니다. 출사(出使)한 영관(領官) 최처규(崔處圭)와 초관(哨官) 김태인(金泰仁) 등의 수본(手本)에, “초관이 관병을 거느리고 먼저 상주(尙州)의 율계(栗溪) 땅 요충지의 좁은 입구로 가서 엄밀하게 파수(把守)하면서 성세(聲勢)를 거들었고 영관은 관병을 거느리고 김산군(金山郡)에 급히 달려가서 해군(該郡)의 소모사와 더불어 상의한 뒤 각 읍의 지원 병력을 통솔하여 차례대로 율계참(栗溪站)에 접속(接續)함으로써 뒤쪽을 응원하였습니다. 교경(交境)에 창궐한 적도들을 지금 이미 무찔렀고 아직 발각되는 자가 없으니 수효가 많은 군병들을 여러 날 나가서 살게 할 수 없으므로 모두 환군(還軍)할 계획입니다.”
라고 한 첩정 및 수본이 있었습니다.
본도에서 비류들이 소요(騷擾)하는 것을 누차 토벌하고 체포하여 비록 이미 소요가 잠잠해졌으나 일찍이 전에 법망을 빠져나간 괴수(魁首)와 처음부터 끝까지 귀화(歸化)를 거부한 무리들이 발각되는 대로 그 죄범을 감단(勘斷)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 이 9읍(邑)에서 찾아내 붙잡은 놈들은 모두 용서하기 어려운 정절(情節)로 인하여 곧장 임시방편에 맞는 감단(勘斷)을 시행한 것이 참으로 공분(共憤)에서 나왔으니 뒤늦게 따지기가 어렵습니다. 아, 저 양호(兩湖)의 괴당(魁黨)들이 아직 많고 군포(群包)들이 산채(山寨)에 진을 치고 모여 있으며 광양(光陽)과 순천(順天)의 적도들이 하동(河東)의 교경(交境)에 바짝 침범하고 황간(黃磵)과 영동(永同)의 패거리가 상주(尙州)의 접계(接界)를 침범하려고 노리고 있습니다. 놀라운 낌새가 예측할 수 없고 경계하라는 첩보가 계속 이르고 있으므로 하동에는 부근 영읍의 군병을 조송(調送, 보내줌)하고 상주에는 영관과 초관을 파견하여 병정 및 이웃 고을의 군병을 통솔하여 그들로 하여금 응원하고 뒤를 쫓아 체포하게 하였습니다.
두 읍이 출진(出陣)하여 일제히 승전하고 괴수와 무리들을 무찔러 죽인 것이 이렇게나 수효가 많고 빼앗은 무기들도 적은 것이 아니니 매우 기특하고 장합니다. 대포(大包)는 지금 이미 죽이거나 축출하였고 여당(餘黨)은 아직 발각되는 자가 없으니 많은 수효의 군병들을 오래 머물러 있게 할 수 없으므로 모두 차례대로 해산하여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이후에 방어하고 수비하는 일을 각별히 단속하라는 뜻으로 각기 해당 지방관에게 신칙하였으나 영읍(營邑)의 지원군이 밖에 나가 사는 동안에 향비(餉費, 군사 비용)를 우선 마련해야 하는 일이 참으로 매우 걱정스럽고 민망합니다. 하동에 출진한 전(前) 주부(主簿) 김진옥(金振玉), 전 장령(掌令) 황보연(黃輔淵)과 상주에 출진한 유학 김석중(金奭中)은 격려하고 권장해야 되는 도리로 볼 때 포상하는 은전이 있어야 하고 그 밖에 애쓰고 공을 세운 사람들로 읍에서 거론하여 보고한 자들에 대해서도 모두 장려해야 마땅합니다. 감히 사유를 갖추어 치보하는 바이니, 참작하고 논의하시어 품처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