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보하는 일입니다. 도내 각 읍의 비류들을 섬멸하고 체포한 상황은 전에 이미 급히 보고했습니다. 그 뒤에 계속하여 도착한 칠곡 부사(漆谷府使) 남궁억(南宮檍)이 보내온 첩정 내용에,
“본부(本府)가 붙잡은 비도(匪徒) 가운데 이경팔(李景八)과 송해출(宋海出)은 괴수가 되어 패거리를 모아서 여기저기 출몰하며 겁을 주며 약탈하였고, 배조이(裵召史)는 반가(班家)의 여종[婢子]으로서 상전(上典)에게 욕지거리를 퍼붓고 가산(家産)을 빼앗아 갔고, 이원발(李元發)은 숱하게 말썽을 일으킨 죄범(罪犯)이 심중(深重)하고, 장사진(張士震)은 남의 재산을 겁탈하였으니 모두 죽여야 한다고 하므로 11월 21일에 모두 즉시 총살하였습니다.”
라고 하였으며, 하동 부사(河東府使) 홍택후(洪澤厚)가 보내온 첩정 내용에,
“본부의 교경(交境)인 광양(光陽) 등지의 비도들을 무찌르고 흩어지게 한 형지는 이미 이전의 보고에서 모두 말하였으되, 도망 중에 있던 괴수와 도당 스물일곱 놈을 추후에 붙잡아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송덕언(宋德彦)과 손인석(孫仁碩) 등 두 놈은 모두 양호의 거괴였으므로 12월 23일에 군민(軍民)을 크게 모이게 한 뒤 효수경중하였고 강우용(姜又用)・김청로사(金靑老沙)・김한대(金漢大)・강정인(姜正仁)・양백천(梁白千)・박운창(朴云昌)・최경화(崔敬化)・박정유(朴正有)・박성조(朴性祚)・곽자윤(郭子允)・정낙삼(鄭洛三)・박문조(朴文祚)・김시진(金時振)・김대방(金大房) 등 서른세 놈은 범죄한 정적(情迹)이 모두 매우 흉악한 까닭에 모두 즉시 물고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단성 현감(丹城縣監) 윤태일(尹泰馹)이 보내온 첩정 내용에,
“본현(本縣)이 붙잡은 비도 세 놈 중에 송응엽(宋應燁)은 군물(軍物)을 탈취하고 향미(餉米, 군량미)를 훔쳐 갔고, 서처갑(徐處甲)과 박동화(朴東和) 등은 처음에 진주(晉州)의 서면(西面)에서 여럿이 모이는 회합에 나아갔고 또 광양과 순천의 도당(徒黨)에 참여한 자이기 때문에 죄를 철저하게 신문한 뒤 12월 23일에 모두 즉시 물고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례 현감(知禮縣監) 이재하(李宰夏)가 보내온 첩정 내용에,
“본현 남면(南面)의 백성 등이 붙잡아낸 비류가 네 놈인데 그 가운데 김재덕(金在德)・김성봉(金成奉)・이홍이(李洪伊) 등은 작년 8월에 패거리를 거느리고 고을에 들어와서 관문(官門)에서 말썽을 부리고 촌리(村里)에서 재물을 토색하였고 또 성주(星州)・금산(錦山)・황간(黃磵)・영동(永同)에서 작변(作變)할 때 참여한 자이기 때문에 일일이 자복을 받아낸 뒤 정월 초5일에 모두 즉시 총살하였습니다. 신채봉(申彩鳳)은 위협을 당하여 도당에 들어간 것을 뚜렷하게 해명하였기 때문에 신칙하여 풀어 보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문경 부사(聞慶府使) 김정근(金禎根)이 보내온 첩정에,
“본부의 비도를 뒤쫓아 붙잡은 것에 대해서는 전에 이미 보고하였으되, 추후에 붙잡은 여섯 놈 중에 임도재(林道載)・남경준(南敬俊)・김여흥(金汝興)・이덕일(李德一)・장장덕(張長德) 등 다섯 놈은 진장(眞贓, 범죄 사실의 증거)이 드러나서 모두 용서하기 어려운 자들이기 때문에 12월 28일에 모두 즉시 물고하였습니다. 이수명(李守命)은 입고 있는 옷깃에 궁을(弓乙)의 표적(標跡)이 노출되었고 전후로 범한 짓이 더욱 몹시 흉악하고 교활하기 때문에 원적(原籍) 고을인 개령현(開寧縣)에 공문을 보내 압송(押送)하여 그곳으로 하여금 마무리를 짓고 사람들을 경계하게 하였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김산 군수(金山郡守) 박준빈(朴駿彬)이 보내온 첩정 내용에,
“본군(本郡)이 붙잡은 영호(嶺湖)의 거괴(巨魁) 남홍언(南洪彦)과 편사흠(片士欽)을 효수하여 경중하고, 최복이(崔福伊)와 김순필(金順弼)을 총살한 형지(形止)에 대해서는 전에 이미 보고하였습니다. 붙잡혀 온 괴당(魁黨) 중에 김천순(金千順)과 김원창(金元昌)은 모두 전봉준(全琫準)이 협박하여 따르게 한 괴수로서 기포(起包)하는 일을 감독하며 통솔하였고 김화준(金和俊)은 최시형(崔時亨)의 척당(戚黨)으로서 기포하였으며, 조복용(曺卜用)・남성원(南聖元)・이인길(李仁吉)・이수원(李守元)・김봉이(金奉伊) 등은 각기 영남의 대접주가 되어 포당(包黨)을 다수 거느리고 연이어 성읍(城邑)을 함락하였으므로 본군의 소모사(召募使)와 더불어 철저하게 신문한 뒤 모두 즉시 총살하였습니다. 추후에 붙잡은 이응원(李應元)・김명준(金命俊)・현복만(玄卜萬)・김상필(金尙弼)・이오철(李五哲) 등 다섯 놈은 성주(星州)에서 작변(作變)할 때 수창(首倡)한 자들이기 때문에 일일이 자복을 받아낸 뒤 정월 24일에 본군 소모사와 함께 개좌(開坐)하여 모두 즉시 총살하였습니다.”라고 한 첩정이 있었습니다.
본도의 비경(匪警, 동학도에 대한 경계)은 연이어 체포를 한 덕분에 비록 이미 잠잠해졌으나 일찍이 전에 법망을 빠져나간 괴수들과 처음부터 끝까지 귀화를 거부한 무리들은 발각되는 대로 그 죄범을 감단(勘斷)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습니다. 지금 이 6읍(邑)이 뒤를 추격하여 붙잡은 여러 놈들에 대해서 모두 용서하기 어려운 정절(情節)로 인하여 곧바로 임시방편의 감단(勘斷)을 시행한 것은 참으로 공분(共憤)에서 나온 일이니 추후에 시비를 따지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앞으로 그들의 뒤를 밟아 붙잡는 일에 대해서는 더욱 단속(團束)하라는 뜻으로 각기 해당 지방관에게 신칙하였으며 연유를 첩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