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군에서 보고할 일입니다.
청풍(淸風) 수촌리(水村里)에 사는 표영조(表永祚)라고 부르는 놈은 동학의 거괴(巨魁)로 작년 봄 무렵부터 본군의 경내에 출몰하여 행패를 부리고 병폐를 일으킨 것을 손꼽아 셀 수 없습니다. 화포에 쓸 염초(焰硝)를 백성들에게 강제로 징수하고 이임(里任)을 잡아 가두고는 토색하고 (남의) 무덤을 파헤쳤으며 빚 갚기를 독촉하고, 도적의 소굴에서 사족(士族)들을 가두고 형벌을 가해 처단하고, 횃불을 들거나 짐을 지는 부역을 하라고 위협해 고통을 받지 않은 양민들이 없습니다. 곡식이나 돈을 빼앗겨 부자[饒戶]들은 거의 모두 재산을 날렸습니다. 같은 해 8월 포군(砲軍) 300명을 이끌고 스스로 포군대장이라고 하며, 창을 들고 고을 안으로 들어와 전(前) 군수를 끌어내 묶고 때리는 등 하지 않은 짓거리가 없었습니다. 또 9월에는 성두한(成斗漢)과 함께 비적 무리 만여 명을 이끌고, 고을을 에워싸고 들어와 군사 기물을 탈취하고 인가와 기물을 때려 부수었는데, 그 수를 셀 수 없고 한 읍이 폐허가 되었습니다. 관청과 백성들이 모두 분노하여 사람들이 모두 이를 갈면서, 죽여서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충청 감영과 충주진(忠州鎭)에서 여러 번 포교(捕校)를 보내었고, 또 일본군과 소모관(召募官)이 고을에 들어왔을 때 추적하여 체포하고자 하였으나, 체포를 벗어나 끝내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올 6월 28일에 거만하게 고을에 들어가 전날에 마음대로 활개 치던 습관을 고치지 않고, 번번이 어리석은 백성들을 만날 때마다 장래에 후환이 있을 것이라 말하였는데, 그 말의 형세는 오로지 비적 무리가 다시 일어난다는 뜻에 있었습니다. 공갈하는 행동이 곁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아 사람들이 모두 분함을 품고 치욕을 떨쳐 버릴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그 다음 날인 29일이 본읍의 장날이라, 읍과 촌의 사람들이 모두 시장에 모였다가 그놈이 술집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급하거나 거리낌이 없는 모양새에 사람들이 분노하여 몰려가, 시장에 모여 있던 수백 명이 일제히 붙잡아 지체 없이 강변으로 몰아내어 땅을 파서 묻어 버렸습니다. 대개 이 표씨 놈은 죽을죄를 지어 목숨을 숨겨 지내다가 홀연히 원수의 땅으로 들어왔는데,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기세를 보이며 다른 사람을 제압하려고 하였는데, 이미 오래된 분노를 야기하여 스스로 그 목숨을 단축시켰으니 완고하고 또 어리석습니다. 꾀를 부리려다가 도리어 잘못되어 하늘의 죄를 받았으니 도망갈 곳이 없었던 것입니다. 시장의 백성들은 한목소리로 붙잡아 마치 신이 도와준 것처럼 강변으로 몰아내 묻어 버렸으니 복수가 삽시간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사람의 목숨은 오히려 지극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으나, 죄의 명목은 가볍게 취급하기 어려우므로 죽음은 진실로 애석함 없어 다시 논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죄를 지은 괴수가 법을 적용하여 처벌하지 못하고 백성들의 손에 붙잡혀 짧은 시간에 매장되었으니, 비록 멋대로 죽였다는 혐의가 있으나 개미떼와 같아서 막을 겨를이 없었고, 그 흩어짐이 벌떼와 같아 다그쳐 물을 도리가 없으니 진실로 지극히 한스럽습니다. 산골짜기의 어리석은 백성들이 단지 그 죄는 죽여야 한다는 것만 알았고 마음대로 처벌한 것은 추궁하기 어렵습니다. 작년 비적들이 소동을 벌일 때 군수가 부임하여 타이르고 개과천선하도록 위로하기를 귀화하여 말썽부리지 않도록 위로하고 가라앉히는 데 힘써서 목숨을 해치지 않았습니다. 아! 저 어리석고 완고한 무리들이 종종 패악을 행하는 것이 있는데 이는 귀화시킨다고 완전히 용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소위 귀화라고 하는 것은 비적의 무리가 무너져 흩어진 후에 어쩔 수 없이 잠시 얼굴만 바꾸었다가 (동학을) 침범하지 말라는 관칙(關飭)이 나오면 또다시 행패를 부리니, 이후 혹시 이러한 패악을 또 부린다면 비록 안정된 이후라도 붙잡아 처벌하고 결단코 용서하지 말아야 하므로, 부(部)에서 참작하여 처분하도록 보고를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