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군(舒川郡)에서 압송해 온 죄인 서창길(徐昌吉)과 유한표(劉漢表) 등의 진술을 (충청남도 관찰사가) 보고한 데 대한 (법부의) 50호 훈령 안에,
“지난번 (관찰부의) 보고서에는, 서천 군수의 보고서를 받은 것에 근거하여, ‘서창길이 동학도의 소요에 이름을 올려 관장(官長)을 능욕하고 백성들을 침학하였으며 한산(韓山)과 서천(舒川) 두 읍을 재앙에 빠뜨린 허다한 죄상과, 유한표가 수군과 육군의 군기(軍器)를 어려움 없이 탈취하여 한산과 서천을 유린하고 남비(南匪)와 마음을 합하여 여러 성(城)을 재앙에 빠뜨린 앞뒤의 행위를 부(府)의 뜰로 잡아와서 심문하면서 군에서 보고한 것과 같이 일일이 자백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진술에는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기만 하고 다만 죄가 없음을 밝히는 것에만 집중하니, 전에 (서천군에서) 질문할 때에 자백한 것은 누구의 자백인지, 두 범인의 범죄 기록이 전에는 무거웠는데 뒤에서 가벼운 것은 특히 의아하며, 귀 보고의 말과 의미가 앞뒤가 같지 않은 것은 더욱 놀랄 만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해당 군이 보고한 바는 명확한 증거가 스스로 존재하고 이번 진술서에서 억울하다고 한 것은 증거가 전혀 없습니다. 유한표가 저지른 죄상은 조경선(曺京先)의 진술에 이미 드러났지만, 조경선의 경우는 유한표의 진술에서 유학자의 무리라고 하면서 포군(砲軍)을 이끌고 자기의 첩을 억지로 빼앗아 갔다고 하였는데, 어찌 한 번의 대질도 없이 사안을 마무리 지었단 말입니까? 해당 세 범인을 조사하여 사실대로 정황을 듣되, 만일 해당 범인들이 한결같이 자백하지 않거든, 그 애매한 증거를 소상히 모으고 질문하여 안(案)을 갖추어 보고하여 결정하는 데 편하게 하기 바랍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두 범인을 처음 압송해 왔을 때 부(府)의 뜰에서 질문하기를,
“너희들은 어떻게 범죄를 저질러서 군(郡)의 보고에 오르고 이렇게 압송되었는가?”
라고 하니 모두 말하기를,
“죽을 운명이 닥쳐와서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진술할 말이 없습니다.”
라고 한즉 이는 곧 자백한 것입니다. 해당 군수 류기남(柳冀南)도 직접 와서 죽여야 할 것이라고 천만번 간곡하게 말하였기 때문에 의심없이 보고를 올린 것입니다. 해당 두 범인이 군에서 잡혀 관찰부로 압송되어 부정에서 한 질문은 부[법부]에 보고할 뜻이 없었고, 그래서 대략 처분한 것을 인정하여 수용한 것인데, 그것은 이미 그들이 순수하게 진술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앞으로 부(部)에 보고할 것이기 때문에 한 차례의 매질도 가하지 않고 가두어 두고 수정하여 보고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정을 엿듣고 비로소 곧 눈이 휘둥그레지도록 놀랐던 것인지, 보고한 후 며칠이 지나 서로 소장을 보내어 모두 억울하고 잘못된 것이라고 하더니, 훈령을 받아 다시 심문함에 모든 일을 변명하였습니다. 서창길의 경우는 윤사평(尹士平)에게 무고(誣告)를 당한 일이라 극구 억울하다고 칭하고, 유한표의 경우는 조경선에게 무고를 당한 것이라 극구 억울하다고 칭하였습니다. 지난번 자백한 것도 서창길과 유한표 두 범인이고 다시 억울함을 호소한 것도 서창길과 유한표 두 범인인데, 스스로 앞에서는 무겁게 이야기하고 나중에는 가볍게 이야기하여 앞뒤가 같지 않았습니다. 만약 잔인한 형벌을 시행하면 고초를 견디지 못하여 반드시 앞의 진술과 같아질 것인데, 억지로 한 자백에 이르게 되는 것 같아서 다만 각기 심문하였습니다. 다시 받은 훈칙(訓飭)이 이와 같이 엄하고 분명하기 때문에 해당 군(郡)에 은밀히 염탐꾼을 보내어 염탐도 하였고, 부(府)에서 여러 방면으로 탐문도 하였습니다. 두 범인이 죽어 마땅함은 입이 있는 사람은 모두 말하는 것이고, 군의 보고와 사람들의 말이 모두 기만이라 함은 저 두 사람의 진술일 뿐이며 다른 확실한 증거가 없습니다. 사건이 살해에 관계된 것이라 10배 신중하게 살펴서, 두 범인의 재차 진술에 기재된 윤사평과 이 감찰(李監察)과 조경선을 초대하여 서창길, 유한표 등과 대질시켜 조사하였습니다.
윤사평과 이 감찰에게 묻기를,
“너희들은 서가(徐哥)와 심한 원한이 있어 사지에 빠뜨리도록 꾸몄는가?”
모두 말하길,
“원한도 없고 꾸며낸 것도 없습니다.”
하여 또 묻기를,
“서가가 무슨 이유로 너희들을 지목하여 꾸며낸 일을 당했다고 하는가?”
하니 모두 말하길,
“서가가 동학비적이 되어 한 행패는 비록 자신의 진술이 없다 하더라도 사방 이웃이 지목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의심하여 꾸며냈다는 것은 서학(西學)을 구실 삼아 그 무리를 이끌고 묶고 때리며 돈을 빼앗은 것인데 그가 일찍이 저질렀던 일입니다. 지금 붙잡힌 것을 스스로 생각하여 남에게 혐의를 두어서 강한 어조로 벗어나려는 것입니다.”
라고 하기에 서창길에게 질문하기를,
“네가 동학이라 하며 저지른 패악과 서학이라 하며 저지른 악행은 잠시 접어 두고, 윤사평과 이 감찰 두 사람이 너를 진짜 도적이라고 날조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라고 하니 진술하기를,
“눈으로 본 것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습니다. 혐의가 있는 부분은 억측한 것입니다.”
라고 합니다. 유한표에게 묻기를,
“네가 이전 진술에, 조경선이 무리를 이끌며 총을 가지고 너의 첩을 빼앗아 갔기 때문에 이렇게 함정을 꾸며낸 것이라 하였으니, 동학도에 물들지 않고 아무 일 없이 집에 있던 자를 비적이라 무고하고 그래서 쫓아 버리고 위협하며 네가 모은 것을 가져간 것인가?”
라고 하니, 진술하기를,
“저는 집에 있지 않았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왜 집에 없었는가?”
라고 하니,
“진술할 말이 없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조경선이 네가 모은 것을 차지했으니 네가 원한을 품을 만한데, 조경선이 도리어 너를 빠뜨리려고 꾸며내는 것은 어째서인가?”
라고 하니 진술하기를,
“올해 음력 5월에 첩 때문에 가서 힐난했더니 이 때문에 무고한 것입니다.”
라고 하고 또 묻기를,
“조가(曺哥)가 너를 빠뜨리려고 꾸며내고 날조한 것을 너는 목도했는가? 어디에서 분명하게 들었는가?”
라고 하니, 진술하기를,
“애초에 본 것이 없고 또 다른 것을 들은 것이 아니라, 가서 힐난한 것 때문인 것 같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조경선에게 묻기를,
“네가 비적을 토벌한다는 구실로 평민들을 쫓아내고 그 모은 것을 탈취하여 차지했으며, 그들이 와서 추궁하는 것을 싫어하여 돌려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죽을죄에 빠뜨리려고 꾸며냈는가?”
라고 하니 진술하기를,
“약간의 고을 포수들[邑砲]을 이끌고 초토하는 관군을 따라다니며 비적을 체포하려고 생사를 초월하였는데, 장군의 명령을 받아 유학자들을 잠시 따라다니다가 돌아온 즉시 해산하여 귀가하니, 비적 유한표와 그 조카가 본군(本郡)을 빼앗아 차지하고 있다가 관군에게 패전하였습니다. 관군에게 쫓기다가 그 조카는 잡혀서 죽임을 당하고 유한표는 벗어나 남쪽으로 도망한 것 같으나, 남을 쫓아내고 첩을 빼앗은 것은 애초에 이런 일이 없었습니다. 유한표의 처와 첩을 받아 주는 곳이 없고 동냥도 할 수 없어서인지, 소요 후 오래되어 어떤 한 여인이 혹은 와서 음식을 구걸하고 혹은 와서 머무르고는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서로 관여하게 되어 지내 온 사정을 물어보니 유한표의 세 번째 첩이었습니다. 여인을 탐한 것이 아니라 나라가 있어도 도망가기 어렵고, 집이 있어도 돌아갈 수 없는 것을 가련하게 여겨서 차츰 받아 준 것입니다. 그랬더니 유한표 등이 구차하게 살아갈 곳이 없어 서학에 투신한 것인지, 그 기세를 구실로 와서 그 첩을 추궁하기에 반 마디도 힐난하지 않고 즉시 내어주었습니다. 그러니 그녀가 유한표를 헐뜯고 욕하면서,
‘지난번에는 어째서 돌아보지 않았고, 지금은 왜 와서 이야기하는가?’
하여 어쩔 수 없이 스스로 물러났습니다. 서로가 감정이 없어서 설사 평안하지 않더라도 진실로 죽음에 빠뜨리려고 꼬투리 잡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비록 그를 무고하였더라도 그가 만일 잘못이 없다면 일은 반드시 바른 곳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라고 하니 완고한 저 유한표는 대답할 만한 말이 없다고 하며, 다만 조가를 지목하여,
“너 때문에 내가 죽는다.”
라고 하였습니다.
억울하다는 것이 시초가 없고 일이 근거가 없으며 말이 뼈대가 없지만 또한 소홀히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호적(戶籍)을 새로 만드는데 탐색하기 위해 해당 군의 서기(書記) 송화정(宋化貞)이라는 자가 왔기에 두 놈의 사건에 대하여 증거를 수집하였습니다. 알려 준 내용에,
“곡식을 차지하고 돈을 빼앗은 것과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른 것, 성(城)을 함락하고 관원을 욕보인 것의 허다한 죄악은 비록 지나간 일이나, 지난여름 요수(遼水)의 성천(成川)에서 재앙이 일어난 곳을 조사하여 보고하라 하신 본부(本府)의 훈령을 받은 □□ 군수가 몸소 각 마을을 다녔습니다. 그런데 유한표가 서학에 들어가서 서천군을 전복하려고 한다 하여 손뼉을 치며 이를 갈았다고 합니다. 본군이 함열(咸悅)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자자하게 전파되자 본군의 군수가 교차(校差)를 은밀히 보내어 함열에서 체포하여 왔던 일이 분명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조경선이 무고를 날조하였다고 하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것입니다. 유한표가 패하여 달아난 후에 처와 첩이 유한표의 사촌 집에 갔었기에 그 사촌의 말 가운데에,
“은밀히 염탐하는 것이 여전히 다급하니, 만약 처와 첩을 받아 주면 큰 불의 불씨를 구해 주는 것일까 두려워 즉시 쫓아내어, 도로에서 떠돌며 구걸한 것은 온 군이 함께 보고 들은 것입니다.”
라고 하니 조경선이 억지로 그 첩을 빼앗았다는 것도 천부당만부당한 것입니다.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은 인지상정이기 때문에 그가 장차 죽을 것임을 듣고 예전의 악을 생각하지 않고 극구 억울하다고 하나, 지어낸 것은 하나같이 빠져나가려고 꾸며낸 말이고 나쁜 습관은 열 손이 지목하는 것입니다. 지금 부(府)의 약령시장(藥令市場)이 막 열렸기 때문에 한산과 서천 두 군에서 와서 머무르고 있는 모시 상인 김도유(金道有) 등에게 은밀히 조사하니 말 가운데,
“유한표, 서창길 두 놈을 본부(本府)로 압송할 때에 부자가 피해를 받은 자와 형제가 욕을 당한 자와 원수로 여기는 남녀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모여들어 그자의 살코기를 먹기를 원하는 자가 셀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본군 군수가 차마 볼 수 없어서 간신히 압송하였습니다.”
라고 하여, 그 정탐한 것으로 두 놈에게 물으니 그렇지 않다고 진술하였습니다. 윤사평과 이 감찰, 조경선 세 명이 대질할 때도 그렇지 않다고 했지만, 그렇지 않다고 한 실마리는 정확한 근거가 없는 것 같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이와 같고 범죄가 저와 같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어리석고 완고함이라, 지금 혹시 살려서 돌려보낸다고 하여도 원망하는 집안이 닥치는 대로 매질하여 다진 고기가 되는 것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때문에 유한표와 서창길의 경우 예전과 같이 엄히 가두고, 윤사평, 이 감찰, 조경선 등의 경우 해당 군으로 돌려보내며 연유를 보고하오니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건양 2년(1897) 1월 23일
충청남도 관찰사 이건하
의정부찬정 법부대신 조병식(趙秉式) 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