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도(本道) 암행어사(暗行御史)가 음력 정월에 담양군(潭陽郡)에 발자취를 드러낸 후에 비도의 무리를 쫓아가서 체포할 비밀 장소가 있었기에, 부[전라남도 관찰부]로부터 순검(巡檢)을 파견하게 하여 역졸(驛卒)과 함께 전라북도 정읍(井邑)・태인(泰仁) 등지에서 비도 무리 10명을 체포해 와서, 본부 총순(總巡) 신광희(申光熙)로 그 실정을 엄히 조사하여 공초를 별도로 책자로 갖추어 올려 바쳤습니다. 지금 이 열 놈 중 김형순(金亨淳)은 비도의 우두머리로 인명을 해치고 돈과 재물을 탈취하는 것이 허다한 행패가 이르지 못한 바가 없고, 전에 법망에서 빠져 지금 또한 드러난 흔적으로 가히 악행이 이어진 것이 이미 가득 차서 죄를 더 늘릴 수 없는 것이라, 비록 무리를 일으키는 소굴은 아니었으나 사악한 말로 어리석은 백성을 무고하게 현혹하니, 이와 같은 무리를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형률을 시행하여 경계하고 격려하는 것은 오직 어떻게 처분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 나머지 심도풍(沈道豊)・임몽기(林蒙基)・조진옥(趙辰玉)・강도련(姜道連)은 모두 갑오년(1894)의 여도(餘徒)로 안으로는 불화의 뜻을 품고 항상 수상한 행적을 답습하여 사람들이 지목하여 이에 체포하였으니, 그들이 행한 바를 궁구하면 그대로 두는 것은 불가합니다. 이내형(李乃亨)・김재원(金在元)・조대집(趙大集)・한용기(韓用基)・최동골(崔同骨)은 다기(多岐)하게 조사해야 할 것이나 현재 드러난 장물이 없으니 강제로 죄명을 더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이른바 김형순의 진술 중 이천에 사는 거괴(巨魁) 최시형(崔時亨)과 그 사위 김치구(金致九)와 그 처남 청주(淸州) 손응구(孫應九)와 응구의 조카이며 이름을 알 수 없는 손가와 또 거창(居昌)의 이정화(李正化)와 고부(古阜)의 김여중(金汝仲), 임실(任實)의 김수교(金壽敎), 속리산(俗離山) 이원팔(李元八)은 모두 유명한 비도라 하지만, 종적이 갑자기 빛이 번쩍이는 듯이 하여 빨리 염탐해서 붙잡아오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부[법부]에서 비밀훈령을 해당 관찰부의 해당 지방에 내려 주셔서 죄인을 정탐하고 수사하여 체포하게 해 주시고, 김형순이 맡아 둔 돈은 창평(昌平) 류남일(柳南日)에게 200냥과 이민중(李敏仲)에게 400냥으로 도적들의 장물과 관계 있는 까닭으로 두 사람을 잡아들여 실정을 조사하니, 곧 이민중에게 있는 400냥은 이미 을미년(1895, 고종32)에 담양 수성청(守城廳)에서 조사하여 거두어들였고, 류남일에게 있는 200냥은 진술이 횡설수설하여 따로 조사하오며, 위의 죄수 10명을 어사가 있는 곳에서 이미 비도 무리로 지목하여 잡아들인즉 부(府)에서 마음대로 판단하기 어려움이 있어 이에 보고하오니 조사하여 처분하시기를 바랍니다.
광무 2년(1898) 3월 4일
전라남도 관찰사 윤웅렬
의정부찬정 법부대신 각하
전라남도 경무서 착수비류(捉囚匪類) 죄인 공초안(供招案)
[내제(內題):광무 2년(1898) 3월 일 비류 죄인 공초]
・죄인 김형순(金亨淳) 37세
저는 본래 광주(光州) 갈전면(葛田面) 용귀동(龍歸洞)에 사는 주민이며 농업으로 자생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갑오년(1894) 동비의 소요에 비도 무리 집강(執綱)을 면치 못하고 부득이 행하다가, 같은 해 8월 초3일에 담양읍에 사는 국담(鞠淡)을 포살할 때 들으니, 담양의 진사 정경실(鄭京實)이 글로 쓰기를 국담을 모해(謀害)하라는 언사가 있었는데, 저는 가서 보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때 수창자(首倡者)는 접주 김문화(金文化)라고 이름한 자입니다. 그사이에 토색전 200냥을 창평군(昌平郡) 대방리(大方里) 류남일(柳南日)에게 두었고, 400냥은 나산(羅山) 이민중(李敏仲)에게 두었습니다. 그 후에 연이어 숨어서 피하여 동서로 흩어져 떠돌다가, 정유년(1897) 3월에 거창의 이정화(李正化)를 노성(魯城) 논산포(論山浦)에서 우연히 만났습니다. 이가(이정화)가 말을 내뱉기를 ‘정읍 고안동(古安洞)에 사는 심도풍(沈道豊)이 말하되, 지금 동학은 이전과는 달라 진심으로 도를 닦고[正心修道] 남을 살해할 마음이 전혀 없으면 가히 괴질의 재앙을 면할 것이요, 이치에 통달한 군자가 될 수 있다’는 말로 타일렀으므로 이어 심도풍의 집으로 갔습니다. 심도풍이 신병으로 신음하는 중에 그것을 물으니 곧 과연 그 말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고부에 사는 김여중이 이 집을 방문하니 또한 동학도라, 또 그 내력을 들으니 곧 법헌(法軒) 선생 도학(道學)이 점차 높아져 그 사위 김치구는 구암(龜巖)이라 호칭하고, 그 처남 청주 손응구(孫應九)는 이암(二嚴)이라 호칭하고, 손응구의 조카이며 이름을 알 수 없는 손가는 송암(松巖)이라 호칭하니 모두 접주(接主)입니다. 모두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어 팔로(八路)에서 체결한 동학도가 부지기수요, 법헌은 곧 최시형이고 이천(利川)에 거주하고 있고 그 집에 긴밀하게 왕래하는 자는 고부의 김여중・명중 형제와 임실의 김수교(金壽敎)라고 하였습니다. 설명이 이와 같으므로 그 근본 원인을 찾고자 하여 김여중과 함께 속리산에 가서 이원팔을 만나 보니 그가 역시 말하길, 법헌이 바로 이천에 있으며 도가 높고 바탕이 밝아서 백성들을 구제하니 이천에 함께 가서 도를 닦고 마음을 바르게 하고[修道正心] 첩지를 받고 돈을 거둘 뜻으로 금석같이 약조했습니다. 제가 갑자기 평소의 질환이 생기고 내심에 또한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있어 연이어 태인 석정동(石井洞) 강인백(姜仁伯)의 집에 돌아와서 머물다가 이번에 순검에게 체포되었으나, 동학도가 다시 일어난다는 이야기는 실로 계획된 바가 없습니다. 위의 세 명의 김씨 놈을 먼저 체포하면 법헌을 체포하는 것이 용이할 것이오며 저의 죄상은 이와 같을 뿐이오니 살펴서 처치하십시오.
・동일(同日) 죄인 심도풍(沈道豊) 27세
저는 본래 정읍군 남면(南面) 고안동(古安洞) 태생으로 농업을 바탕으로 살아왔는데 농사철에는 농사를 짓고 여가가 있으면 베를 짰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정유년(1897, 고종34) 6월에 고부 말목(末牧)에 사는 김낙봉(金洛奉)이 지술(地術)이 유명하였으므로 산소를 구하려고 오기를 청했더니, 김낙봉이 담양군에 사는 김형순(金亨淳)과 더불어 하룻밤 묵고 떠났을 뿐이요, 그 후에 김낙봉이 말하되 ‘너는 무슨 병이 있는고? 내가 신기한 방술(神方)이 있으니 이 주문을 읽으면 깨끗하게 병이 나을 뿐 아니라 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운운하므로, 주문을 청해 보니 곧 이는 동학도의 주문이요, 동리 사람들도 또한 책망하여 하지 말라고 하기 때문에, 제가 조상의 장사를 지낸 후에 김낙봉과 이별하였는데 뜻하지 않게 이번 정월 21일 아침에 순검과 역졸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이 외에 달리 진술할 것이 없으니 살펴서 처치하여 주십시오.
・동일 죄인 조진옥(趙辰玉) 53세
저는 본래 태인군 일후면(一后面) 평산동(平山洞) 태생으로 지난 병술년(1886)에 남촌면(南村面) 관점동(冠店洞) 아래에 이주하여 성산(星山) 이씨의 제각(祭閣)지기 명색으로 머물러 살았는데, 이 땅은 정읍・태인・순창 세 읍이 서로 접한 땅이었습니다. 저의 처가 술을 파는 것을 직업으로 했는데 왕래하는 사람이 많은 까닭으로, 지난 정유년 5월에 담양에 사는 김형순이 우리 집에 와서 망건장(網巾匠)이라고 이름하고 혹은 숙식하며 혹은 왕래하다가 조용히 말하는 것이 있었는데, ‘이번 동학이 다시 일어난다는 설이 있다’ 하므로 제가 말하길, ‘갑오년(1894)에 난을 겪은 후에 다시 이런 마음이 있었는가’라고 부당하다며 그것을 꾸짖었습니다. 그러니 김형순이 말하길, ‘이번의 도설(道說)은 이전과 다른 것이 있고 만약 잘 수양하면 재앙은 사라지고 복을 받는다’고 하며 또 말하길, ‘내가 또한 그 도의 근본을 파악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7월에 그가 홀로 청산(靑山) 보은(保恩) 등지에 가서 법헌을 방문하였다고 하더니, 8월에 내려와서 말하길 ‘이번 행로에서 오히려 법헌의 종적을 찾지 못했다’고 하면서, 다시 전해 들으니 헛된 말을 만들어 사람들을 속이고 재물을 취하려는 마음으로 돈을 토색하는 것은 도적놈들 무리와 다르지 않다고 하며, 그 도의 근본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저에게 일러 말하길 ‘다시 이와 같은 무리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을 따름이라’ 하였기에 저도 또한 옳다고 하고, 김가가 가져온 책자를 곧바로 물리칠 모양으로 말하니 김가도 신속하게 수습한다고 하더니, 이번 정월 21일에 수십 명이 먼저 저를 붙잡고 묻기를 ‘김형순이 간 곳을 사실 그대로 고하라’ 하므로, 제가 같이 석정동(石井洞) 강인백의 집에 가서 김형순을 잡아 체포하게 하였으니 살펴서 처치하여 주십시오.
・동일 죄인 이내형(李乃亨) 65세
저는 본래 정읍군 고안동 태생으로 경전을 읽으며 살고 있다가 지난 정유(1897) 3월에 최동골을 사위로 삼아 같이 살았습니다. 지난해 7월에 같은 마을 심도풍이 다시 동학을 수련한다고 하므로 동리 사람들을 많이 모으고 불러서 그것을 물으니 심가가 말하길, ‘내게 묵은 병이 있어 백약이 무효이므로 마음을 바로 하고 도를 닦으니[正心修道] 곧 질병이 자연히 소멸되었다’고 하므로, 마을의 사람들이 모두 옳지 않다 하고, 갑오년(1894, 고종31)의 옛일을 생각하면 오랜 것이 아니니 다시 이와 같은 설이 있으면 너 한 몸으로 인하여 한 동네가 해를 입을 수 있는가. 축출하는 것으로 마을의 논의가 모두 모아져 마을을 떠나라고 그를 꾸짖었습니다. 그러니 곧 심가가 애걸하며 이제부터 뉘우치겠다고 하므로 용서하여 살게 허락하고 그 후에 이와 같은 설을 듣지 못하더니, 이번 정월 21일에 순검과 역졸 등 수십 명이 김형순과 심도풍을 체포하고 저도 또한 잡혔으니 살펴서 처치하여 주십시오.
・동일 죄인 강도련(姜道連) 67세
저는 본래 함양 북면(北面) 사람으로 친삼촌의 집에 의탁하여 농업을 바탕으로 살아가다가, 지난 정유년(1897) 9월에 태인 석정동에서 옮겨 다행히 빈집을 얻어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지난해 9월에 태인 보림사(寶林寺)의 승려 석대사(錫大師)에게 불경을 복사하여 매일 37편을 읽고 외워 후생(後生)의 길을 닦다가, 이번 정월 21일 오후에 모르는 어떤 사람이 짚신을 사기 위해 저의 집에 와서 값을 논할 때에, 갑자기 수십 명이 먼저 짚신 사는 사람을 체포하고 저도 또한 그때 관인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짚신 사는 사람을 추문(追問)한즉 김형순이오니 살펴서 처치하여 주십시오.
・동일 죄인 김재원(金在元) 37세
저는 본래 정읍군에 사는 백성으로 죽물(竹物)로 생업을 삼고 살아가다가, 갑오년 동학도의 소요 때에 다행히 강제로 동학도에 들어가는 지경을 면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7월에 같은 마을에 사는 심도풍이 다시 동학을 한다고 하므로 마을 사람들이 모여 회의하며 심도풍을 불러 말하길, ‘우리 마을이 너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피해를 입어야 하나’라고 입을 모아 그를 책망하니 심가가 말하길, ‘내게 오래된 병이 있는데 이 주문을 외우니 재앙이 사라지고 병이 없어졌다’고 하므로, 마을 전체가 막고 금하니 다시 이와 같은 일을 하지 않겠다는 사유를 그때에 들었을 뿐이오니 살펴서 처치하여 주십시오.
・동일 죄인 조대집(趙大集) 37세
저는 본래 정읍군 태생으로 지난 정유년(1897)경에 남초상(南草商)을 직업으로 하여 정읍과 고부 양 읍의 장을 본 후에 연이어 순창 태인 등지에 가서 동쪽에서 사서 서쪽에서 팔며 쉴 틈 없이 분주하여, 동학과 같은 설을 듣지 못하였는데 천만 의외로 마을 사람들을 모두 체포할 때 저도 또한 잡혔으니 살펴서 처치하여 주십시오.
・동일 죄인 한용기(韓用基) 42세
저는 본래 운봉(雲峰) 동면(東面) 태생으로 지난 정유년 음력 12월에 태인 석정동 강도련의 집 곁방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정월 21일에 생면부지의 어떤 사람이 와서 짚신을 살 때 갑자기 순검과 역졸이 강도련의 집에 돌입하여 그 짚신 사는 사람을 체포한 후에 강도련 및 저를 아울러 체포하였으니 살펴서 처치하여 주십시오.
・동일 죄인 최동골(崔同骨) 25세
저는 본래 창평군 태생으로 정읍군 고안동(古安洞)으로 이사하여 살다가 갑오년(1894, 고종31) 이후부터 월성리(月星里) 손윤국(孫允國)의 집에 고용살이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정유년(1897) 봄에 이르러 주인 손가가 저의 사정을 가엾게 여겨 고안동 이내형의 딸과 중매를 청하여 처를 취한 후에 농업으로 업을 삼고 있는데, 정월 21일에 우리 마을의 사람들이 붙잡히는데 저도 잡히게 되었으니 살펴서 처치하여 주십시오.
・동일 죄인 임몽기(林蒙基) 30세
저는 본래 광주 갈전면(葛田面) 용귀동(龍歸洞) 태생으로 저의 7촌 숙부 영악(永岳)의 집에 의탁하여 농업을 바탕으로 하여 살다가, 갑오년 10월에 마을의 비적 무리 김문화(金文化)의 위협을 이기지 못하고 부득이 강제로 입도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 후에 경군(京軍)이 내려와서 비도 무리의 명색은 완전히 없애 버렸는데 한편으로 귀화한 후에 경군이 상경할 때를 맞아 그때 짐군(卜軍)으로 경군을 따라 상경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교동(校洞) 순학교(順學橋) 망건(網巾) 점막에 남아 파망상(破網商)으로 겨우 남은 목숨을 보전하다가, 올해 정월에 저의 처를 보려고 내려가는 길에 태인군 사리치(斜理峙)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아침 출발할 때에, 담양군 교졸이 김형순을 체포하려고 왔다가 마침 저를 보고 칭하여 말하길, “이놈도 또한 김형순과 같은 마을에 사는 자다.”라고 하고 갑자기 체포하여 왔으니 살펴서 처치하여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