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부재판소 검사 함태영(咸台永) 제1호 조회(照會)를 접수하여 보니 그 안에,
“법부 훈령 제29호를 받들어 보니 그 안에,
‘귀 보고서 제15호를 접수하여 보니 그 안에,
「법부 훈령 제14호를 받들어 감옥서에 수감되어 있는 죄수 이상옥(李尙玉)・신명우(申明雨)・김정업(金正業)・김낙철(金洛哲)・권성좌(權聖佐) 등을 모두 자세히 조사하였습니다. 범인들이 모두 갑오년(1894) 이전에는 동학에 물들었다고 칭하였으나 정부의 토벌을 겪은 후로는 동학을 등지고 농업으로 돌아왔다 하옵니다. 그중에서 권성좌는 동학 무리의 괴수 김치구의 외가 산 근처 땅에 그 아비를 묻었는데, 김가가 항상 묘를 파 갈 것을 독촉하고 있으니, 김가의 말 중에 자신의 교(敎)를 다시 좇으면 묘를 파지 않겠다고 하므로, 선산을 지키기 위하여 그 교를 다시 존중하였지만 배움을 전한 것은 전혀 없다고 합니다. 신명우는 그 아들이 동학 괴수 최가에게 데릴사위로 들어가서 김치구가 보낸 싸리나무 상자 등의 물건을 받았으나 그 배움을 다시 믿은 것은 없다고 합니다. 김낙철은 김숙여(金淑汝)에게 꾀임을 당하여 김치구 집에 가서 가르침을 받기로 김가에게 승낙을 얻었을 뿐이요, 김가의 연비(聯臂)로 동학의 괴수 최가를 만나 보고자 하여 김치구의 집에 있었으나, 입교는 못하였다고 합니다. 김정업은 동학을 등진 남은 무리로 그들 무리의 서찰을 전송하였으나 다시 믿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이상옥은 김치구가 글을 보내어 전일 배운 바를 다시 존중하라고 할 때에, 사양하여 물리치는 답을 보내고 다시 미혹됨은 없었다고 합니다. 진술한 모양을 살피면 이들은 모두 동학의 준동하는 무리로 권성좌는 다시 간사한 술수로 기운 것이 극히 심하지만, 그 마음이 실로 조상을 위하는 것에 말미암은즉 그 실정을 궁구하면 근원을 불쌍히 여길 만합니다. 신명우는 아들의 가르침에 불의한 책임은 면하기 어려우나 법을 궁구하면 곧 의혹이 없을 것이며, 그 나머지는 혹 서찰을 전하며 혹은 가르치고 배울 것을 약속했을 뿐, 범인들의 행위를 탐구하면 전후의 연유가 원래 대중을 미혹하는 것이 아니고, 모두 의혹을 받은 것이니 사술(邪術)을 따른다 하더라도 헤아려 판단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귀화를 신칙 격려하여 백성의 도리를 다하게 하면 그 무리들은 천만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수들을 경기재판소에 이송하여 각각 거주하는 곳을 따라 범인의 죄의 흔적을 조사하여 밝혀, 그 적실 여부에 의거하여 판결을 논하게 하면 굽어진 것들이 반드시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술서들을 첨부하여 이에 보고하니 조사하여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이 조사에 근거하여 이상옥 등 5명이 전의 습관을 고치지 않는 것이 극히 슬프고 비통한지라, 이와 같이 특별히 엄히 징벌하지 않으면 사악함에 물든 무리들이 반드시 장차 계속 뒤를 이어 일어나서 많은 사람을 미혹할 것이라, 가볍고 무거움을 나누고 법률을 살펴 처리 판단함은 어쩔 수 없는 바이니, 곧바로 이러한 뜻을 경기재판소에 옮겨서 조회하고, 해당 범인 5명을 연이어 해당 재판소에 압류하여 이송하고, 일의 전말을 보고하여 올 일로 이에 훈령하니 이에 의하여 시행할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해당 이상옥・신명우・김정업・김낙철・권성좌 등을 순검을 정하여 압송하오며 이에 조회하니 자세히 듣고 판단하심을 요합니다. 재(再):해당 범인 등의 일체 서류를 첨부하여 보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잡아 올린 죄수 이상옥・신명우・김정업・김낙철・권성좌 등을 차제에 세밀하게 캐물으니, 범인들이 모두 농민으로서 갑오년(1894, 고종31)경에 동학인의 위협을 받고 따라가기를 강요받았다가 정부의 토벌을 두려워하여 돌아와서 곧바로 귀화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이상옥은 동학접주 김치구가 문서함을 보내어 이전의 도(道)를 다시 닦기를 권했지만 그것을 물리치고 처음부터 따라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신명우는 그 아들 면식(冕植)이 김치구와 더불어 같이 이 최시형(崔時衡)의 사위인데 김치구가 보낸 물건들을 물리치지 않고 받아서 둔 것은 안면이 있던 까닭이요, 실로 이에 뜻을 두고 다시 동학을 믿은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김정업은 스스로 동학을 등지고 장사로 업을 삼아 용안(龍安), 음죽(陰竹) 등지에서 왕래하므로 그 무리의 서찰을 지나는 길에 전송하였으나, 실제로는 화답하고 응하거나 상종하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김낙철은 동학 잔당인 김숙여가 꾀어 온 것을 듣고 김치구 집에 머물러 그 조카를 가르치고, 최시형을 보고자 함은 이 도의 속내를 알고자 함이요 숭배하며 믿고자 함이 아니라고 합니다. 권성좌는 김치구 외가의 산 근처에 그 아버지를 매장하였는데 김치구가 항상 파는 것을 독촉하고자 하며, 또 말 중에 네가 만약 우리의 도[동학]를 믿고 숭배하면 마땅히 무덤을 파지 않을 것이라 하므로, 선산을 보전하기 위하여 부득이 입교하였고, 김치구(金致九)의 집을 빌려서 사는 것은 또한 가난하여 집이 없기 때문에 실로 만족하여 믿고 혹한 것이 아니라 합니다. 대개 이들의 두목은 최시형, 김치구 두 놈인데 도망가서 아직 잡히지 않고 있고, 지금 범인들은 모두 이렇게 강제로 한 것이요 실제로 기꺼이 따라 한 것은 아닐 뿐더러, 또 사건이 지나간 일에 속한 것이요 지금 다시 미혹되지 않으니, 스스로 고쳐서 귀하게 된 것과 위협에 못 이겨 따라서 한 일을 특별히 구별하여, 칙유(飭諭)를 내려서 풀어 주어 각각 농업으로 돌아가게끔 함이 어떨지, 범인들의 진술서를 이에 첨부하여 질품하니 조사하여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광무 2년(1898) 5월 1일
경기재판소 판사 김영덕
의정부찬정 법부대신 이유인 각하
・죄인 이상옥(李尙玉) 31세 이천 거주
저는 충주에 살던 백성으로 지난 갑오년(1894, 고종31)쯤에 동학의 괴수 김치구로부터 협박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입교하였습니다. 9월에 이르러 중앙군[京兵]이 와서 토벌하는 데에 겁을 먹어서 이에 도를 배반했습니다. 작년 3월쯤 김치구가 저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전날의 도는 곧 하늘을 공경하고 선을 행하는 도였다. 이전의 공부를 다시 계속하여 믿음을 갖고 잊지 않는 게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환란을 겪은 뒤부터는 여기[동학]에 뜻이 없습니다. 만약 하늘을 공경하고 선을 행하고자 한다면, 어찌 그런 길이 없을 것을 걱정하여 다시 이 천지 사이에 용납하기 어려운 죄과를 범하겠습니까.’ 이러한 내용으로 답장을 써서 단호하게 물리쳤습니다. 마침 그때 시찰관이 이천군에 도착했습니다. 이 서찰이 오고 간 사실을 듣고 이천읍의 순교(巡校)로 하여금 잡아오게 해서 가두고, 그간의 정황과 행적을 조사하고 심문했습니다. 또 김치구가 사는 곳을 물었습니다. 그래서 진술하기를, ‘한번 배교한 뒤에 다시는 죄를 범한 적이 없습니다. 또한 김치구가 사는 곳도 모릅니다’ 했더니, 계속 갇혀 이런 지경에 이르러 다시 아뢸 만한 일이 없으니, 바라옵건대 명확히 조사하여 처분해 주십시오.
・권성좌(權聖佐) 28세 이천 거주
저는 임진년(1892)경에 부친상을 당해 김치구 외가의 산소 근처에 매장했습니다. 김가가 항상 무덤을 파 가라고 독촉했고, 또 말하기를 입도하면 파 가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선산을 지키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입교했습니다. 마침 중앙군이 와서 토벌할 때를 맞아 곧바로 임금님의 백성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정유년(1897) 12월경에 김치구가 원주(原州)로 이사 가서 살고 있을 때에 제가 살 집이 없었던 탓에 그의 집을 빌려서 살았습니다. 이 때문에 제가 다시 이 도를 받든다고 사람들이 말하여, 이런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바라옵건대 명확히 조사하여 처분해 주십시오.
・신명우(申明雨) 46세 음죽 거주
저는 농사를 지어 먹고살고 있습니다. 지난 갑오년(1894) 8월쯤 청주 사는 임주호(任周鎬)를 통해서 입도하였습니다. 10월쯤 기포(起包)하여 왜(倭)를 물리치기 위해 같은 동학교도 권동우(權同禹)와 청주 지역에 함께 갔다가, 접주(接主) 손사문이 패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몸을 빼내 도망쳐 영남 지역을 떠돌아다니다가, 병신년(1896, 고종33) 2월에 이르러 비로소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랬더니 최시형(崔時衡)의 사위 김치구가 와서 꾀기를, 이전의 공부를 잊지 말라고 했고, 또 이르기를, ‘마땅히 전해 줄 물건이 있으니 마찬가지로 신중히 간수하라’고 말하고는 갔습니다. 그 뒤에 과연 어떤 사람이 와서 싸리 바구니(杻籠) 두 짝, 보자기 한 개를 전해 주었기에, 그 사람에게 물어보았더니 임원 명단을 기록한 장부[任名錄]였습니다. 저의 아들 신면식(申冕植)이 최법헌(崔法軒)에게 데릴사위로 들어가 김가[김치구]와는 동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괄시하여 물리치지 못하고 그대로 보관해 두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달가운 마음으로 다시 동학을 숭상한 일은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명확히 조사하여 처분해 주십시오.
・김정업(金正業) 50세 한산(韓山) 거주
저는 갑오년(1894)경에 임천(林川) 칠산(柒山)에 사는 이용선(李用善)이 위협하여 입교하였습니다. 그 무리들이 패배한 이후에는 도를 등지고 귀농(歸農)하여 상업을 겸업하며 살았습니다. 이리저리 다니다가 용안(龍安)에 이르러, 그곳의 접주인 박치경(朴致京)이 사람을 보내 저를 불렀으므로 가서 만나 보니, 곧 1원(元)짜리 돈 3장을 내어주고 ‘김경재(金敬在)와 같이 음죽에 사는 신명우에게 가서 서찰을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의심 없이 믿고 곧바로 전하여 주었습니다. 한번 도를 저버린 이후로는 진실로 믿고 숭상한 일이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명확히 조사하여 처분해 주십시오.
・김낙철(金洛哲) 38세 부안 거주
저는 갑오년(1894) 3월경 호가 해사(海史)인 본군 사람 김석윤(金錫潤)에게서 동학을 전수받았습니다. 환란을 겪은 이후에, 곧 배도(背道)하고 임금님의 백성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작년 10월경에 이르러 임실(任實)에 사는 김학종(金學鍾)-자(字)가 숙여(叔汝)이고 전라좌도 두목이다-이 저를 보고 말하기를, ‘이전의 공부를 계속하면 재앙이 사라지고 병이 없어질 것이다’는 등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에 대답하기를 ‘좋기는 좋다만, 잡히면 반드시 죽을 테니 어찌 다시 공부를 하겠는가? 그러나 꼭 김치구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은 뒤에라야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라건대 반드시 나를 위해 한번 만나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작년 12월경에 이르러, 과연 김숙여와 가서 김치구를 원주 땅에서 만나, 그대로 그 집에 머물렀습니다. 그의 조카에게 글자를 가르쳤고 또 동학 괴수 최시형을 보려고 했고 그 도가 어떤지 알아보려고 했지만, 당초 믿고 숭상하거나 깊이 현혹된 일은 없습니다. 바라건대 명확히 조사하여 처분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