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하 영광(靈光) 군수 신태관(申泰寬)의 보고서를 받아 보니 그 안에,
“외부(外部)의 훈령에 의거한 관찰사의 훈령을 받들어 보니,
‘본군 지역 내에 만일 영학(英學)을 칭탁하며 계(禊)를 만들어 행패를 부리는 자가 있으면 수종(首從)을 막론하고 잡아 가둔 후 성명을 적어서 보고하라’
하셨습니다.
본군 삼남면(森南面)의 김태서(金台書)라고 하는 놈은 원래 함평(咸平) 사람으로, 사람들을 유혹한 후 속여서 돈과 재물을 빼앗는 것이 바로 그의 장기입니다. 최근에 영학을 칭탁하며 평민을 위협하여 그 당으로 몰아넣다가, 조금이라도 그의 뜻을 어기면 원한을 품고 앙갚음을 하니 하는 짓마다 화근이 되었습니다. 불쌍한 저 마을 백성들이 오랫동안 그것을 싫어하다가 연명(聯名)으로 호소했습니다. 이에 그 소장을 살펴보니,
‘김가 놈이 끼치는 패악이 장차 선량한 백성에까지 미치려 하고 있습니다. 연못의 물고기가 섞이고 집의 까마귀를 구분하기 어려우므로, 공문을 만들어 주어 청탁(淸濁)을 구분하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쪽의 이야기만으로 갑자기 잡아들이는 것은 아마도 신중함이 부족할까 걱정되어 철저히 염탐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소위 김태서라는 자는 동비의 거괴(巨魁)로 과거 법망을 빠져나왔지만 갑오(甲午, 1894)년부터 향리(鄕里)에서 지목을 받자, 사지(死地)에서 목숨을 구하고자 영학을 칭탁하고 옛날에 하던 짓을 하면서 사람들의 입을 막고자, 이러한 행패가 있게 된 것입니다. 7개 읍의 계장(禊長)이라고 칭하며, 방문(榜文)을 통행로에 붙이고 날짜를 정하여 당(黨)을 모았으며, 평민을 강제로 가입시켜 강제로 돈을 걷어 욕심을 채우고 여러 가지로 현혹시키자 사람들이 의심하였습니다. 이 같은 불법적인 무리는 마땅히 징계를 해야 하기에, 위의 김가 놈을 우선 잡아 가둔 후 이에 보고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그놈 김태서를 본소로 압송해 저지른 짓을 엄히 조사하여 진술을 받았습니다. 그 공초 기록을 별지에 첨부해서 보실 수 있도록 올립니다. 이를 조사하오니 지금 김태서는 갑오년 비괴(匪魁)로 법망을 피해 목숨을 건졌으니, 마땅히 마음을 고쳐먹고 신중히 반성하여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지 않고 영학을 칭탁하여 계안(禊案)에 이름을 올리고, 송문여(宋文汝)가 맡았던 일을 대신 맡아, 방문을 사창(社倉) 및 남계(南溪)에 붙였으니 계장으로서 행동에 문제가 심각합니다. 최일서(崔一西)의 지휘를 믿고 따르며 고부(古阜)의 말목(抹牧)장터에 참가하여 평민을 협박한 짓은 놀랄 만합니다. 지금까지는 화근이 비록 작으나, 어리석은 백성이 선동에 현혹되기 쉬우니, 아마도 이러한 무리들은 법에 따라 징벌한 연후에야 백성들에게 경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때문에 경무서(警務署)에 가두어 놓고 이에 보고하오니, 살펴보시고 법률에 따라 처벌하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광무 3년(1899) 2월 5일
전라남도재판소 판사 민영철
의정부찬정 법부대신 각하
・광무 3년(1899) 1월 11일 영학(英學)죄인 김태서(金台書) 취초기(取招記). 나이 44세
저는 본래 함평군(咸平郡) 태생으로 지난 갑오년(1894, 고종31) 8월경에 함평 초포(草浦)의 동학접주 이은중(李恩仲)에게 수도(受道)한 후 추종하다가 같은 해 12월쯤에 동학을 소탕한다는 명령을 듣고는 각자 해산했습니다. 저는 진도 등으로 피신했다가 정유년(1897) 12월쯤에 영광(靈光)의 삼남면(森南面)에 거처하면서 농사를 지어 생계를 꾸렸습니다. 올해 8월 초3일에 고부(古阜)에 살고 있는 이종(姨從) 친척을 만나러 장성(長城)의 사거리에 들렀는데, 그곳에 사는 송문여(宋文汝)와 정읍(井邑) 서일(西一)에 사는 최일서(崔一西) 두 놈이 영학의 계장(禊長)이라고 칭하면서 감언이설로 저를 그 무리에 넣으려고 했습니다. 저는 우매했기 때문에 그 속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고 교전(敎錢)으로 5전을 낸 후에 계안(禊案)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랬더니 송문여가 지니고 있던 계장의 직함을 제가 맡도록 했습니다. 저는 본래 목불식정(目不識丁)으로 직함은 비록 계장이지만 영학 책자(冊子) 등의 여러 물건을 등에 짊어지고 다녔을 뿐이었습니다. 다만 수계장(首禊長) 최일서의 지휘에 따라 백양산(白羊山)․도치(島峙) 등 가까운 마을을 다니면서 권유하여 가입시킨 사람이 50명에 이르렀습니다. 소위 교전은 최일서가 ‘교사(敎師)의 지휘가 있었다’고 하며 한 푼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최일서․송문여와 저 등 세 놈은 모두 정읍 최일서의 집에 도착하여 하룻밤 유숙했는데, 다음 날 헤어질 때 최일서가 방서(榜書) 2장, 회문(回文) 1장, 총 3장을 저에게 주며 말하길, ‘이 방서와 회문을 영광군 사창(社倉)․남계(南溪) 등에 붙여서 영광군 백성에 대해 한편으로는 꾀어서 계안에 가입하도록 하고, 한편으로는 교전을 거두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저는 소매에 넣고 길을 떠나 저의 이종 친척집에게 들렀다가 곧장 귀가한 후, 같은 달 16일에 방서와 회문을 사창․남계 등의 지역에 붙여 놓고 각 마을 사람에게 돈을 내고 계안에 가입하라며 자세히 전달했습니다. 그 후 9월 26일에 최일서로부터 고부 말목장터로 오라는 소식을 듣고 송문여를 만나 함께 고부 말목장터로 갔습니다. 마침 영국(英國) 교사가 도착하였고 가르침을 들으러 온 사람은 아마 5~600명이었습니다. 교사는 각자 선한 마음을 닦으라는 뜻으로 몇 시간 동안 연설한 후에 바로 돌아갔고, 모인 사람들도 또한 각자 흩어졌습니다. 저도 바로 돌아왔는데, 그때가 10월 초5일이었습니다. 그사이 마을에서 제가 영학을 칭탁하여 방서와 회문을 붙이고 백성들을 강제로 계안에 넣어 돈을 받으려고 한다며 본관(本官)에 등소(等訴)했습니다. 저는 마을 사람들의 이러한 행동을 알지 못하고 아무 생각 없이 집에 있었는데, 관에서 찾아와 갑자기 체포되어 본군에 수감되어 있다가 올려보내진 것입니다. 죄의 경중은 오직 판단하시는 것에 달려 있겠으며, 이외에는 달리 아뢸 것이 없으니 상고하여 처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태서의 이른바 방서와 회문을 조사해 보니, 제목이 하나는 경시(警示)라 하고 다른 하나는 회문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소위 경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우리 대동계(大同契)는 곧 기강을 세우고 풍속을 바로잡는 곳이다. 한 차례 예배한 후에는 반드시 대경장(大更張)의 길이 있을 것인데, 지금은 추수하는 시기라 농사일이 바쁘므로 29일로 날짜를 다시 정한다. 그 안에 입교한 여러 형제들은 일제히 이문(里門)으로 모일 것이며, 어떤 마을에서든지 포구로 쌀을 내가는 행위, 불효하거나 우애롭지 못한 일 등을 막론하고 모두 책자로 만들어 적어 가지고 와서 실제 효험을 보도록 한다면 다행일 것이다. 이외에 효유할 사항은 예배 날에 직접 전달하겠다. 칠읍 계장(七邑禊長) 김”
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소위 회문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다음은 회유(回諭)하는 일이다. 이후에는 예배(禮拜)하지 말고 바로 수도(修道)하는 것이 마땅하다. 때문에 이에 회문하니 만일 거행하지 않는 사람은 단단히 다스릴 것이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일을 빙자하여 교민(敎民) 간을 혼란하게 하는 자는 죄의 가볍고 무거움을 분별하여 적에게 항복한 자와 같은 벌을 내린다. 본업이 밭을 갈고 길쌈하면서 수신(修身)하는 자는 적을 죽인 자와 같은 상을 내린다. 재물을 탐하는 자는 그중에서도 특히 엄히 다스리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교전(敎錢)으로 5전씩 모두 거둘 것. 수계장(首禊長) 최(崔), 칠읍 계장 김태서”
라고 하였습니다.
횡설수설한 문장과 어리석은 문체는 다만 그 본문에 따라 조금도 고치지 않고 살펴보실 수 있도록 베껴 올린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