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全州) 진위대대(鎭衛大隊) 대대장(大隊長) 홍직길(洪直吉)의 조회(照會)를 받아 보니 그 안에,
“정읍․고부 등에서 소요를 일으킨 비류 중 해당 군에서 잡아들인 자와 본대(本隊)에서 출병하여 체포한 자를 군부(軍部)에 보고했습니다. 군부에서는 지령을 내려, ‘잡아들인 비류는 모두 본도의 재판소로 이송하여 죄를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두 군(정읍․고부)에 수감되어 있는 비류 등을 모두 압송하여 지금 이송하고 비류의 성명을 좌개(左開)하여 조회하오니 잘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좌개
정읍 최영두(崔永斗), 하윤현(河允玄), 김춘언(金春彦), 정막동(鄭莫同) 이상은 해당 군에서 잡아들인 자들입니다. 박봉원(朴奉元), 최용준(崔龍俊), 백낙호(白洛浩), 임중오(任中五), 백화신(白化信), 이용태(李龍泰), 최방서(崔方西), 최동순(崔東巡), 안기성(安基成) 이상은 군대에서 잡아들인 자들입니다. 차봉순(車奉淳), 차병옥(車炳玉), 임성진(林成辰), 허응호(許應浩), 박성일(朴性一), 박창규(朴昌奎), 최정학(崔正學) 이상은 군대와 해당 군의 퇴교(退校)들이 잡아들인 자들입니다. 고부의 서한경(徐漢京), 조자윤(趙子允), 김치도(金致道), 김화삼(金化三), 김낙여(金洛汝), 정인철(鄭仁哲), 김도삼(金道三), 김관풍(金寬豊), 양희조(梁希祚) 이상은 해당 군이 잡아들인 자들입니다. 합계 29명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위의 압송되어 온 죄인 최영두 등 29명을 엄히 조사하여 공초를 받았습니다. 그 결과 주도한 자와 추종한 자가 구분이 있었고, 추종한 자 중에서도 또한 죄의 경중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죄를 결정하기가 매우 어렵고 문제가 없을 수 없기에, 각각 그 진술서를 문안으로 만들어 올려보냅니다. 그리고 낱낱이 조사하여 차례대로 설명을 달아 좌개(左開)하여 질품(質稟)하오니, 살펴보시고 판단하셔서 명령을 내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광무 3년(1899) 7월 12일
전라북도재판소 판사 이완용
법부대신 임시서리 중추원 의장 조병식 각하
좌개
정읍의 최영두는 저지른 짓을 모두 자수하였으니 법률에 따라 무겁게 처리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기에, 엄히 수감했습니다.
정읍의 하윤현은 패하여 도망가는 길에 오히려 총을 짊어지고 최영두의 집으로 가서 유숙했으니, 협박을 받고 따랐다는 것은 실로 믿을 수 없어 엄히 칼을 씌워 수감했습니다.
정읍의 김춘언은 비록 협박을 받고 따랐다고는 하나, 패하여 도망가는 길에 추심할 돈이 있다고 핑계 삼아 총을 가진 하윤현과 함께 최영두의 집으로 가서 유숙했으므로 엄히 수감해 놓았습니다.
고부의 서한경은 그가 과연 협박을 받아 따랐던 것이라면 마땅히 틈을 타서 즉시 몸을 뺐어야지, 어찌 패배를 당한 연후에 도망쳐 왔는지 진실로 의심스럽기에 엄히 수감해 놓았습니다.
정읍의 박창규는 비록 이번 난당(亂黨)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동도가 임명한 구첩(舊帖)을 가지고 있기에 엄히 수감해 놓았습니다.
정읍의 백화신․백낙호․최용준․박봉원․임중오․안기성 등은 협박을 받아 잠시 따라다니다가 곧바로 도망쳐 왔으므로 모두 엄히 수감해 놓았습니다.
고부의 김치도․조자윤․정인철․김도삼․김관풍․김화삼, 정읍의 허응호 등은 처음에는 따라가지 않았다며 똑같이 말했기 때문에 체포한 해당 군의 순교 등을 불러들여 질문을 하니, ‘위 사람들의 성명이 고창에서 온 증빙서류에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각기 그 집에서 체포했던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본부의 감옥이 좁아서 여러 죄수를 감독하고 지키는 데 불편하고, 지금 바야흐로 여름에 죄수의 위생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 모두 각 해당 군으로 돌려보내 수감하였습니다.
정읍의 최정학은 처음에 장물 두목으로 잘못 알려졌다가 결국 순교에게 체포되었으니 본군(本郡)으로 다시 돌려보내 수감하였습니다.
정읍의 이용태는 현재 두 곳에 창으로 찔린 상처가 있고, 정막동은 엉덩이에 장(杖)을 맞은 상처가 낭자하므로, 협박을 받아 억지로 따랐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기에 역시 모두 본군으로 돌려보내 수감하였습니다.
고부의 양희조는 진술에 따라 증거문서를 참고해 보니, 이름이 차이가 나고 거주지가 다르므로 또한 본군으로 돌려보내 수감하였습니다.
고부의 김낙여는 협박을 받아 잠시 참여했다가 중간에서 도망왔고, 정읍의 최방서 등은 애초에 따르지 않았다고 여러 차례 밝혔으나, 모두 신병(身病) 때문에 사망했습니다. 두 구의 시신을 모두 밖으로 빼내고, 각각 그 친척에게 알려서 시신을 가져가게 했습니다.
고부의 최동순은 그 형 최방서가 체포될 당시 방서가 앓고 있었기 때문에, 순교(巡校)가 그 형을 업고 본군으로 가게 했는데 바로 체포되었습니다. 정읍의 차봉순, 박성일, 임성진 등은 각기 형의 죄 때문에 대신 체포되었습니다. 차병옥은 그 종형(從兄)의 죄 때문에 대신 체포되었습니다. 해당 군의 순교 등을 불러서 물어보니, 죄수들의 진술과 대체로 차이가 없기에 이상 5명의 죄수는 모두 풀어 주었습니다.
전라북도 정읍․고부에서 체포된 비류의 공안(供案)
광무 3년(1899) 7월 일 전라북도 정읍․고부에서 체포된 비류의 공안(供案)
・정읍의 최영두(崔永斗) 나이 73세
음력 4월 18일 밤에 저의 아들 익서(益西) 및 고창(高敞) 사는 박정집(朴正執) 등 32명을 데리고 고부군으로 가서 서양 총 11자루와 천보총(千步銃) 15자루, 조총 150자루, 화약 2상자, 철환(鐵丸) 1상자, 탄자(彈子) 50개를 찾아서 말 5필에 싣고 왔습니다. 동군 삼거리[三街里] 주점에 도착해서 마필은 읍내로 돌려보내고, 짐꾼[負持]을 정해서 정읍의 왕심리(旺心里)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 동네 안경운(安京云)의 집에서 저녁을 먹은 후에 흥덕(興德)으로 가서 아침을 먹은 뒤 사포(沙浦)로 향했습니다. 점심을 먹고서 사포의 유 첨사(柳僉使) 집에서 전(錢) 100냥을 색출한 후 데리고 온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동군 하오산(下五山)의 이 진사(進士) 집으로 가서 유숙했습니다. 그 다음 날인 21일에 흥덕과 고창의 경계 지역인 사기점(沙器店)에서 저녁을 먹고, 횃불을 들고 무장읍(茂長邑)으로 가니, 마침 관아는 비어 있고 백성들은 모두 놀라 흩어졌습니다. 작청(作廳)으로 들어가 아침과 점심을 요구하여 먹은 후 고창군으로 갔는데, 먼저 간 일행이 이미 그 군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저는 고창의 증대점(曾大店)에 뒤따라 도착했는데, 비를 만나 지체하는 사이에 앞서간 사람들이 패하여 흩어져 돌아왔기 때문에, 저 역시 저의 집으로 도망왔습니다. 24일 밤에 무장에 사는 하윤현(河允玄)과 부안의 김춘언(金春彦) 두 놈이 조총 11자루를 지고 왔는데, 조총은 모시밭(苧田)에다가 숨겨 놓고 이 두 놈이 저의 집으로 와서 밥을 찾기에 밥을 주고서 유숙하게 했습니다. 다음 날 25일 아침에 정읍의 장교(將校)가 와서 저를 체포했고, 짐꾼[負持軍] 하윤현・김춘언 두 놈도 체포되었습니다. 조총 11자루는 하・김 두 놈이 정읍 장교에게 찾아다 주었습니다. 저의 아들 익서가 거느린 사람은 천 명에 이르며, 익서는 이미 몸을 빼어 도망갔습니다. 이번에 일을 일으킨 본뜻은 왜놈과 양놈을 물리치고[伐倭伐洋] 보국안민(輔國安民) 하는 데 있었습니다.
・정읍의 하윤현(河允玄) 나이 36세
저는 음력 4월 22일에 무장 당산(唐山)에 사는 민경오(閔敬五)가 시켜서 물건 값으로 전(錢) 50냥을 금구읍(金溝邑)의 김가(金哥)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 후 원평(院平)을 지나 고창에 도착하니, 수성군(守城軍)이 ‘수상한 사람은 성으로 들어갈 수 없고 다른 들판 길로 가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 말에 따라 다른 길로 가서 향교에 도착했습니다. 그랬더니 동학 무리가 저를 잡아 놓고, ‘너는 수성군이 틀림없다’고 하며 보□□□(步□□□)하여 죽이려고 하였기 때문에 수없이 애걸하여 화를 면하였습니다. 그 다음 날에 풀어 줄 것을 간절히 청하니 허락하지 않고 동행하도록 하였습니다. 마침 선진(先陣)이 고창의 수성군에 패배했고, 저도 도망갔는데 총을 지고 따라갔습니다. 패배를 당한 후에 총 11자루를 짊어지고 정읍의 최영두 집에 가니, 영두가 ‘우리들이 거사를 일으켜 무안(務安)과 목포(木浦)를 격파하려고 했지만 민심이 동조하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장차 체포되어 죽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날 밤에 최영두의 집에서 유숙하고 다음 날 정읍의 순교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총 11자루는 모시밭[苧田] 사이에 숨겨 두었는데, 최영두가 장교에게 알려 주어 찾아갔습니다. 괴수는 정읍의 최익서와 부안의 김여중(金汝中) 두 놈인데, 김여중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거사를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최익서는 그 스스로 거사를 일으켰고, 익서에게 들으니 ‘서울에 사는 최보따리 익현(崔甫達伊益玄)이라는 사람이 거사할 뜻으로 무장 등지에 통문을 보냈지만, 거사를 일으키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 날 최영두가 말하길, ‘이번 일은 비록 좋은 계책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두 두령의 존재를 모르고 토색질을 주로 하니 마음이 매우 답답하다’고 하였습니다. 음력 4월 18일에 최영두, 최익서 부자가 접(接) 소속의 270~80명을 이끌고 부안의 줄포(茁浦)로 가서 점심을 먹은 후, 흥덕으로 향하여 사포(沙浦)에서 유숙했습니다. 20일에 고부 난산(卵山)장터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은 뒤, 흥덕의 하오산(下五山)에서 유숙했습니다. 21일에 무장군으로 들어가 백성들에게 효유하길, ‘백성이 도탄에 빠져 있다. 이 때문에 이 거사를 일으켰다’고 하고, 바로 작청으로 들어가 이방의 동생에게서 전 1,400냥을 얻어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하오산으로 향하여 고창군을 함락시키려고 그 군에 갔다가 패배를 당한 것입니다. 깃대 등은 삼지창기 2개, 대기(大旗) 2개로, 백색의 삼승(三升) 무명으로 만들어 전면에는 ‘보국안민(輔國安民)’ 네 글자를 쓰고 깃발의 가장자리는 청색 무명으로 꾸몄습니다.
・정읍의 김춘언(金春彦) 나이 32세
저는 부안에 살면서 남의 담살이[雇工]가 되었습니다. 음력 4월 21일에 주인 이영진(李永振) 및 이웃에 사는 이덕현(李德玄)이 갈치를 사기 위해 각기 전 4냥씩을 제게 주었습니다. 이에 물고기를 사러 본읍의 줄포로 갔는데, 마침 도착한 그 무리들을 만나 그들에게 협박을 받아 그 화약 등의 물건을 지고 고창의 증대점(曾大店)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리들이 패배하여 돌아왔고 하윤현이 저에게 말하길, ‘갈치 값은 마땅히 최영두 집에서 마련해 줄 것이니, 이 조총 꾸러미를 모두 최영두의 집으로 함께 가지고 가라’고 했습니다. 때문에 저는 돈을 받기 위해서 함께 최영두의 집으로 갔다가 25일에 체포되었습니다. 저는 이 사이에 협박을 받아 오고 갔을 뿐입니다.
・고부의 서한경(徐漢京) 나이 40세
저는 태인에 살고 있습니다. 병 때문에 몇 년 동안 고생했는데, 영남에 사는 김운집(金云集)이 의원으로 와서 10여 일 동안 간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효과를 보지 못하다가 김가가 영학의 서적을 가지고 와서, ‘이 책을 열심히 읽으면 반드시 병이 나을 것이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받아 두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음력 4월 21일에 난당(亂黨) 최익서가 시켜 이름은 모르는 공가(孔哥)와 이군삼(李君三)이 총과 창을 들고 와서, ‘잡으러 왔다’고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부득이 난산시장으로 따라갔습니다. 최익서가 저를 붙잡고, ‘너를 응당 포군(砲軍)으로 쓰겠다’고 말하면서 의관을 찢은 후 조총 한 자루를 주었습니다. 저는 병 때문에 움직일 수 없어 며칠 동안 머물러 있었는데, 고창 수성군에게 패배한 난류(亂類) 몇십 명이 돌아왔습니다. 때문에 저도 역시 놀라고 겁을 먹어 따라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디로 갈지 모르고 고부 삼거리 주점에서 유숙하려는 때에 고부군 장교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제가 지은 죄는 다만 이뿐입니다.
・정읍의 박창규(朴昌奎) 나이 49세
저는 순창(淳昌)에 살고 있었습니다. 지난 신묘년(1891, 고종28)에 동학에 가입했습니다. 하는 일은 상업인데 불행하게 낭패를 보아 지금은 구걸하며 겨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지난달에 담양(潭陽)에서 구걸하고 있을 때, 수성군을 모집하며 인심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남아서 구걸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부 등으로 가려고 정읍을 지나는 길에, 행상 무리가 저를 잡아다가 제가 가지고 있던 보따리에 있던 목사(木絲) 등의 물건을 빼앗으며, “이놈은 화적(火賊)이다.”라고 하며 무수히 핍박하는 와중에, 마침 정읍의 장교가 도착하여 바로 잡혀 온 것입니다. 제가 비록 과거에 동학에 가입했지만 애초에 작폐한 일 등은 없습니다.
・정읍의 백화신(白化信) 나이 59세
제가 사는 곳은 원래 산골짜기라 동학 난리 이후에 패악한 무리들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난달 19일 밤중에 난당 수백 명이 이 마을에 들어와 사방에 불을 지르고 그 무리를 따라오라고 협박했습니다. 이른바 마을의 연소한 자들은 대부분 도망갔고, 저와 연로한 사람 몇 명은 모두 두드려 맞으며 협박을 당했습니다. 이 때문에 부득이하게 흥덕읍으로 따라갔습니다. 틈을 보아 도망쳤는데 지금 출진(出陣)한 병사들이 난류(亂類)를 체포할 때에 잡히게 되었고 잘못을 저지른 일은 없습니다.
・정읍의 백낙호(白洛浩) 나이 22세
저는 태인에서 고용되어 지내다가 병을 얻어 집으로 돌아와 조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흥덕의 군기(軍器)를 탈취한 비류들이 마을로 난입해서 그 무리에 가입하지 않는 사람의 집을 불태우기도 하고 혹은 위협하며 구타하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저는 어쩔 수 없이 지팡이를 짚고 억지로 나왔습니다. 마을 경계 너머의 주점에 도착했을 때, 김사오(金士五)라고 하는 자가 제 병세를 보고 집으로 돌아갈 것을 허락했습니다. 이에 즉시 마을로 돌아왔는데, 출동한 병정과 장교가 마을에 도착해 비류들을 체포할 때 저 또한 섞여 있다가 잡혔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잘못을 저지른 일은 없습니다.
・정읍의 최용준(崔龍俊) 나이 36세
저는 형제가 같이 살며 농사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고부의 군기를 탈취한 난류들이 마을로 들어와 얼마 안 되는 마을 사람들을 보는 족족 잡아들일 때에, 저의 형제도 또한 잡혔습니다. 행렬이 이웃 마을의 왕심리에 이르렀을 때 저는 즉시 도망와서 집에 있었습니다. 형은 도망가지 못하고 고창까지 따라갔다고 하는데, 나중에 들으니 저의 형은 그 군의 수성군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저는 출동한 병정들에게 체포되었지만 잘못을 저지른 일은 없습니다.
・정읍의 박봉원(朴奉元) 나이 45세
저의 다른 이름은 정순(定順)인데, 곤궁하게 농사지으며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생각지 못하게 지난달 언제인지 밤중에 누군지 모르는 무리 수십 명이 횃불을 들고 저의 집으로 난입해 들어와 끌어냈습니다. 때문에 그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왕심리로 따라갔다가 몰래 도망왔습니다.
・정읍의 임중오(任中五) 나이 46세
저는 홀아비로 어린 자식을 데리고 곤궁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 못하게 지난달 언제인지 밤중에 누군지 알 수 없는 무리들이 저의 집으로 난입해 들어와 짚신 몇 짝을 요구했습니다. 없다고 대답하니까 그놈들이 환도(環刀)로 코를 때려 피를 흘리며 기절했습니다. 그놈들이 다음에 머무를 곳[前站]으로 데리고 가려고 했는데, 협박을 견디지 못하고 따라갔다가 본군의 율현점(栗峴店)에 도착했을 때 몰래 도망왔습니다. 당시 저와 같이 협박을 받아 따라갔던 사람들은 백낙호・박정순・최용준 및 저 4명입니다.
・정읍의 안기성(安基成) 나이 24세
비도들이 저의 마을로 왔었습니다. 저는 마침 논에 물을 대고 모를 옮겨 심은 후 돌아왔는데, 그놈들이 갑자기 저의 등 뒤에 부서 이름을 붙여 ‘포군(砲軍)에 편입시키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상황을 당하여 거스를 수 없어서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라고 답을 한 후에, 그놈들이 점심을 먹을 때 잠시 시키는 일을 하다가 몰래 틈을 봐서 도망쳤습니다.
・고부의 김치도(金致道) 나이 50세
저는 농민으로 짚신을 만들어 팔며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애초에 난류(亂類)를 따라다닌 일이 없는데, 이렇게 잘못 잡혔으니 너무 원통합니다.
・고부의 조자윤(趙子允) 나이 49세
저는 농사를 업으로 삼고 있었으며, 이번 난류들이 문제를 일으켰을 때 조금도 잘못을 저지른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뜻밖에도 본읍(本邑)의 장교가 저를 체포하여 관청[府庭]으로 끌려오게 되었으니 너무 억울합니다.
・고부의 정인철(鄭仁哲) 나이 42세
저는 농사를 업으로 삼고 있으며, 애시당초 영학을 알지 못하였고 또한 이번 난류들을 따라간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생각지 못하게 체포되어 끌려왔으니 어찌 이렇게 억울한 일이 있겠습니까! 잘못을 저지른 일이 없습니다.
・고부의 김도삼(金道三) 나이 46세
저는 애시당초 영학의 무리가 아니며 또한 난당(亂黨)을 따라다닌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너무 뜻밖에도 본군 장교에게 체포되었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잘못을 저지른 일은 없습니다.
・고부의 김관풍(金寬豊) 나이 31세
저는 보습 날[耜刃]을 팔아 살고 있습니다. 때문에 보습 날을 지고 본읍 거용리(巨用里)의 주점에 이르렀는데, 뜻밖에도 본읍의 장교가 다가와서, “주진소(駐陣所)에서 체포하러 왔다.”라며 저를 체포했습니다. 주진소에서 낱낱이 조사할 때 또한 이미 명백히 아뢰었고, 팔려고 했던 보습 날 등의 물건은 그때 주점에 남겨 두었으니, 이 물건을 가져다 확인해 보시면 자연히 밝혀질 것입니다. 그리고 잘못을 저지른 일은 없습니다.
・고부의 김화삼(金化三) 나이 40세
저는 농사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사람됨은 비록 우매하지만 조심해야 하는 일은 조금 압니다. 이 때문에 전에 동학이 소요를 일으켰을 때에도 애초에 물들지 않았고, 지금 난류 무리들이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을 듣고서 통탄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본군의 순교가 저의 집으로 찾아와 저를 주진소로 잡아넣고 난류라고 지목하니, 당한 바를 스스로 돌아보면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따로 조사를 해 보셔서 만일 비류를 따라다닌 흔적이 있다면 만번 죽어도 한을 품지 않겠습니다.
・정읍의 허응호(許應浩) 나이 42세
저는 빈궁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제 성명이 어찌하여 고창 수성군의 기록에 들어가 있었던지 본군의 장교가 저를 잡아들였습니다. 저의 애매함은 본군에서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정읍의 최정학(崔正學) 나이 57세
저는 가세가 빈곤하여 집이 없어서 본군 광조동(光照洞)에 사는 유씨(柳氏)의 재실(齋室)을 빌려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봇짐장수[袱商]들이 어떤 물건을 화적에게 빼앗겼던지, 칭하여 말하기를 ‘화적들이 그 도적질한 물건을 내가 사는 재실에서 나누어 가졌다’고 하며 봇짐장수들이 저를 잡아갈 때에, 마침 출동한 정읍의 순교를 만나 주진소로 잡혀온 것입니다. 저는 조금도 잘못을 저지른 일이 없이 지금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실로 억울하고 답답합니다.
・정읍의 이용태(李龍泰) 나이 61세
제가 살고 있는 마을 근처인 마석리(馬石里)에 영학 무리 류성필(柳成必)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3월 그믐 무렵에 그 무리가 류성필의 집에 모여 하룻밤을 유숙하고 떠나갔습니다. 수일 후에 그들이 저의 집으로 찾아와 따라오라고 협박하였기 때문에 저는, ‘내가 지금 나이가 60이 넘었고 또 병을 앓고 있어 근력이 안 될 뿐만 아니라 갑오년(1894) 소요 시에도 애초에 이에 동조하지 않았었는데 하물며 지금에서 따르겠는가’라고 했습니다. 저들이 창으로 저를 찔러 두 곳에 상처를 입었고,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서 마음을 바꾸어 따라가니 저들이 이러한 상황을 보고 이내 풀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며칠 뒤, 저들이 고부의 군기를 탈취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는 저들에게 찔린 상처가 아직 몸에 남아 있으니 확인해 보시면 분명할 것입니다.
・정읍의 정막동(鄭莫同) 나이 23세
저는 담양에 살면서 농사짓고 있습니다. 음력 4월 21일에 남평(南平)에 사는 무명(白木) 상인의 짐꾼[負持]으로 흥덕 후포(後浦)에 도착했습니다. 그 다음 날 22일에 난류 60~70명이 무리를 모았는데, 저를 군물(軍物) 짐꾼으로 쓰고자 저들이 잡아갔습니다. 군물 및 화약 궤짝을 지고 고부 난산장터로 따라갔다가 틈을 보아 도망치는 사이에 다시 붙잡혀 몽둥이에 맞아 중상을 입었습니다. 저는 반드시 도망가야 생명을 보존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여러 가지로 틈을 보아 요행히 정읍 읍저(邑底)로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정읍의 순교가 난류라고 부르며 그대로 체포했습니다. 그러나 실로 죄를 저지른 일은 없습니다.
・고부의 양희조(梁希祚) 나이 40세
저는 농사지으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번 달 초1일에 풀을 자르러 외출했다가 저녁이 되어 땔나무를 지고 집에 왔는데, 본군의 장교가 찾아와 ‘출진소(出陣所)에서 잡으러 왔다’고 하며 밀지(密紙)를 꺼내서 보여 주었는데, 그 밀지를 보니 고부 양수동(兩水洞)에 사는 양희조가 만든 지령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성명은 양희도(梁希道)이며 사는 곳은 검곡(撿谷)이며 검곡에서 고부 양수동까지 거리가 60리라고 여러 차례 밝혔지만, 해당 순교가 듣지 않고 주진소(駐陣所)로 잡아넣었습니다. 주진소에서 조사할 때에 무수히 악형을 받았지만 저는 실로 저지른 잘못이 없기 때문에 명백히 밝히고 아룁니다.
・고부의 김낙여(金洛汝) 나이 58세
저는 집도 절도 없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품팔이[雇傭]를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최근에 몸에 병이 들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는데, 비류의 협박을 받아 강제로 따라가다가 중간에 도망쳐서 돌아왔습니다. 그 후 병이 더욱 심해져 집에 있다가 순교에게 체포되어 본군에 수감된 후 끌려오게 되었으니 억울하고 답답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정읍의 최방서(崔方西) 나이 54세
저는 을미년(1895, 고종32) 이후 사지(四肢)에 장애가 와 지금까지 누워 있었는데, 갑자기 주진소로 체포되어 왔으니, 무슨 일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고부의 최동순(崔東巡) 나이 32세
본군에서 저의 형 방서를 순교를 보내어 체포하였는데, 저의 형은 사지에 장애가 생겨 조금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제가 형을 업고 와서 체포되어 같이 수감되었습니다. 최영두는 저의 삼촌입니다. 최익서는 저의 사촌입니다. 삼촌 영두가 함께 가자는 뜻으로 비록 수차례 이야기했지만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숙질 간에 사는 곳이 제법 멀기 때문에 왕래 역시 소원해서, 지금 제가 삼・사촌이 요사이 한 일을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사촌 중 한 명은 익서이며, 한 명은 익수이고, 한 명은 어린 판금(判金)이며, 한 명은 화심(和心)인데, 화심은 갑오년(1894)에 동학에 가담했기 때문에 전주(全州)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정읍 차봉순(車奉淳) 나이 16세
저는 어릴 때 부모를 잃고 정읍군 대양리(大陽里) 차락서(車樂西)의 집에 고용되어 살았습니다. 날짜는 기억 못하겠지만 음력 4월 사이에 풀을 자르고 돌아오는 길에 들으니, ‘고부에서 소요를 일으킨 난당(亂黨)들이 저의 형 관순의 집에 들이닥쳐 함께 데리고 갈 때에 협박하며 구타했는데, 흥덕의 시목정(柿木亭)에 이르러 집으로 (형이) 도망쳐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난류(亂類)들이 다시 찾아오자 형이 놀라며 겁먹고 도망가서 간 곳을 모르는데 비류들이 (형을) 잡아가려 할 때, 정읍의 장교들이 형의 집으로 찾아와 형이 집에 없자 제가 대신 체포되었습니다.
・정읍 박성일(朴性一) 나이 30세
저는 장성에 살면서 땔감을 팔아 생활하고 있습니다. 저의 형이 비류들의 위협 때문에 저들 무리와 같이 움직였다가 몸을 피한 후에 아직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조금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지만 저의 형의 죄 때문에 대신 체포되었습니다.
・정읍 임성진(林成辰) 나이 35세
저는 삼 형제로 둘째 형 순표(巡杓)는 저들 무리에게 협박을 받아 어쩔 수 없이 따라다니다가 중간에 도망쳐 돌아왔습니다. 이후 저들이 패배를 당했다고 들었는데, 형은 겁이 나 도망쳤습니다. 저는 형의 죄 때문에 대신 체포되었습니다만 진실로 잘못을 저지른 일은 없습니다.
・정읍 차병옥(車炳玉) 나이 27세영학 무리가 고부의 군기를 탈취해서 오는 길에, 제가 사는 마을로 들어와 저의 육촌 관순(寬淳)을 위협하여 함께 데리고 갔습니다. 관순이 흥덕 시목정(柿木亭)에 도착하였을 때 몰래 도망와서 말하길, ‘내가 만일 집에 있으면 저들이 다시 해를 끼칠 것이다’ 하고 그대로 몸을 피했습니다. 그래서 저와 육촌 봉순(奉淳)은 관순의 일 때문에 지금 체포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