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광주(光州) 지방대(地方隊) 대대장 서리 중대장 김윤창(金潤昌)의 조회를 받아 보니,
“비류 죄인 오재봉(吳在奉)・양선태(梁先太)・김장일(金長一)・송왈갑(宋曰甲)・유도연(兪道淵) 다섯 놈이 본대에 잡혀와 수감된 사유를 군부(軍部)에 보고하였습니다. 이후 군부의 지령에서, ‘잡아들인 비류 다섯 놈을 본도 재판소로 이송하여 죄를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동 죄인 5명을 이송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죄인 오재봉・양선태・김장일・송왈갑・유도연 5명을 본소에서 여러 차례 신문(訊問)을 가하여 이놈들이 저지른 정황에 대해 진술을 받아 문안으로 만들어 올려보내어 보고합니다. 그리고 다섯 놈 중에서 송왈갑・유도연은 비류는 아니지만, 단지 도망간 비도 박도서(朴道西)를 체포하는 일로 박도서의 종적을 탐색하기 위해서 비록 체포한 것입니다. 달리 조금도 잡아 둘 만한 단서가 없기 때문에 그 도망간 종적을 별도로 탐색할 생각으로 주의를 주고 풀어 주었습니다. 오재봉・양선태・김장일 중 한 명은 두목이고 두 명은 위협을 받아 따라다닌 것이지만, 그들 무리는 모두 갑오년(1894)에 빠져나간 무리로 아직까지 숨을 쉬고 있는 것은 조정에서 생명을 살려 준 은택인 것이 명확합니다. 그러면 마땅히 그 마음을 고쳐먹었어야 하는데, 무슨 마음인지 환란을 즐겁게 여기고 기회를 타서 무리를 몰아 각 군에 난입하여 군기(軍器)를 탈취했습니다. 그리고 성읍을 함락시키려고 고창의 수성군과 싸우다가 형세가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서로 도망갔지만 체포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상의 정황을 모두 인정했습니다. 따라서 이 같은 난류는 징벌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에 사실에 근거하여 보고하오니, 살펴서 법에 따라 처치하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광무 3년(1899) 9월 9일
전라남도재판소 판사 민영철
의정부찬정 법부대신 각하
조사컨대 오재봉・양선태・김장일은 모두 법망을 빠져나간 비도로, 여전히 옛날 습관을 가지고 각 군을 유린하여 군기를 탈취했으며 관군과 대적했으니, 그 행위를 보면 지극히 통탄스럽다. 해당 범인 등을 모두 『대전회통(大典會通)』 추단조(推斷條) 「군복(軍服)을 착용하고 말을 타고 관문(官門)에서 변란을 일으킨 자에 관계된 법률[軍服騎馬作變官門者律]」을 적용할 뜻으로 본□에 상주하였더니 ‘□□奉□□□’ 하라 하셨다. 도착하면 즉시 해당 범인 오재봉・양선태・김장일을 모두 교수형에 처한 후 상황을 보고할 것.
광무 3년(1899) 9월 일 지방대에서 압송해 온 비류 죄인의 공안
・오재봉(吳在奉) 나이 31세
저는 흥덕군(興德郡) 일서면(一西面) 백선동(白仙洞)에 살고 있습니다. 지난 갑오년(1894) 동비에 참가했다가, 다행히 크게 사면하라는 조정의 명령을 입어 겨우 목숨을 보존했습니다. 음력 4월 초6일에 본군 삼태리(三太里)에 사는 이강성(李江成)이 저를 꾀어 함께 태인군 화호(禾湖)에 사는 김여성(金汝成)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그 무리에 가입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때문에 여러 차례 따라다니다가 같은 달 16일에 고부군이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김여성의 집으로 가서 며칠 동안 유숙했습니다. 그 후 그 무리를 따라다니며 철창(鐵鎗)을 잡고 19일에 흥덕군을 공격하여 군기(軍器)를 탈취했습니다. 20일에는 고부군 난산시장으로 가서 머물렀습니다. 21일 무장군으로 곧장 향하여 군기를 탈취했습니다. 22일에는 고창군 수정(藪亭)으로 가서 고창군의 수성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형세가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도망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순검 병정들에게 체포되어 고창군에 수감되었다가 지금 압송되었으니 법에 따라 처리하십시오.
・양선태(梁先太) 나이 24세
저는 고부군 부왕면(富旺面) 우수거리(牛首巨里)에 살고 있습니다. 지난 갑오년(1894)에 동도에 참가했다가, 다행히 크게 사면하라는 조정의 명령을 입고 겨우 남은 목숨을 건졌습니다. 음력 4월경에 다시 비류에 가입하여 접주인 동리의 현재서(玄在西)를 따라 죽창을 잡고, 이번 4월 15일에 고부군을 공격해서 군기를 탈취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정읍군 구암리(九巖里)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같은 달 19일에 흥덕군을 공격하여 군기를 탈취했습니다. 22일에 진죽거리(鎭竹巨里)에 이르러 오후에 바로 고창군으로 향했습니다. 황혼 무렵에 수성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형세가 감당할 수 없어 서로 도망갈 때에 순검 및 순교 등에게 잡혀서 지금 압송된 것이니 법대로 처분하십시오.
・김장일(金長一) 나이 46세
저는 고부군 난산시장에 살면서 술과 음식을 팔아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음력 4월 20일 밤에 비류들 백여 명이 무리 지어 와 가지고는 술과 음식 및 짚신[草鞋] 등의 물건을 토색질했습니다. 그리고 평민들을 위협하여 그 무리로 몰아넣었습니다. 저 역시 협박을 이기지 못하고 죽창을 들고 그 무리를 따라다녔습니다. 21일에 무장군(茂長郡)을 공격하여 군기를 탈취하고 해당 군에 머물렀습니다. 22일에 고창군으로 서둘러 가서 고창군의 수성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형세가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서로 도망가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결국 순교 등에게 잡혀 압송되어 왔으니 법대로 처분하십시오.
・유도연(兪道淵) 나이 34세
저는 흥덕군 이서면(二西面) 중등(中嶝)에 사는 사람으로 농사를 업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저의 의형(義兄) 박도서(朴道西)가 비류에 참여하여 무리를 모아 고부・흥덕・무장・고창 등지에서 난을 일으킨 후 의형 박도서는 그대로 도망갔습니다. 난류(亂類)들을 체포하는 순검과 순교들이 찾아와 저의 의형 박도서의 거취를 물어보았는데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순검 및 순교 등이 ‘네 의형의 거취를 어찌 모를 리가 있겠느냐!’라며 저를 체포하여 데리고 와 이번에 압송되었으니, 명확히 조사한 후 처리하여 잘못된 화를 면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송왈갑(宋曰甲) 나이 21세
저는 흥덕군 이서면 중등에 살고 있었습니다. 음력 4월 28일에 순검 및 순교들이 난류 박도서를 추적하다가 잡지 못하고 박도서의 의제(義弟) 유도연을 체포했습니다. 유도연은 바로 저의 매부라 정리가 있기 때문에 죄 없이 체포되는 상황을 차마 보지 못하고, 그 사실을 순검 및 순교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너의 매부 유도연은 박도서의 의제이니 그 의형의 거처를 모른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따라서 지금 잡아가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때문에 제가 매부 유도연과 힘을 합쳐 박도서를 추적하다가 끝내 잡지 못하고, 이번에 압송되어 온 것이니, 명확히 조사한 후 처결해 주셔서 잘못된 화를 면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