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소 검사의 공소에 의하여 피고 최시형(崔時亨)과 피고 황만기(黃萬己)와 피고 박윤대(朴允大)와 피고 송일회(宋一會)의 안건을 심리하였습니다. 피고 최시형은 병인년(1866, 고종3)에 간성(杆城)에 거주하는 필묵상(筆墨商) 박춘서(朴春瑞)라는 자에게 이른바 동학(東學)을 전수하고, 도를 잘 닦으면 병을 낫게 하며 주문으로 신을 내린다고 칭하고, 열군 각 도에 주류편행(周遊遍行)하여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라는 13자 주문과, “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이란 8자 강신문(降神文)과, 동학(東學) 원문 제1편 포덕문(布德文)과 제2편 동학론(東學論)과 제3편 수덕문(修德文)과 제4편 기연불연문(其然不然文)과 궁궁을을(弓弓乙乙)의 부적으로, 인민을 선동 미혹하여 도당(徒黨)을 모으며, 또 처형당한 최제우(崔濟愚)의 “만년지상화천타(萬年枝上花千朶) 사해운중월일감(四海雲中月一鑑)”이라는 시구를 항상 흠모하며, 법형법제(法兄法弟)의 칭호로서 존숭함으로 인하여 법헌(法軒)의 호를 칭하고, 해월(海月)의 도장을 새겨 교장(敎長)과 교수(敎授)와 집강(執綱)과 도집(都執)과 대정(大正), 중정(中正) 등의 두목을 각지에 임명하고, 또 포(包)와 장(帳)이라는 회소(會所)를 만들어 무리를 모음이 천만으로 헤아려지는지라. 처형당한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어 준다 칭하고, 지난 계사년(1893)에 그 무리 수천 인을 수궐(守闕)하여 소를 올리다가 곧바로 해산하였습니다. 또 보은(報恩) 장내(帳內)에 다수의 군중을 모았던 때에 순무사(巡撫使)의 타이름으로 인하여 각자 흩어지더니, 갑오년(1894) 봄에 이르러 피고의 도당 전봉준(全琫準)이 고부 지방에 무리를 끌어 모아 기회를 타고 봉기하여, 관리를 때려죽이며 성진(城鎭)을 함락하여 양호(兩湖) 지방이 문드러져 파탄이 날 지경에 이르렀으니, 피고가 이를 시키고 화응(和應)한 일은 없다고 하나 난의 전개와 일의 뿌리를 따지면 피고가 주문과 부적으로 인민을 미혹함에 의한 것입니다.
피고 황만기는 지난 갑오년 5월에 동학도 임학선(林學善)의 협박을 받아 입도하였다가 곧 귀화하였으나 작년 7월에 또 임학선의 말을 듣고 경상도 지방에 ‘대종 선생(大宗先生)을 의리상 뵙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여 도망한 최시형을 찾아보고 생선을 바쳤습니다.
피고 송일회는 갑오년 4월에 동학에 들어가 최시형이 청산(靑山) 지방에 있을 때 처음 방문한 후, 올해 정월에 이르러 친하게 지내던 동학도 박윤대(朴允大)에게서 최시형이 이천(利川) 지방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옥천(沃川) 사람 박가(朴哥)에게 말하였다가 경무청 관인에게 체포되어, 박윤대와 함께 앞을 인도하여 원주 지방으로 나아가 최시형을 체포하였습니다.
피고 박윤대는 동학에 투신하여 최시형의 사위 김치구(金致九) 집에 고용되었다가 경무청 관인에게 체포되어, 송일회와 같이 앞을 인도하여 원주 땅에서 최시형을 잡은 후, 이로써 풀려나 돌아가는 도중에 친하게 지내던 동학도 박치경(朴致景)을 만나, 그의 부탁을 받고 엽전 20냥을 지니고 서울에 홀로 와서 최시형의 식비를 도울 일로 경무청에 왔다가 체포되었습니다.
이상의 사실은 피고들의 진술 및 자복에 근거한 것이니 확실합니다. 이를 법에 비추어 피고 최시형(崔時亨)은 대명률(大明律) 제사편(祭祀編)의
“금지사무사술조(禁止師巫邪術條)의 일응좌도난정지술혹은장도상소향집중야취효산양수선사선혹인민위수자율(一應左道亂正之術或隱藏圖像燒香集衆夜聚曉散佯修善事扇惑人民爲首者律)”로 교(絞)에 처하옵고, 피고 황만기(黃萬己)와 피고 박윤대(朴允大)와 피고 송일회(宋一會)는 동편(同編) 동조(同條) 위종자율(爲從者律)로 각각 태 100대와 종신징역에 처할 만하오나, 피고 송일회와 박윤대는 최시형 체포 때 공로가 없지 않은즉 감등(減等)하기에 합당하므로, 이에 질품(質稟)하오며 일체 서류를 딸려 올리오니 헤아려 살펴서 지령하시기를 바랍니다.
광무 2년(1898) 7월 19일
고등재판소 판사 주석면
의정부찬정 법부대신 조병직 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