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도가 밝아 일이관지하는데 | 魯道昭然一貫萬 |
어이하여 기로에서 동서로 달리 가는가 | 如何岐路異東西 |
주인옹 깨어 영대 위에 앉아 있으니 | 主翁惺坐靈臺上 |
건복 차림으로 소요하며 헤매지 않는구나 | 巾服逍遙不向迷 |
-갑오년(1894, 고종31) 3월 27일 동학도가 고부에 숨었다가 정읍과 장성으로 향하자 순찰사 김문현(金文鉉)이 병사를 보내 공격하였다. 그리고 본읍(本邑: 여산(礪山))의 부사 유제관(柳濟寬)이 병사를 거느리고 삼례역을 지켰다. 4월 초 3일에 돌아와 본읍의 탄현(炭峴: 숯고개)에 주둔하니, 인심이 동요하였다. 주사(主事) 오해정(吳海定) 용묵(容默)과 서로 주고받으며 시 두 수를 지었다.-
고인의 묘한 계책 비단에 수놓은 무늬 같으니 | 高人籌竗錦添紋 |
군문에 대하여 마음 씀이 근실하였네 | 却向牙門致意勤 |
어리석은 오합지졸 형세가 흩어진 안개 같고 | 頑類合烏形散霧 |
장군이 말 멈춘 곳에 그 진용이 구름과 같네 | 將軍停馬陣如雲 |
한 달에 세 번 승첩 소식 전해지고 | 月三消息書期捷 |
70일간 온화한 춤에 분란이 해소되리 | 旬七雍容舞解紛 |
한 줄기 동풍에 꽃들이 지고 난 뒤 | 一片東飛花已暮 |
녹음 진 이 방초 시절 즐겁게 술잔을 드세 | 綠陰芳草擧杯欣 |
-4월이 되자 저들의 세력이 점차 왕성해져서 고부(古阜) 백산(白山)의 전투에서 우리 관군이 패퇴하여 200여 명이 죽고 다치니, 순찰사(巡察使)에게 삭탈의 형전(刑典)이 시행되었다. 장성(長城) 황룡(黃龍)의 전투에서 경군(京軍)이 또 패전하자 드디어 저 무리들이 관군의 후미를 둘러 포위하다가 27일에 전주성을 습격하여 점거하였다. 초토사 홍재희(洪在羲)는 급히 전주 남쪽 용수현(龍首峴)으로 가서 다시 진을 치고 서로 며칠을 대치하였다. 새 감사 김학진(金鶴鎭)이 군영에 도착하지 못하고 여산(礪山)에 체류하였고, 순변사(巡邊使) 이원회(李元會)의 병력 역시 도착하였다. 5월 4일에 초토영에서 성안에 불을 놓았는데, 남녀노소가 성을 빠져나올 길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 분통을 이기지 못하여 장군봉(將軍峰)에 올라 전주성에서 불길이 하늘에 치솟는 것을 바라보며 한탄하며 짓는다.-
푸른 구름 사이 장군봉 우뚝한데 | 將軍儼立碧雲邊 |
의기로운 서생 가장 먼저 올랐네 | 義氣書生上最先 |
생령들 불타는 것 차마 보고서 | 忍看物靈爲赤焰 |
그 추악한 작태 함께 하늘 못 이겠네 | 不容醜孽戴蒼天 |
반석처럼 굳건했던 삼천리 금수강산 | 封疆磐固三千里 |
별처럼 중했던 오백 년 상서로운 운수 | 瑞運星重五百年 |
소백이 순행하고 남중이 또 왔으니 | 召伯來循南仲又 |
안위가 달린 이 거사 현인만을 임명해야 하리 | 安危此擧任惟贒 |
주석
공자의 도
원문은 ‘노도(魯道)’인데, 공자의 고향이 노(魯)나라이기 때문에 ‘노도’라고 하였다.
일이관지
하나의 이치가 모든 일을 꿰뚫고 있다는 말로, 공자가 증자에게 이르기를 “우리의 도는 하나의 이치가 모든 일을 꿰뚫고 있다.[吾道一以貫之]”라고 말하자, 증자가 망설임 없이 대답하여 “예.[唯]”라고 말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里仁』
김문현(金文鉉)
1858~?. 1878년(고종15)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형조 판서· 예조 판서 등을 지냈다. 1893년 동학교도의 보은집회(報恩集會)가 있자 광주부 유수(廣州府留守)에서 전라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다. 1894년 2월 고부민란(古阜民亂)이 일어나자 군수 조병갑(趙秉甲)을 체포하는 한편, 고부에 관리를 보내 사건의 주동자인 전봉준(全琫準)을 회유 내지 붙잡도록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여 부안군(扶安郡)의 관아를 습격하는 등 민란의 규모가 확대되자, 감영 군사를 보내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게 하였다. 그러나 황토현(黃土峴)전투에서 패함으로써 문책, 파면되고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유제관(柳濟寬)
?~?. 구례 사람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서울에서 주로 거주하였으며 1894년에 여산 부사(礪山府使), 1897년 무렵 중추원 의관을 지냈다.
꾀꼬리 유곡을 찾으며 우는 것은 무슨 뜻인가
『시경』 「벌목(伐木)」의 “도끼 소리 쿵쿵, 새소리 꾀꼴꾀꼴. 깊은 골짜기에서 나와, 높은 나무로 옮겨 가네.[伐木丁丁, 鳥鳴嚶嚶. 出自幽谷, 遷于喬木.]”라고 한 것을 인용한 것으로, 여기에서는 교목으로 가야 하는데 유곡을 찾아간다는 뜻으로 쓰였다. 동학 백성들이 난리를 일으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새매 높은 곳에 있으니 쏘아 맞춤에 뜻이 있도다
『주역』 「해괘(解卦) 상육(上六)」에 “공이 높은 담장 위의 새매를 쏘아 잡으니, 이롭지 않음이 없다.[公用射隼于高墉之上, 獲之, 无不利.]”라고 하였다. 패역스러운 소인(小人)들을 제거하여 천하를 평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채미」
『시경』의 「채미」 편을 말한다. 이 시는 오랫동안 수자리 살다가 고향에 돌아오는 병사의 심경을 읊고 있는데, 그 가운데 “옛날에 내가 갈 때는, 푸른 버들가지가 휘휘 늘어졌는데, 지금 내가 돌아올 때는 함박눈이 펄펄 내리네.[昔我往矣, 楊柳依依. 今我來思, 雨雪霏霏.]”라고 하였다.
적개
신하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는 적을 가서 친다는 말이다. 『춘추좌씨전』 문공(文公) 4년 기사에 “제후가 왕의 성낸 바를 대적하여 그 공로를 바친다.[諸侯敵王所愾, 而獻其功.]”라고 하였다.
한 달에 세 번 승첩 소식 전해지고
주 선왕(周宣王)이 오랑캐를 평정한 공로를 노래한 『시경』 「소아(小雅) 채미(采薇)」에 “병거에 올라 보니, 네 필 수말 기운차구나. 어찌 감히 가만히 있으리오. 한 달에 세 번 승리하리라.[戎車旣駕, 四牡業業. 豈敢定居, 一月三捷.]”라고 하였다.
70일간 온화한 춤에 분란이 해소되리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 “순(舜) 임금이 문덕(文德)을 크게 베풀어 양쪽 계단에서 방패와 깃털을 들고 춤추었는데, 70일이 되자 유묘(有苗)가 항복하였다.”라고 하였다.
고부(古阜) 백산(白山)
지금의 전북 부안군 백산면에 있는 산이다. 동학농민혁명 1차 기병 때 호남창의소가 설치되었던 곳으로, 1894년(고종31) 5월에 이곳에서 관군을 격퇴하였다.
장성(長城) 황룡(黃龍)
지금의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이다. 1894년 4월 23일에 이곳에서 농민군이 이학승(李學承)의 선봉대와 싸워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는 이후 농민군이 전주(全州)에 무혈입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홍재희(洪在羲)
원문은 ‘홍재희(洪在禧)’인데, 『고종실록』 등에 의거하여 ‘禧’를 ‘羲’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홍재희는 홍계훈(洪啓薰, ?~1895)의 초명이다.
용수현(龍首峴)
용두현(龍頭峴)으로, 곧 용머리고개이다. 며칠 대치했다는 기록은 오류이다. 동학농민군은 삼천에서 바로 용머리고개를 넘어 전주성 서문으로 입성하였다.
김학진(金鶴鎭)
1838~1917. 1871년(고종8)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참판·도승지· 형조·공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전라 감사 김문현(金文鉉)의 후임으로 감사에 임명되었다.
이원회(李元會)
1827~?. 1851년(철종2) 무과에 급제하여 충청도 병마절도사·삼도수군통제사 등을 역임하였다. 1894년(고종31)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양호 순변사(兩湖巡邊使)가 되어 친군(親軍)의 장위(壯衛)·통위(統衛) 두 영병을 인솔해 양호 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과 협력해 전주전투에 참여하였다.
장군봉(將軍峰)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서서학동에 있는 완산칠봉(完山七峯) 중의 하나이다.
소백
주(周)나라의 공후(公侯)이며 문왕(文王)의 서자(庶子)이다. 무왕(武王)을 도와 주(紂)를 멸하고 북연(北燕)에 봉해졌다.
남중
주(周)나라 선왕(宣王) 때의 장군으로 선왕의 명을 받아 험윤(玁狁)을 정벌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詩經出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