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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공자가 말하기를 “우리의 도(道)는 하나의 이치가 모든 일을 꿰뚫고 있다.[吾道一以貫之]”라고 하였고, 또 ‘도는 둘이기도 하고 셋이기도 하고 넷이기도 하다’라는 가르침이 있다. ‘일(一)’이라는 것은 하나의 이치이고 ‘관(貫)’이라는 것은 관통하는 것이니, 나에게 있는 하나의 마음의 이치로 만사의 이치를 관통한다면 하나인 체(體)에서 용(用)은 각각 같지 않다. 그러므로 인(仁)과 불인(不仁)을 가지고 말하면 도는 두 가지가 있고, 지(知)와 인(仁)과 용(勇)을 가지고 말하면 도는 세 가지가 있고, 부모를 섬기고 군주를 섬기고 형을 섬기고 벗에게 베푸는 것을 가지고 말하면 도는 네 가지가 있다. 그러나 일본만수(一本萬殊)의 측면에서 말하면 어찌 도가 두 개, 세 개, 네 개일 뿐이겠는가. 오륜(五倫)과 육언(六言)칠정(七政)팔조(八條)구경(九經)의 용이 모두 이 도가 관통하는 것이고, 만수일본(萬殊一本)의 측면에서 말하면 백려(百慮)와 백사(百事)와 만사(萬事)와 만물(萬物)이 모두 이 도의 하나의 이치에서 나오는 것이다. 길에 비유하자면, 임금이 황극(皇極)의 자리에 앉아서 구주(九疇)의 문을 활짝 열면 육극(六極)과 팔황(八荒)과 사해(四海)와 구주(九州)의 길이 차례로 탁 트이니, 이는 일본(一本)이 만수(萬殊)인 것이고, 육극과 팔황과 사해와 구주의 길이 모두 황극의 자리로 모이니, 이는 만수가 일본인 것이다.

이 때문에 구주의 황극은 바로 『대학』의 ‘지어지선(止於至善)’으로, 마음이 한번 정해지면 만사와 만물의 이치가 자연히 관통하니, 부자(夫子, 공자)의 ‘일이관지(一以貫之)’의 가르침은, 성인의 도는 하나의 이치가 혼연(渾然)하여 널리 응하고 세세히 들어맞는 부분에서 말한 것이다. 그런데 증자(曾子)가 배우는 자들이 이해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부자의 도는 충서(忠恕)일 뿐이다.”라고 말하였으니, ‘충(忠)’이라는 것은 자기의 마음을 다함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의 이치[一]가 체가 되는 이유이고, ‘서(恕)’라는 것은 자기를 미루어 남에게 미룸을 말하는 것으로, 관통함[貫]이 용이 되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이 도를 배우고자 하면서 자기의 마음을 다하지 않거나 자기를 미루어 남에게 미치지 않는다면 착수할 수가 없고, 학문을 할 적에 반드시 심법(心法)의 교묘한 부분이 있다.

‘학(學)’이라는 것은 깨우침이며 본받음이고, ‘술(術)’이라는 것은 계승함이며 행함이다. 어렸을 때부터 본받고 깨우친다면 절로 심법을 계승하고 행하게 된다. 따라서 이 ‘학’과 ‘술’ 두 글자가 사도(斯道)에서 미루어 쓰는 큰 첫머리인데,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백이(伯夷)와 이윤(伊尹)과 공자는 모두 옛 성인이신데, 내가 행함은 있지 못하지만 원하는 것은 공자를 배우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동중서(董仲舒)가 말하기를 “육예(六藝)의 과목과 공자의 학술이 아닌 여러 것들은 모두 그 도를 끊어 버려서 세상에 함께 나오게 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였으니, 진실되도다, 이 말씀이여!

처음 걸음을 배우는 자들은 먼저 집의 평평하고 정연한 곳에서 배웠다가 점차 큰길의 평탄한 곳으로 나가야 하니, 그러면 학술의 바름을 얻게 되고, 처음 말타기를 배우는 자들은 처음에는 문밖의 바르고 곧은 곳으로 나갔다가 끝에는 도성의 넓고 평평한 곳에 도달해야 하니, 그러면 또한 학술의 바름을 얻게 된다. 활 쏘는 재주를 배우는 자는 몸이 바르고 마음이 곧은 연후에 활시위 당기는 방법을 터득하고 장인의 기술을 배우는 자는 마음이 바르고 시선이 곧은 이후에 연장을 쓰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처럼 작은 재주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성인의 도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과 우(禹) 임금과 문왕(文王)과 주공(周公)과 공자는 이미 생이지지(生而知之)한 성인으로서 하늘의 도를 체득하고 은 탕왕(殷湯王)과 무왕(武王), 성왕(成王), 강왕(康王)은 모두 학이지지(學而知之)한 현인으로서 사람의 도를 체득하니, 이 때문에 제성광연(齊聖廣淵)한 덕이 상제(上帝)에 짝하고 밝은 효성이 조상의 발자취를 이었다. 이때에 천하가 이 마음을 가지게 되어 백성들 모두가 한결같은 덕이라고 말하고 만방이 편안해져서 새로워지려는 백성들을 진작시키니, 위로는 예악(禮樂)과 교화(敎化)의 방도가 있고 아래로는 인의(仁義)와 충신(忠信)의 학문이 있었으며, 상서(庠序)를 설치하여 밝히고 학교를 세워 인도하여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답고 남편은 남편답고 부인은 부인답고 형은 형답고 동생은 동생다웠으니, 천하의 다스림이 성대하고 성인의 능사(能事)가 끝난 것이었다.

그런데 시대가 흘러 춘추(春秋) 시대가 되자 삼왕(三王)과 이미 멀어지고 오패(五覇)가 독단적으로 다스려 인(仁)을 빌렸지만 인이 아니고 의(義)에 기대었지만 의가 아니었는데, 아랫사람들이 거기에 물들어서 스승들은 도를 달리하고 사람들은 의론을 달리하니, 우리 부자가 비로소 ‘이단(異端)을 공부하면 해롭다’는 가르침을 하였다. 이단이라는 것은 하나의 단서 외에 다른 단서가 또 있는 것이다. 실마리가 안에서 처음 보이는 것을 단서라고 하는데, 한번 이 단서를 미루어 나가면 천길 만길도 막힐 것이 없다. 또 하나, 둘, 백, 천의 실마리를 미루어 천하의 대경(大經)을 경륜(經綸)하면 3백 가지의 경례(經禮)와 3천 가지의 곡례(曲禮)가 모두 종합되고 분합(分合)된다. 그러므로 단서가 되는 측은지심(惻隱之心)과 수오지심(羞惡之心)을 미루면 인과 의이고, 단서가 되는 사양지심(辭讓之心)과 시비지심(是非之心)을 확충하면 예(禮)와 지(智)이다. 제왕의 심법의 중요한 단서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고 성현의 도체의 큰 단서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천하 만세에 누가 이 단서가 하나가 아니라고 말하겠는가.

허무(虛無)의 학문으로 말하자면 진실한 도에 끼어서 스스로 학문이라고 하니, 인과 의의 단서를 어지럽혀 경륜에 해가 되고, 적멸의 학문으로 말하자면 성일(誠一)한 도에 섞여 들어가 또한 스스로 학문이라고 하니, 예와 지의 단서를 어지럽혀 종합에 해가 된다. 심지어 묵적(墨翟)의 학문은 인과 유사한데 인이 아니므로 맹자가 아버지도 없다고 배척하였고, 양주(楊朱)의 학문은 의와 유사한데 의가 아니므로 맹자가 군주도 없다고 배척했는데, 그러면서 말하기를 “양주와 묵적의 도가 종식되지 않으면 공자의 도가 드러나지 못할 것이니, 이는 부정한 학설이 백성들을 속여 인의를 꽉 막는 것이다. 그러면 짐승들을 몰아 사람들을 잡아먹게 하다가 사람들이 장차 서로 잡아먹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장수(莊叟)가 나비가 되었던 것열자(列子)가 바람을 탔던 것은 지나치게 허무해서 심술이 바르지 않음을 드러내었다.

신불해(申不害)와 한비자(韓非子)와 순경(荀卿)과 이사(李斯)의 학문은 형명학(刑名學)이라고 일컬어졌는데, 천루하고 꽉 막혀서 끝내 분서갱유(焚書坑儒)의 화에까지 이르렀고, 가의(賈誼)와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의 학문은 유술(儒術)이라고 일컬어졌는데, 견강부회(牽强附會)하고 억지 논변을 하여 대도(大道)의 요점에 어두웠다. 그리하여 위로는 현도(玄道)를 닦는 군주가 있고 아래로는 황로(黃老)를 섬기는 풍도가 생기니, 동중서의 말이 경박한 풍속을 구원할 수 없었고, 유향(劉向)의 논변이 예악의 가르침을 회복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한(漢)나라 명제(明帝)가 불교를 맞이해 온 후로 오랑캐 땅의 중들이 중화(中華)를 어지럽히자 세상에 학술하는 자들이 불교에 들어가지 않으면 노장(老莊)에 들어가서 들어간 곳은 스승으로 삼고 나온 곳은 배척하니, 이 어찌 윗사람이 성인의 학문에 마음을 두지 않고 허탄한 학문을 좋아하여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위(魏)나라의 왕필(王弼)과 하안(何晏), 진(晉)나라의 완방(阮放)과 필탁(畢卓)은 허무의 학문을 종주로 삼아 사람들을 유인하고 동요시켜서 마침내 나라 안이 폐허가 된 것처럼 유술이 싹 없어지게 만들었으니, 배위(裴頠)의 숭유론(崇有論)범녕(范寗)의 유학을 좋아한 의론은 한갓 말뿐이지 효과는 없었다. 또 양 무제(梁武帝)는 친히 사중(四衆)이 되었지만 부처가 굶주림을 구원해 주지 못하였고, 위(魏) 나라 종실은 불교의 오계(五戒)를 전적으로 숭상했지만 부처가 짧은 수명을 늘려 주지 못하였으니, 그렇다면 불학(佛學)이 한갓 해롭기만 하고 무익한 것이 이처럼 분명하다. 부혁(傅奕)이 비록 불법(佛法)을 제거하자고 청하기는 했지만 당 고조(唐高祖)가 마침내 중들을 가려서 내쫓을 것을 명했을 뿐 끝내 근본을 뽑아 버리지는 못하였고, 한유(韓愈)가 비록 불골(佛骨, 사리)을 버릴 것을 청하였지만 당나라 황제는 마침내 상도무(桑道茂)에게 미혹되어 끝내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천척(千尺)의 지주(砥柱)처럼 아득한 대하(大河) 가운데에 우뚝 서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거센 물결을 되돌린 자 누가 있단 말인가.

오직 하늘만이 인으로 세상을 덮어 주어 아랫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심에 송(宋)나라의 덕이 아름답고 밝아져서 문치(文治)의 훌륭함이 삼대(三代) 이후에 가장 성대하였다. 이에 주돈이(周敦頤)와 소옹(邵雍)과 두 정자(程子)두 장씨(張氏)와 주희(朱熹)와 같은 현자들이 배출되어 지엽까지 이미 무너진 상황에서 근본을 붙들어 세워 쭉쭉 뻗고 무성하게 만드니, 부정한 학설을 말하는 자들이 일어나지 못하고 잘못된 행실을 하는 자들이 제멋대로 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천리(天理)가 없어지지 않고 인심이 죽지 않았으니, 학술이 바름을 회복한 것이 마치 해가 구름을 쓸어버리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 쇠퇴하게 되자 진회(秦檜), 한탁주(韓侂冑), 가사도(賈似道), 사미원(史彌遠)의 부정한 말이 다시 유행하게 되어 바른 학문을 가리켜 거짓 학문이라고 해서 끝내 나라를 망하게 만들었다.

우리나라로 돌아와 보면 옛날부터 예의의 나라라고 일컬어졌는데, 태조(太祖)가 조선을 건국하게 되자 명(明)나라의 역수(曆數)와 운행을 함께 하여 성스러운 군주와 어진 신하가 태학과 향교를 세워 육경(六經)을 선양하고 오전(五典)을 천명하였다. 이에 문장(文章)이 찬란하고 유풍(儒風)이 성대하였으니, 어찌 몇 해 전 이래로 그 속에서 삿된 학문이 몰래 자라고 감춰져서 ‘경천(敬天)’이라고 말한단 말인가. 그들의 도는 오로지 인륜을 어지럽히는 것들을 주장하기에 나라에서 엄히 금하고 간혹 주벌하기도 해서 감히 자행될 수 없었는데, 한번 양왜(洋倭)가 바다를 건너온 뒤로는 그들의 말이 횡행하여 서울에서부터 시골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성인의 가르침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일어났다.

오호라! -원문 1자 판독 불가- 정묘년(1867, 고종4) 봄에 우리 선군(先君) 송은공(松隱公)이 임종할 적에 불초(不肖)한 나에게 가르침을 남기기를 “30년 후에 이단의 학문이 횡행하고 세상일에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우리 집안은 공맹(孔孟)을 높여 스승 삼은 지가 거의 십 대가 되었으니, 스승을 배신하고 이단을 배우면 나의 자손이 아니다. 경계하고 경계하라.”라고 하였다.

그런데 계사(1893), 갑오(1894) 연간에 이르러 과연 동학이 들불처럼 유행하여 교세가 불학(佛學)과 서로 대등하니, 그 말을 들은 자들이 모두 송은공의 선견지명에 감탄하였다.

불학은 서역에서 나와 석씨(釋氏)에게 근본을 두는데, 석씨는 서방의 성인이라는 호칭이 있기 때문에 성인의 가르침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는 석씨의 깨끗하게 보시하라는 가르침, 자비를 베풀어 살생하지 말라는 가르침과 또 달라서 오로지 괴이하고 사특한 것을 주장하니, 또한 석씨의 이단이다. 동학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모르겠지만, 근래에 영남 사람인 최제우(崔濟愚)가 요상한 책을 얻었는데 어리석은 백성들이 그것을 보고 미혹되어 점차 전파되었다. 우리나라 360주가 거의 대부분 거기에 오염되었는데, 이것이 마치 장각(張角)이 제자들을 나누어 보내어 사방을 돌아다니게 해서 중원의 36방(方)일시에 호응하는 것과 같았다.

계사년(1893, 고종30) 봄부터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고 말하며 고부(古阜), 태인(泰仁), 옥천(沃川), 보은(報恩) 등지에 운집했는데, 복장은 괴이하고 입으로는 13자의 주문을 외우면서 어리석은 풍속을 유인하고 마음을 현혹시켜 까마귀처럼 모여 있었다. 그 주문은 우리 유자들이 볼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 글자도 기억하지 못한다.

갑오년(1894) 봄에는 그 무리들이 말하기를 “모범이 되어 통솔해야 할 수령들이 민정의 어려움을 헤아리지는 않고 세금을 마구 거두고 난폭하게 군다.”라고 하며 고부 백산(白山)에 대규모로 모여 총포와 말을 모아 남쪽 지방을 횡행하였다. 전라도 관찰사가 중군(中軍)과 영장(營將)이 거느린 군대를 보내 공격했는데, 그 무리들이 관군을 대패시키고 또 장성 황룡강에서 패배시켜 마침내 전주성을 함락시켰다. 총포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자 감사(監司)와 판관(判官)과 영장(營將)과 중군(中軍)이 일시에 달아났고, 이에 잔당들이 곳곳에서 봉기하여 마을을 노략질해서 백성들이 모두 산으로 올라갔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전녹두(全綠斗), 김개남(金開南), 손화중(孫和仲), 서일해(徐一海) 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으니, 장리(長吏)들을 많이 죽이고 부자들을 모두 약탈하는 데도 금지할 수 없었다. 수령들이 그 기세를 보고는 추종하여 군수품을 바치고 백성들을 수탈하니, ‘동학(東學)’이라는 이름은 실로 ‘동학(同虐)’과 매한가지이고 ‘도인(道人)’이라는 호칭은 실로 ‘도인(盜人)’과 매한가지이다.

그들의 포악함과 이치에 어긋남은 고금에 없었던 터라, 서울에서 크게 놀라 왜놈들에게 원병을 청하였다. 10월에 전녹두가 군대 수만 명을 거느리고서 삼례역에서부터 충청도 공주로 향했는데, 경군(京軍)이 왜군과 함께 공주 효포(孝浦)에서 막아서서 산 위에 진을 치고 일시에 총포를 쏘니, 비적 무리들이 바람 따라 와해되어 마치 잎이 떨어지는 것 같고 꽁지가 빠지는 것 같았다. 은진 논산포에 다시 모였는데, 경군과 왜군이 패주하는 무리들을 추격하여 곧장 논산에 이르니, 비적들이 도망치고 엎어졌다. 이에 일망타진해서 우두머리를 서울로 보내어 저자에서 처형시켰으니, 도학의 백성을 위한다는 이름이 어디에 있는가.

장각은 황로(黃老)를 신봉해 섬겨 바람과 비를 부르는 도술이 있다고 일컬어졌지만 부관참시(剖棺斬屍)당했고, 손은(孫恩)은 귀신으로 변화하여 비록 구름 밖을 나는 도술에 능했지만 바다에서 익사하였다. 근래로는 백련교(白蓮敎)의 도사들과 가로회(哥老會)의 사람들이 모두 둔갑하여 몸을 숨기는 데에 능해 변화하는 것이 귀신같았지만 끝내 모두 주륙당하였다. 이른바 동학이라는 것은 과연 황로의 학술인가, 귀신의 학술인가. 개개가 장각과 손은이며 면면이 백련교의 도사들과 홍수전(洪秀全)이기라도 한단 말인가. 사특한 학설의 유명무실함을 이처럼 밝게 보여 주는 것이 없다. 그리고 이른바 불학이라는 것은 이미 이전(二典), 오고(五誥), 팔조(八條), 구경(九經)의 글이 아니니, 그렇다면 노자, 부처, 장자, 양주, 묵적, 신불해, 한비자, 순경, 이사의 학설인가? 언론에 대해서는 노자, 장자와 같고 고상함을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양주, 묵적과 같고 형명(刑名)에 대해서는 신불해, 한비자와 같고 문장에 대해서는 순경, 이사와 같아 이단의 종주가 되는 데에 불과 하니, 뒷날에 이를 배우는 자들은 모두 일생을 잘 마치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동쪽으로 물을 트면 물이 동쪽으로 흐르는 것이 어찌 물의 본성을 얻은 것이며, 서쪽으로 물을 트면 물이 서쪽으로 흐르는 것이 어찌 물의 이치를 얻은 것이겠는가.

더구나 동학의 무리들은 모두 우리 군주의 백성들인데, 잔혹한 관리의 포학함을 견디지 못하여 솥 안에서 헐떡이다가 황지(潢池)에서 무기를 가지고 논 것이다. 따라서 공수(龔遂)와 장강(張綱)처럼 가르치고 회유하여 귀화하게 해야 하는데, 어찌 다급하게 몇 대에 걸친 원수의 나라를 불러들여서 그들의 손을 빌려 우리 백성들을 죽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이는 바로 호사가들이 배우지 않아 방도도 없으면서 외국을 드나들며 군주를 속여 화를 만든 소치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왜놈들로 하여금 틈을 잡아 해악을 마음껏 부려 우리를 바꿔 자신들이 되게 해서 수백 년의 원한을 갚고 우리 삼천리의 사직을 기울게 하였다.

오호라! 나라의 흥망은 글의 성쇠에 달려 있고, 글의 성쇠는 학문의 정사(正邪)에 달려 있고, 학문의 정사는 마음의 추향(趨向)에 달려 있고, 마음의 추향은 가르침의 선악에 달려 있으니, 선으로써 가르치면 마음이 바른 데로 나아가 학문이 흥성해서 나라가 흥하게 되고, 악으로써 가르치면 마음이 삿된 데로 나아가 학문이 쇠해서 나라가 망하게 된다. 학문에는 방도가 있고 방도는 배움에 달려 있으니, 하나의 이치로 이 도를 관통하되 도를 밝히는 것은 의리를 정밀하게 살피는 것만 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 부자가 일찍이 말하기를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라고 하였으니, 배우되 반드시 생각하고 생각하되 반드시 배우는 것은 우리 유가에서 참된 공부를 쌓고 오랫동안 힘쓰는 이유이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는 않으며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이단이 제멋대로 흘러가 돌아올 줄 모르는 이유이다. 증자(曾子)가 ‘명덕(明德)’, ‘신민(新民)’, ‘지어지선(止於至善)’이라고 말한 것은 저들이 말하는 ‘도’와 ‘덕’이 아니고, 자사(子思)가 ‘명성(命性)’, ‘솔성(率性)’, ‘수도(修道)’ 라고 말한 것은 저들이 말하는 ‘작용이 성(性)이다.’라는 것이 아니다. 양자(揚子)의 선악이 혼재되어 있다는 설양자(揚子)의……설이 과연 본성은 모두 선하다는 맹자의 설과 같으며, 묵자(墨子)의 박하게 장례 지내는 도가 또한 부모에게 검소하게 하지 않는 군자의 도와 같다는 말인가. 이것을 미루어 보면 바름이라는 것은 만사와 만물에 바르지 않음이 없는 것이고, 삿됨이라는 것은 만물과 만사에 삿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길에는 바른길과 잘못된 길이 있는데, 이 바른길을 버리고 잘못된 길을 간다면 누가 갈림길에 서 있는 사람을 불러 ‘일이관지(一以貫之)’의 가르침을 가르쳐 주어 그로 하여금 깨닫고 본받으며 계승하고 행하게 하겠는가.

주석
“우리의 도(道)는 하나의 이치가 모든 일을 꿰뚫고 있다.[吾道一以貫之]” 『논어』 「이인(里仁)」에 공자(孔子)가 제자 증삼을 불러서 “나의 도는 하나의 이치로써 모든 일을 꿰뚫고 있다.[吾道一以貫之]”라고 하자, 증삼이 “네, 그렇습니다.[唯]”라고 대답하였다.
일본만수(一本萬殊) 우주의 근원은 하나의 이치인데, 그것이 천만 가지 현상으로 분리되어 각각 다른 만물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수많은 사물이 아무리 다르다 하더라도 그 원리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아래의 ‘만수일본(萬殊一本)’은 ‘일본만수’를 바꾸어 말한것이다.
육언(六言) 여섯 가지 아름다운 덕으로, 어짊[仁], 지혜[知], 믿음[信], 곧음[直], 용맹[勇], 강함[剛]을 말한다. 『논어』 「양화(陽貨)」에 보인다.
칠정(七政) 일(日)·월(月)과 수(水)·화(火)·금(金)·목(木)·토(土) 오성(五星)을 말하는 것으로, 『서경』 「순전(舜典)」에 보인다.
팔조(八條) 이상적인 통치자로서 갖추어야 할 여덟 가지 조목으로,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는 것[格物], 지식을 지극히 하는 것[致知], 뜻을 성실히 하는 것[誠意], 마음을 바루는 것[正心], 몸을 닦는 것[修身], 집안을 가지런히 하는 것[齊家], 나라를 다스리는 것[治國], 천하를 고르게 하는 것[平天下]을 이른다. 『대학장구(大學章句)』에 보인다.
구경(九經)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큰 법으로, 몸을 닦는 것[修身], 현자를 높이는 것[尊賢], 가까운 친척을 친애하는 것[親親], 대신을 존경하는 것[敬大臣], 여러 신하를 체찰하는 것[體群臣],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것[子庶民], 공인들을 우대하여 오게 하는 것[來百工], 먼 지방 사람을 회유하는 것[柔遠人], 제후들을 무마하는 것[懷諸侯]이다. 『중용장구(中庸章句)』에 보인다.
황극(皇極)의 자리 황극은 『서경』 「주서(周書) 홍범(洪範)」에 나오는 말로 ‘홍범 구주(洪範九疇)’라고 하는 아홉 가지 통치의 기본 강령 중 다섯 번째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황(皇)은 임금을 뜻하고 극(極)은 북극성을 뜻하는데, 북극성과 다른 여러 별과의 관계처럼 임금의 자리는 임금이 지극하고 표준이 되는 모범을 보여야 할 자리라는 것이다.
구주(九疇)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대법(大法)으로, 흔히 홍범구주라고 한다. 우왕(禹王)이 하늘의 계시에 의하여 얻은 것으로, 기자(箕子)가 무왕(武王)의 물음에 대답한 후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한다. 이는 곧 오행(五行)·오사(五事)·팔정(八政)·오기(五紀)·황극(皇極)·삼덕(三德)·계의(稽疑)·서징(庶徵)·오복(五福)과 육극(六極)이다. 『서경』 「주서 홍범」에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육극(六極)과 팔황(八荒)과 사해(四海)와 구주(九州) 육극은 상하동서남북(上下東西南北)이고, 팔황(八荒)은 팔방(八方)의 먼 지방으로, 모두 천하를 가리킨다. 사해(四海)는 사방의 바다에 둘러싸인 땅이고, 구주는 고대에 중국 전역을 아홉 지역으로 나눈 것으로, 이 또한 모두 천하를 가리킨다.
지어지선(止於至善) 『대학』 삼강령(三綱領)의 세 번째에 해당하는 항목으로, 『대학장구』 경 1장에 “대학의 도는 명덕을 밝힘에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함에 있으며 지선에 그침에 있다.[大學之道在明明德在親民在止於至善]”라고 하였다.
육예(六藝)의 과목과 공자의 학술이 아닌 여러 것들은 모두 그 도를 끊어 버려서 세상에 함께 나오게 하지 말아야 한다. 육예는 육경(六經)과 같은 말로, 유가(儒家)의 기본 경전인 『시경』·『서경』·『주역』·『춘추』·『예기』·『악경』을 가리킨다. 동중서(董仲舒)의 이 말은 『한서(漢書)』 권56 「동중서전(董仲舒傳)」에 보인다.
생이지지(生而知之) 태어나면서부터 사람의 도리를 저절로 아는 것으로, 『중용장구』 제20장에 “혹은 태어나면서부터 알고, 혹은 배워서 알고, 혹은 애를 써서 아는데, 그 앎에 미쳐서는 똑같다.[或生而知之, 或學而知之, 或困而知之, 及其知之, 一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아래의 학이지지(學而知之)는 생이지지 다음 등급의 기질로, 배워서 사람의 도리를 아는 것이다.
제성광연(齊聖廣淵) 원래는 탕왕(湯王)의 덕을 형용한 말로, ‘공경스럽고 성스러우며 넓고도 깊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여러 왕들의 덕을 형용하는 말로 쓰였다. 『서경』 「미자지명(微子之命)」에 보인다.
상서(庠序) 고대에 지방 학교를 이르는 말로, 은(殷)나라에서는 서(序)라 하였고 주(周)나라에서는 상(庠)이라고 하였는데, 후세에는 학교를 통칭하는 말로 쓰였다.
‘이단(異端)을 공부하면 해롭다’는 가르침 『논어』 「위정(爲政)」에 보인다.
3백 가지의 경례(經禮)와 3천 가지의 곡례(曲禮) 예(禮)에 있어서 대강(大綱)이 되는 것을 경례(經禮)라 하고, 그 대강을 실천하기 위하여 필요한 절차에 관한 것을 곡례라 한다. 『예기』 「예기(禮器)」에, “경례가 3백 가지이고 곡례가 3천 가지인데, 그 극치는 하나이다.[經禮三百, 曲禮三千, 其致一也.]”라고 하였다.
장수(莊叟)가 나비가 되었던 것 『장자』 「제물론(齊物論)」에 “옛날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인지라 스스로 유쾌하고 뜻에 만족하여 자신이 장주인 줄을 모르다가 갑자기 꿈을 깨고 보니, 자신이 분명 장주였다. 장주의 꿈속에서 장주가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의 꿈속에서 나비가 장주가 된 것인지 알지 못하였다.[昔者, 莊周夢爲蝴蝶. 栩栩然蝴蝶也, 自喩適志與, 不知周也. 俄然覺, 則蘧蘧然周也. 不知周之夢爲胡蝶與, 胡蝶之夢爲周與.]”라고 하였다.
열자(列子)가 바람을 탔던 것 『장자』 「소요유(逍遼遊)」에 “열자가 바람을 타고 다니니 시원해서 좋았다.[列子御風而行, 泠然善也.]”라고 하였다.
현도(玄道) 노장학(老莊學)을 가리키는 말로, 『도덕경(道德經)』 1장에 “도는 현묘하고 현묘하니 모든 현묘함의 문이다.[玄之又玄, 衆妙之門.]”라고 하였다.
왕필(王弼)과 하안(何晏) 삼국 시대 위(魏)나라의 저명한 학자이자 정치가로, 위진(魏晉) 현학(玄學)의 시조로 일컬어졌다.
완방(阮放)과 필탁(畢卓) 진(晉)나라 말기에 ‘팔달(八達)’이라고 일컬어졌던 여덟 사람 중에 두 사람으로, 예법(禮法)을 전혀 돌아보지 않고 날마다 청허담(淸虛談)을 나누며 술을 몹시 즐겼다고 한다.
배위(裴頠)의 숭유론(崇有論) 배위(267~300)는 서진(西晉) 하동(河東) 사람이다. 하안(何晏)·완적(玩籍) 같은 사람이 세상에 명성을 얻었으나 부허(浮虛)한 말만 하고 예법을 따르지 않으며 녹만 받아먹고 직무는 봉행하지 않자, 배외가 숭유론을 지어 노장학의 허무론(虛無論)을 변석(辨釋)하여 그 당시 청담(淸談)의 무리를 배척하였다.
범녕(范寗)의 유학을 좋아한 의론 범녕(339~401)은 중국 동진(東晉) 때의 학자이자 문신이다. 효무제(孝武帝) 때 중서시랑(中書侍郞)으로 있다가 예장 태수(豫章太守)로 좌천되었다. 그곳에서 학교를 세우고 경학(經學)에 힘쓰면서, 청담(淸談)에 빠져 있던 당시 지식인들의 경박한 풍조를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저명한 학자이자 정치 가인 왕필과 하안이 후생들을 그르치고 있다고 극도로 배척하였다.
양 무제(梁武帝)는 친히 사중(四衆)이 되었지만 부처가 굶주림을 구원해 주지 못하였고 사중(四衆)은 불교의 비구(比丘)·비구니(比丘尼)·우바새(優婆塞)·우바이(優婆夷), 즉 남자 승려·여자 승려·남자 신도·여자 신도를 가리키는 말로, 사부중(四部衆) 혹은 사부대중(四部大衆)이라고도 한다. 양 무제는 불법(佛法)을 매우 신봉하여 사원(寺院)을 짓고 자기 성(姓)을 따서 소사(蕭寺)라고 이름을 붙였으며,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되려 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역적(逆賊) 후경(侯景)에게 포위를 당하여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해 굶주려 죽었다.
부혁(傅奕)이 비록 불법(佛法)을 제거하자고 청하기는 했지만 당 고조(唐高祖)가 마침내 중들을 가려서 내쫓을 것을 명했을 뿐 끝내 근본을 뽑아 버리지는 못하였고 당 고조(唐高祖) 무덕(武德) 9년(626)에 부혁이 상소를 올려 불법(佛法)을 제거할 것을 청하자, 당 고조가 천하의 중들을 가려서 내쫓을 것을 명하였다. 『通鑑節要 卷35 唐紀 高祖神堯皇帝』
한유(韓愈)가 비록 불골(佛骨, 사리)을 버릴 것을 청하였지만 당나라 헌종(憲宗)이 불교를 깊이 믿어 사람을 보내 불골(佛骨)을 궁궐로 맞아들이자 형부 시랑(刑部侍郞)으로 있던 한유(韓愈)가 「논불골표(論佛骨表)」를 올려 역대로 불교를 믿지 않았어도 임금들이 장수(長壽)한 예를 열거하고 불교의 폐단을 말한 다음 불골을 물이나 불 속에 던져 버리라고 극간하였다. 이에 대로한 헌종이 한유를 조주 자사(潮州刺史)로 좌천시켜 버렸다. 『新唐書 卷176 韓愈列傳』
당나라 황제는 마침내 상도무(桑道茂)에게 미혹되어 끝내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상도무(桑道茂)는 당나라 덕종(德宗) 때 활동했던 방사(方士)로, 앞일을 잘 내다보아 예언을 하면 모두 맞았다고 한다. 여기에서 나라를 혼란스럽게 했다는 것은, 상도무의 말로 인해 덕종이 한여름에 수천 명의 장정과 신책군(神策軍)을 동원해 봉천(奉天)에 성을 쌓았던 것을 말하는 듯한데, 자세하지 않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거센 물결을 되돌린 부정한 학설을 막아 바르게 되돌린다는 말로,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 권12 「진학해(進學解)」에 “온갖 내를 막아 동쪽으로 흐르게 하고, 이미 거꾸로 흐르는 거센 물결을 되돌린다.[障百川而東之, 迴狂瀾於既倒.]”라고 한 데서 차용한 것이다.
두 정자(程子) 송(宋)나라 정호(程顥, 1032~1085)와 정이(程頤, 1033~1107) 형제를 말한다.
두 장씨(張氏) 송나라 장재(張載, 1020~1077)와 장식(張栻, 1133~1180)을 말한다.
진회(秦檜) 1090~1155. 중국 남송 때의 정치가이다. 고종(高宗)의 신임을 받아 19년간 국정을 전단(專斷)하였는데, 남송과 금나라가 대치하고 있던 역사적 상황에서 명장 악비(岳飛) 등 충신(忠臣), 양장(良將)들을 거의 모두 주살하고 금과 굴욕적인 화약을 체결하였다. 후세의 주자학파로부터 간신으로 비난을 받았다.
한탁주(韓侂冑) 1152~1207. 중국 남송 때의 정치가이다. 영종(寧宗) 때 정권을 잡고 자기에게 반대하는 자들을 제거하려고 하면서, 도학(道學)을 인정(人情)에 어긋나는 위학으로 지목하여 금지하였다. 당시 도학의 주요 인물인 주희(朱熹)의 관작을 삭탈하고, 채원정(蔡元定)을 좌천시키는 등 조정의 정사(正士)들을 모두 축출하였다.
가사도(賈似道) 1213~1275. 중국 남송 때의 정치가이다. 누이가 이종(理宗)의 귀비(貴妃)가 된 것을 계기로 출세 가도를 달려 우승상에 이르렀다. 원(元)나라 군대가 악주(鄂州)를 포위했을 때 구원하러 출병했다가 남몰래 칭신(稱臣)의 약속을 하고 돌아와 대첩(大捷)을 거두었다고 선전하였으며, 결국엔 원병(元兵)에게 대패하여 귀양 가는 도중 정호신(鄭虎臣)에게 살해되었다.
사미원(史彌遠) 1164~1233. 중국 남송 때의 정치가이다. 영종(寧宗) 때 양 황후(楊皇后)와 결탁해 권력을 마음대로 부린 나머지 당시의 현자들을 모두 죽이거나 몰아내고, 영종이 죽자 조서를 위조해 태자를 폐출(廢出)하고 이종(理宗)을 세우고는 9년 동안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역수(曆數) 천명의 운수로 왕조가 교체되는 순서를 말한다.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하늘의 역수가 그대의 몸에 있으니, 그대는 제위(帝位)에 오르도록 하라.[天之曆數在汝躬, 汝終陟元后.]”라고 하였다.
오전(五典) 오제(五帝) 시대의 책으로, 흔히 고대의 전적을 의미한다.
경천(敬天) 원문에는 ‘天敬’으로 되어 있으나, 문맥에 따라 ‘敬天’으로 수정하여 번역하였다. 하느님을 받든다는 의미로, 천도교(天道敎)에서는 수심경천(守心敬天)을 가르쳤다.
원문 1자 판독 불가 원문은 ‘前■’인데, ‘前’도 판독 불가인 글자와의 관계를 알 수 없어 번역하지 않았다.
송은공(松隱公) 양재우(楊在佑, ?~?)로, 본관은 남원, 호는 송은이다. 자세한 행적은 미상이다.
거의 대부분 원문에는 ‘槩’로 되어 있으나, 일반적인 용례에 따라 ‘皆’로 수정하여 번역하였다.
36방(方) 원문에는 ‘坊’으로 되어 있으나, 『통감절요(通鑑節要)』 「후한기(後漢紀)」에 의거하여 ‘方’으로 수정하여 번역하였다.
일시에 호응하는 것 장각(張角, ?~184)은 중국 후한 말 황건(黃巾)의 난을 이끈 지도자이다. 기주(冀州) 거록(巨鹿) 사람으로 태평도(太平道)를 창시했고, 자칭 ‘대현량사(大賢良師)’라고 했다. 영제(靈帝) 때 병 치료와 포교를 빌미로 비밀리에 교단을 조직하여 제자를 8주(州)에 파견하고서 36방(方)을 두었는데, 큰 방은 무리가 1만여 명이고 작은 방은 6천 또는 7천 명쯤 되었다. 184년 각 주의 교도들과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천공장군(天公將軍)’이라 칭하고 머리에 황건을 두르는 것을 교도의 표시로 삼았다. 병으로 죽은 뒤에 토벌대에 의해 부관참시를 당했다.
계사년(1893, 고종30) 봄부터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고 말하며 고부(古阜), 태인(泰仁), 옥천(沃川), 보은(報恩) 등지에 운집했는데, 복장은 괴이하고 입으로는 13자의 주문 1893년(고종30) 봄 동학교도들이 보은 장내와 금구 원평에서 대대적인 집회를 열었다. 주문은 한울님께 빌 때에 암송하는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 13자를 말한다.
총포 원문에는 ‘鉋’로 되어 있으나, 문맥에 따라 ‘砲’로 수정하여 번역하였다. 이하의 ‘砲’도 동일하다.
전녹두(全綠斗) 원문은 ‘전녹두(全綠頭)’인데, 일반적인 용례에 근거하여 ‘두(頭)’를 ‘두(斗)’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손은(孫恩) ?~402. 동진(東晋) 사람이다. 오두미도(五斗米道)의 수령인 삼촌 손태(孫泰)가 피살되자, 손은이 자신을 신봉하는 삼오의 사람들을 이끌고 섬으로 들어가서 수십만의 병력을 규합한 뒤에, 몇 차례나 반란을 일으켜 침공했는데, 끝내는 유유(劉裕)에게 패하게 되어 바다로 뛰어 들어가 죽었다. 『通鑑節要 卷30 晉紀 安皇帝』
백련교(白蓮敎) 중국 송(宋)나라 이후에 성행된 민간의 비밀결사 종교로, 미륵불이 이 세상에 나타나 개벽한다고 백성들을 현혹하여 세력을 크게 뻗쳤다. 당시의 정부와 자주 충돌하였는데, 청나라 말에 대규모로 반란을 일으켰었다.
가로회(哥老會) 청(淸)나라를 몰아내고 명(明)나라를 부활시킬 목적으로 활동한 비밀결사 조직 중의 하나이다.
홍수전(洪秀全) 1814~1864. 광동(廣東)성 화현(花縣) 출신이다. 배상제회(拜上帝會)라는 종교결사를 창립하고, 1851년 ‘태평천국’의 건국을 선포하여 반란을 일으 켰다. 한때 남경(南京)을 점령하는 등 세력을 떨쳤지만, 1864년 병사하였고, 배상제회는 한 달 뒤에 청나라 군대에 평정되었다.
이전(二典) 『서경』의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을 가리킨다.
오고(五誥) 『서경』의 「대고(大誥)」, 「강고(康誥)」, 「주고(酒誥)」, 「소고(召誥)」, 「낙고(洛誥)」를 가리킨다.
솥 안에서 헐떡이다가 몸이 몹시 위험한 지경에 처해 있음을 비유한 말이다. 장강(張綱)이 광릉군(廣陵郡) 태수로 임명되었는데, 그곳은 장영(張嬰)이라는 도적이 10년 동안 난리를 일으키고 있는 곳이었다. 이에 장강이 그를 찾아가서 설득하자, 장영이 감복하여 울면서 말하기를 “서로 모여서 구차히 생명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마치 물고기가 솥 안에서 노닐며 잠시 동안만 숨을 쉬고 있는 것과 같을 뿐이다.[相聚偸生, 若魚遊釜中, 喘息須臾間耳.]”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56 張綱列傳』
황지(潢池)에서 무기를 가지고 논 것이다. 생활고에 시달리고 수령들의 압박을 견디다 못해 일으킨 소규모의 농민 반란을 말한다. 황지는 작은 웅덩이를 가리킨다. 한(漢)나라 공수(龔遂)가 선제(宣帝)의 하문을 받고는 “백성들이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있는데도 관리들이 돌보아 주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폐하의 적자(赤子)들이 폐하의 군사를 훔쳐서 웅덩이 안에서 병정놀이를 하게 한 것입니다.[其民困於饑寒, 而吏不恤. 故使陛下赤子, 盜弄陛下之兵於潢池中耳.]”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漢書 卷89 龔遂傳』
‘도’와 ‘덕’ 노자(老子)의 핵심 사상으로, 노자가 지은 『도덕경(道德經)』의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명성(命性)’, ‘솔성(率性)’, ‘수도(修道)’ 『중용장구(中庸章句)』 1장에 “하늘이 모든 사물에 부여해 준 것을 성이라 하고, 성대로 하는 것을 도라 하고, 도를 중도에 맞게 하나하나 조절해 놓은 것을 교라 한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라고 하였다.
‘작용이 성(性)이다.’ 선종(禪宗)의 말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손으로 잡고 발로 걷는 등의 모든 작용을 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양자(揚子)의……설 성(性)에는 선과 악이 뒤섞여 있어서 선을 닦으면 선한 사람이 되고 악을 닦으면 악한 사람이 된다는 설로, 『법언(法言)』 「수신편(修身篇)」에 보인다.
묵자(墨子)의 박하게 장례 지내는 도 묵자는 겸애설(兼愛說)을 주장해, 검소함을 숭상하여 부모의 장례에 대해서도 박장(薄葬)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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