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 재위 31년인 갑오년(1894, 고종31) 봄, 동학의 무리가 고을 수령이 잔학한 짓을 한다는 구실로 호남을 선동하여 노략질을 더욱 심하게 자행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를 안정시킬 방법은 생각지 않고 왜병들을 불러들여 그 도움에 힘입으려 하였으나 그들이 경기(京畿)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도리어 의심을 품었는데, 그러자 왜구들이 야음을 틈타 도성을 지나 대내(大內)에 돌입하여 한껏 위협을 가하였다. 이에 여러 나라 사람들이 서로 재빨리 응하면서 저들의 기미를 주시하고 있었는데, 국내에 있던 저 왜놈의 무리들이 제멋대로 횡행하면서 마침내 공봉(供奉)을 줄이고 보위에 계신 성상을 협박하기까지 하니 사람들이 한없이 분개하였다.
8월, 임금께서 승지 이건영(李建永)에게 특별히 명하여 호남의 초야에 있는 신하를 불러 모으게 하였는데, 이 소모사(李召募使)와는 오랜 교분이 있기에 그가 내게 종사관의 첩문(帖文)을 주고 유지(諭旨)를 보여 주었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왕은 이르노라. 아! 삼남(三南)의 사대부와 선비들, 임진년(1592, 선조25)에 순절하여 녹훈된 신하의 자손들과 행상·부상(負商)의 반수(班首)들아. 내가 어리석은 몸으로 외람되이 왕업을 계승한 지가 이제 30년이 되었다. 여러 차례 변고를 겪었음에도 덕을 더 일신하지 못한 탓에 하늘이 재앙을 내려서 간신들이 왕명을 도둑질하고 왜적이 대궐을 범하였으니, 종묘사직의 위망(危亡)이 조석에 임박하였도다. 죄는 내게서 연유하였으되 재앙은 무고한 이들에까지 미치게 되었으니 내 실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나라에서 5백 년간 편히 쉬게 하고 길러 준 은덕이 후하지 못하다 할 수는 없으며, 안위를 의지할 곳으로는 삼남 땅보다 우선할 곳이 없으니, 지금 근신을 은밀히 파견하여 의롭고 용감한 이들을 불러 모으고자 한다. 아! 너희는 나를 부덕하다 여기지 말고 선왕의 깊은 인자함과 두터운 은택을, 그리고 너희 선조들이 충성스럽고 진실한 뜻으로 나아가 애썼던 일을 생각해서 날을 정해 창의하여 마음과 힘을 합치도록 하라. 그리하여 우리 망해 가는 국운을 부지하고 나의 위태로운 목숨을 구하도록 하라. 나라가 멸망하는 것도 너희에게 달렸고, 나라가 부흥하는 것도 너희에게 달렸도다. 내 말은 여기서 그치고 많은 말은 하지 않겠노라.”
신 평(枰)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아! 초 장왕(楚莊王)이 군사들을 위로하자 삼군(三軍)이 솜옷을 껴입은 듯이 여겼고, 당 황제가 자신에게 죄를 돌리자 광망한 장수조차 감동해 눈물을 흘렸습니다. 굵은 명주실 같은 왕의 말씀에 민심이 방아질하듯 떠들썩하니, 어찌 솜옷 껴입은 군사들이나 감동해 눈물 흘린 장수와 같을 뿐이겠으며, 호남의 오십 고을에 어찌 한 사람의 의로운 인사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지혜는 좋은 계책을 세우기에 부족하고 용기는 결단하기에 부족한 저 같은 사람이 병권이 동학 무리에게 모조리 들어가 속수무책으로 남쪽 사람들을 이끌 수가 없는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그렇지만 도적일지라도 깨우쳐 교화된다면 또한 우리 백성이고, 임금이 가는 길에 억센 적도 복종시킬 수 있으니, 따라서 소모사를 보낸 것은 바로 도적의 무리를 보듬어 회유하여 그들로서 몽둥이를 만들어다 섬나라 왜적들을 매질해 내쫓기 위함이고 소모사가 온 것 또한 왕실에 충성을 바치고 도적의 무리들을 교화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이에 소모사가 이르는 곳마다 둔치고 모여 있던 도적들 중에 이 선유를 보고 눈물을 뿌리며 발분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이 선포한 성지를 받들며 모두가 충성을 바쳐 적과 맞서 싸우자고 말하였다.
10월, 전녹두(全綠頭)는 삼례역(三禮驛)에서 수만의 병사를 이끌고 공주(公州)로 향하고 김개남(金開南)은 대방부(帶方府, 남원)에서 수만의 군졸을 독려하여 청주(淸州)로 향하였으며, 그 밖에 각 읍에 있던 도적의 수괴들이 마치 산이 울리고 골짜기에 메아리치며 북이 울리고 그림자가 뒤따르듯 호응하였다. 내가 이 소모사에게 말하였다. “저들이 비록 비도(匪道)라도 또한 사람의 떳떳한 본성이 있어서 지금 이렇게 규합하여 비록 의병(義兵)이라 자칭하고는 있습니다만, 그 수괴는 본래 용병의 지략을 갖춘 자가 아니고 그 졸개들도 모두 노략질이나 하던 무리이니, 등우(鄧禹)가 ‘도적들이 무리 지어 있으면서 장구한 계책이 없다’고 말한 것이 이들에게 해당할 것입니다. 이들 무리를 보낸 뒤에 남쪽 땅에 머물러 순회하며 성의를 갖추어 불러 모은다면 충의의 뜻을 지닌 선비들이 필시 모집에 많이 응할 것이니, 그런 뒤에야 창의(倡義)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이들 무리만을 전적으로 믿는다면 일은 필시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니, 저들의 진영에 섞여 들어가서 훗날의 비난을 사서는 안 됩니다.”
그러자 이 소모사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소. 용병의 법도는 성인의 도와 다를 것이 없으니, 권도(權道)를 행하여 마땅함을 얻는다면 또한 시중(時中, 시의에 맞음)인 것이오. 지금 이 시기에 비록 불러 모으려 하더라도 어찌 한 사람이라도 모집에 응하는 자가 있겠소. 지금 이 군사들 가운데 사대부와 선비와 훈신의 자손이 아닌 이가 없는데, 이들을 제쳐 두고 어찌 다른 데서 구할 수 있겠소.”
내가 말하였다. “이것이 어찌 용병의 권도와 시중이라 하겠습니까. 공자께서도 ‘범을 맨주먹으로 때려잡고 황하를 맨몸으로 건너려는 자와는 내 함께하지 않을 것이니, 굳이 말해 보자면 일을 앞두었을 때 두려워할 줄 알며 계책 세우기 좋아하여 일을 이루는 자라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전가(全家, 전봉준)나 김가(金家, 김개남) 등 몇 놈들은 모두 지략을 갖춘 인사가 아니고 요사스런 말이나 퍼뜨리는 무리들로, 비록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에 빌붙어 있으나 실상은 욕심대로 굴려는 마음뿐입니다. 새벽녘의 범이나 한낮의 도깨비 같은 위세로 까마귀와 개미 같은 무리를 모아들였다지만, 범을 맨주먹으로 때려잡고 황하를 맨몸으로 건너려 할 줄만 아는 용력뿐인 사내가 어찌 일을 앞두고 두려워할 줄 알겠으며 계책 세우기 좋아하여 일을 이룰 줄을 알겠습니까. 그리고 향초와 누린 풀은 같은 그릇에 담아서는 안 되고 붉은색과 검은 색은 한데 같이 물들일 수 없으니, 실질은 없이 명분에 기대기만 하는 도적들을 지모가 있어 용병을 아는 장수와 동격으로 보아서야 되겠습니까. 눈이 밝은 자는 조짐이 싹트기 전에 알아보는 법인데, 더구나 조짐이 이미 드러난 판국이라면 또 어떻겠습니까.” 나는 끝내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이 소모사는 성정이 본래 부드럽고 어질었으니, 그래서 저 교화되려 하는 동학 무리들에 대해 차마 모질게 하지 못한 것이다.
마침내 그들을 보내 공주에서 왜군을 토벌하게 하였으나 동학 무리가 대패하고 돌아오자 이에 이 소모사는 가슴을 부여잡고 통곡하였다. 남은 무리들도 다시 논산에서 패주하면서 그저 병기와 군량만 갖추게 해 준 꼴이 되었으니, 사학(邪學)이 도를 해치고 도적이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 이다지도 혹독하고 심하구나! 이에 왜적들이 이 일이 공이 된다는 핑계로 남쪽 지방을 횡행하며 동학 무리를 섬멸한다는 명분으로 살육을 자행하였고, 우리나라 병정과 순검(巡檢)들도 왜구들을 앞세우고서 포악한 짓을 저지르는 것이 동학 무리보다도 심하였으니, 세상일의 변화가 참으로 통탄스럽구나!
생각해 보면 동학이 무리를 지은 것은 전운(轉運)이 생업을 침탈한다는 것에 명분을 둔 일이고, 동학이 도적이 된 것은 관찰사가 먼저 군사를 일으킨 데서 연유한 것이다. 만약 관찰사가 몸소 적도들이 둔친 곳에 가서 예의로써 깨우치고 조세를 가볍게 해 주며 전운을 혁파하여 백성들의 생업을 안정시켜 주었더라면 필시 해산하고 각자 제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며, 그러고서도 그들이 뉘우치지 않았다 한들 응당 주벌해야 할 수괴에 대한 한번의 옥사로도 충분할 일이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떠들썩하게 누대에 걸친 원수의 나라를 불러다 그들의 원한과 독기를 마음껏 풀어내게 만들고야 만 것인가. 이른바 흉험한 도적들이 평소에 임금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품고서 백방으로 계략을 짜서 군부를 곤경에 빠뜨리고 사직을 기울게 하였으니, 어찌 온 천하 사람들이 똑같이 부여받은 본성을 가지고 그 어떤 사람도 차마 하지 못할 일을 저질렀단 말인가.
마침내 일어난 을미년(1895, 고종32) 8월의 큰 변고는 실로 세상 어느 곳에서도 고금 어느 때에도 없었던 일이니, 누구인들 그 자식이 아니어서 모후를 시해하는 생각지도 못할 짓을 벌인 자들과 차마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있겠으며, 저들 또한 신하된 몸으로 지존이신 군부를 협박한 자들과 어찌 한 땅에서 더불어 살 수 있겠는가. 머리카락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인데 이것을 깎아 중놈 꼴로 만들었으니 이 때문에 임금과 백성이 눈물을 흘렸고, 의관(衣冠)은 중화와 이적을 구별하게 해 주는 것인데 이것을 바꾸어 오랑캐처럼 꾸미게 하였으니 이것이 조정과 재야 사람들이 분개한 이유였다. 하늘에는 변치 않는 이치가 있고 도가 실추되지 않아 사람에게 있기에 온 나라가 함께 분노함에 죄인들의 수괴가 머리를 내놓았으나, 음험한 무리가 아직 많고 왜적들이 더욱 제멋대로 굴어서 간악한 흉적들이 치세를 뒤엎어 난세로 만들어 5백 년의 기수(氣數)가 변하는 것을 면하지는 못하였다. 그렇지만 밝으신 성상께서 잘못을 스스로의 책임으로 삼으시니, 이것이 어찌 영원토록 천명을 공경하는 아름다움을 이루지 않겠는가. 이른바 문물을 개방하여 백성들을 교화한다는 것도 간신들이 재앙을 빚어내려는 수작이니, 그렇다면 반드시 이쪽을 도와 저쪽을 밀어내는 것이 어찌 앞날의 복이 되겠는가.
생각건대 난국을 다스려 바른 도를 회복함으로써 사직을 편안케 하는 것은 오직 보좌하는 이가 충성을 다하고 의에 떨쳐 일어나는 데에 달린 것이니, 갑오년(1894, 고종31)의 선유에 대하여 감동스러워 눈물이 나는 마음을 가눌 수 없어 병신년(1896)의 시사에 대해 대략 소회를 쓴다. 아! 이 소모사는 마음을 다하여 임금을 위해 애썼지만 끝내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서울 집에서 세상을 떠났고, 나 역시 멀리 초야에 내버려진 처지이다. 노년에 장대한 뜻 품고 있어도 늙어 버린 풍로(馮老) 같은 신세를 어찌할 수는 없지만, 변방에서 눈을 감느니 차라리 마옹(馬翁)처럼 아직 자신이 쓸 만하다는 것을 시험해 보이려 한다., 갑옷을 풀어 헤치고자 하여 매양 강물 소리를 들으며 정벌을 생각하며 큰바람을 타지 못하건만 공연히 물결 헤칠 뜻만 품고서 붓을 던지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