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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삼남(三南)은 임진년(1592, 선조25)에 의병을 일으킨 훈신(勳臣)의 자손들이 사는 곳인데, 갑오년(1894, 고종31)의 변란에 동학의 무리들이 멋대로 군사를 일으키는 때를 만나 충성스럽고 의로운 선비들이 무용(武勇)을 쓸 수 없었다. 이 소모사(李召募使)가 비록 성지(聖旨)를 받들고 남쪽으로 왔지만 오로지 동학의 무리들을 귀화시켜 왜이(倭夷)를 배척하는 것을 주 임무로 삼아 나에게 격문을 써 줄 것만 부탁하고 끝내 군영을 설치해 모병(募兵)하는 것은 못 하였으니 안타깝구나.-

삼가 생각건대, 원후(元后)에게서 교화를 의지하므로 자애로운 부친의 은혜를 잊지 않아야 하고, 처음 태어날 때 떳떳한 본성을 편안히 받으므로 의당 자식을 사랑하는 덕을 보답해야 하니 삶을 버리는 것은 바로 의(義)를 취함이요, 목숨을 바치는 것은 인(仁)을 이루는 것 이다. 생각건대, 섬나라 오랑캐들이 승냥이와 범 같은 잔악함으로 하늘의 운수가 임진왜란의 곤액을 만나 희로애락의 감정에 말을 가릴 수 없을 지경이니 사람의 얼굴에 짐승의 마음을 가진 것이 가증스러웠다. 허나 탐욕에 죽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하늘의 위엄과 신의 분노를 알지 못한 것이로다.

경양(涇陽)에서 6월에 군대를 일으켜 선왕(宣王)이 중흥의 공을 세웠고, 귀방(鬼方)에서 3년 만에 고종(高宗)의 무용이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에 조정이 크게 놀라고 온 나라가 어지러워 지모(智謀) 있는 신하들이 조정에 있으면서 온 힘을 다하였고, 충성스러운 선비들이 밖에서 목숨을 바쳤다. 우리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서 마침내 뛰어난 무용을 드날렸고, 오직 저들이 스스로 정벌당할 짓을 하여 마침내 흉악한 오랑캐의 우두머리를 끊어 버린 것이다.

매번 우리나라의 군대를 엿보아 오직 그 원수를 갚을 것을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의 교활함으로 마침내 나라 안에 흉계(兇計)를 두었고 또한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의 음험함으로 마침내 천하에 개화(開化)를 의탁하여 도량(稻粱)을 탐하고 갈대 하나로 바다를 건너 만리의 수고로움을 꺼리지 않으니, 성첩을 넘고 궐문을 침범한 것이 하룻저녁의 일로 연유한 것이 아니다.

이때에, 삼적(三賊)이 망명함으로써 살 계책을 펼치고 십간(十姦, 개화정전대인들)이 생지(生地)에서 사기(死機)를 만들어 사직을 위태로운 곳에서 기울게 하기를 마치 평지를 밟듯 하고 군부(君父)를 위급한 지경에서 핍박하여 원수와 한 하늘을 이는 것을 용인하였다. 30년 동안 깊고 두터운 인자함을 이미 함께 입었거늘 500년 사직의 큰 기업이 기울어 위태롭게 되는 것을 보고만 있단 말인가.

삼가 생각건대, 호남의 50여 주에 어찌 한두 명의 의사(義士)가 없겠는가. 왕이 분개하는 상대를 대적하는 뜻은 이미 엄정한 역사서인 『노사(魯史)』에 기재되어 있고, 군사를 내되 규율에 맞게 하는 시기는 지극한 이치인 『희경(羲經)』에 참으로 합당하다. 허원(許遠)과 장순(張巡)은 고립된 성과 흩어진 병졸들을 거두어 사나운 호랑이의 어금니를 꺾었고 문천상(文天祥)과 육수부(陸秀夫)는 위급한 상황에서 단 신으로 떨쳐 일어나 신룡(神龍)의 날개를 보호하였다.

보잘것없는 신(臣)이 감히 북궐(北闕)에서 미약한 보은을 바쳤고 특별히 남주(南州)에서 성상의 간절한 유지(諭旨)를 받들었다. 아, 우리 백성들이 누군들 선왕께서 남긴 자손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이 어진 백성들은 선조의 자손 아님이 없음에랴. 군대를 쓰는 요체는 오직 적을 헤아려 승리를 생각하는 데 달려 있고, 군부에게 보은하는 도(道)는 의리를 바쳐 충성을 다하는 것보다 우선할 것이 없다.

간절히 우리가 부흥하는 계책을 위하여 대략 저들이 패배한 실상을 말하겠다. 우리 동방은 산천이 수려하고 풍토가 굳세어 수나라 군대가 두 번 쳐들어왔지만 위엄을 잃었고, 당나라 병사가 세 번 바다를 건너 왔지만 패전하였다. 수길(秀吉)은 군세를 잘 보았지만 끝내 한성(漢城)을 넘보지 못하였고, 청정(淸正)은 전략 전술을 잘 사용하였지만 마침내 동래(東萊)에서 곤욕을 치렀다. 이른바 ‘오토리’라는 놈은 이미 수(隋)나라와 당(唐)나라 때와 같은 천하의 형세가 없고, 또한 평수길(平秀吉)과 청정처럼 나라 안의 영웅이 아니었는데, 우리나라에서 민란이 일어난 사이를 틈타 마침내 그 땅의 흉악한 무리들을 몰고 왔다. 여산(廬山)의 큰 골짜기를 어찌 창고의 물건으로 채울 수 있겠으며, 동해의 거대한 물결은 나무와 돌로 메울 수 없는 법이다.

『군참(軍讖)』에 이르기를, “가까운 곳을 버리고 먼 나라를 도모한다면 고생만 하고 공로가 없다.”라고 하였고, 『통서(通書)』에 이르기를, “그 많음을 믿고 남의 재물을 탐내면 교만과 탐욕이 패망을 부른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먼 곳을 버리고 가까운 곳을 도모하여 편안함으로 수고로움을 제압하고, 그 포악함을 주벌하고 그 침임에 응수하여 군대를 의(義)로써 격동시키면 어찌 승리하지 못할 것을 근심하겠는가. 공이 없는 것은 근심할 것이 아니다.

초 장왕(楚莊王)이 군사들을 위로하는 말을 내리자 추위에 떨던 군대가 솜을 껴입은 듯이 여겼고, 당나라 황제가 자신에게 죄를 돌리는 조서를 내리자 광망한 장수조차 감동해 눈물을 흘렸다. 임금의 이 글은 종사(宗社)를 근심한 것이요 백성을 인도한 것이니, 비록 궁벽한 지역의 우매한 지아비와 지어미라도 목 놓아 울지 않는 이 없는데, 하물며 사대부와 선비들 중에 의사(義士)와 의인(義人)들이 누군들 분개해 떨쳐 일어남이 없겠는가.

무릇 같은 사람으로서 만약 혹여 안일하게만 지낸다면 우리 선왕께서 의당 우리 선조들을 꾸짖을 것이고 우리 선조들이 반드시 우리 자손들에게 화를 내릴 것이다. 지금 먼저 임금의 유지(諭旨)를 선포하고 이어 나의 작은 진정을 진술하노라.

아, 여러 선비들이여! 각자 충성스러운 갑옷과 의로운 방패를 정비하고 장정과 효자들을 거느리고 권면하여 우리의 천지 부모와 같으신 성상을 위로하고 우리 열성조(列聖祖)께서 남기신 계책을 회복하라. 감히 나의 비루한 정성을 다하여 삼가 간절한 뜻을 진술하노라.

주석
이 소모사(李召募使) 이건영(李建永, 1839~?)으로, 1865년(고종2) 문과에 급제하여 1884년 부교리를 거쳐 특명으로 호남 소모사(湖南召募使)가 되었다.
경양(涇陽)에서 6월에 군대를 일으켜 선왕(宣王)이 중흥의 공을 세웠고, 경양은 감숙성(甘肅省) 평양현(平涼縣) 서쪽에 있던 현의 이름이다. 주(周)나라 여왕(厲王)이 포학하여 주나라 사람들이 그를 쫓아내어 체(彘) 땅에 머무르게 하였는데, 이때 험윤(玁狁)이 침입하여 경양까지 이른 사실을 가리킨다. 그 뒤 여왕을 이어 선왕(宣王)이 즉위하자 6월에 군사를 일으켜 윤길보(尹吉甫)로 하여금 가서 정벌하게 하였다. 이에 대한 내용이 『시경』 「유월(六月)」에 보인다.
귀방(鬼方)에서 3년 만에 고종(高宗)의 무용이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다. 귀방은 은(殷)·주(周) 시대에 서북쪽 변방에 있던 강한 족속을 가리키는데, 『주역』 「기제괘(旣濟卦) 구삼(九三)」에 “고종이 귀방을 정벌하여 삼 년 만에 승리하였다.[高宗, 伐鬼方, 三年克之.]”라는 말이 나온다.
스스로 정벌당할 짓을 하여 『맹자』 「이루 상」에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 업신여긴 뒤에 남이 그를 업신여기며, 집안은 반드시 스스로 훼손한 뒤에 남이 그의 집안을 훼손하며,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정벌당할 짓을 한 뒤에 남이 공격하는 것이다.[夫人必自侮然後, 人侮之, 家必自毁而後, 人毁之, 國必自伐而後, 人伐之.]”라고 한 말을 차용한 것이다.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1842~1917. 일본 메이지(明治) 때의 외교관이다. 오카야마(岡山)현 출신으로, 1871년(고종8) 내한, 한일교역 교섭에 종사했다. 그 해 9월 대리공사로 부임하고, 1880년 판리공사(辨理公使)에 승진, 인천·원산의 개항을 위해 진력했다. 1882년에 일본 세력을 부식하려다 임오군란을 만나 스스로 공사관 건물을 불태우고 서울을 탈출, 인천에 정박 중이던 영국 선박에 구조되어 귀국, 다시 일본 군함을 타고 와서 강압적인 담판으로 제물포조약을 체결하고 돌아갔다.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1833~1911. 일본의 서양 군사학자, 막부 대신, 군인, 관료, 외교관이다. 1893년(고종30) 7월에 조선 공사로 임명되어, 다음 해 6월에 조선으로 부임했다. 동학농민혁명을 계기로 한국에 침입한 일본이 지배권을 강화하려고 1894년에 일본 혼성여단(混成旅團)이 서울에 들어오고, 오토리 게이스케는 7월 3일 내정개혁 5개조를 주장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궐내에 침입하였다. 10월 11일에 공사(公使)직에서 해임되어 귀국했다.
도량(稻粱)을 탐하고 도량은 쌀과 기장을 말한다. 여기서는 사람이 이익을 탐하여 지절(志節)을 잃는 것을 비유하였다.
삼적(三賊)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일본으로 망명한 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서재필(徐載弼)을 가리킨다. 이들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오토리 게이스케의 알선으로 귀국하였다.
30년 동안 깊고 두터운 인자함을 이미 함께 입었거늘 이 글을 쓴 시기는 고종이 즉위한 지 30년이 넘은 해였다. 그래서 이러한 말을 한 것이다.
왕이 분개하는 상대를 대적하는 뜻은 이미 엄정한 역사서인 『노사(魯史)』에 기재되어 있고, 원문의 ‘노사(魯史)’는 노나라 역사라는 말로, 『춘추(春秋)』의 별칭이다.
군사를 내되 규율에 맞게 하는 시기는 지극한 이치인 『희경(羲經)』에 참으로 합당하다. 원문의 ‘희경(羲經)’은 『주역(周易)』의 별칭으로 복희(伏羲)가 처음 팔괘(八卦)를 그렸다고 하여 붙여진 이칭이다. 『주역』 「사괘(師卦) 초륙(初六)」에 “군사를 내되 규율에 맞게 함이니, 그렇지 않으면 승리하더라도 흉하다.[出師以律, 否, 臧, 凶.]”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일본의 침입을 당한 지금이야말로 군대를 일으킬 적기(適期)라는 뜻으로 이 말을 한 것이다.
허원(許遠)과 장순(張巡)은 고립된 성과 흩어진 병졸들을 거두어 사나운 호랑이의 어금니를 꺾었고 장순과 허원은 당나라 현종(玄宗) 때의 충신들로 장순은 진원(眞源)의 현령이었고 허원은 수양 태수(睢陽太守)였는데, 천보(天寶) 연간에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함께 군사를 일으켜 강회(江淮)의 보장(保障)인 수양성(睢陽城)을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황에서도 몇 개월 동안이나 안녹산 군대의 길목을 차단하여 막고 항거하다가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되자 함께 죽어 순국하였다. 이 두 사람은 같은 해에 태어나서 한날에 함께 순국하였다. 『舊唐書 卷187 張巡列傳』
문천상(文天祥)과 육수부(陸秀夫)는 위급한 상황에서 단 신으로 떨쳐 일어나 신룡(神龍)의 날개를 보호하였다. 문천상은 원(元)나라가 침입하자 호걸을 모아 근왕병(勤王兵)을 만들고 우승상(右丞相)으로 원나라에 화친을 의논하러 사신으로 갔다가 붙잡혔으나 빠져나왔으며, 그 뒤에 다시 전투에 패해 3년 동안 연경(燕京)에 붙잡혀 있다가 끝내 굴복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였다. 육수부는 송나라가 원나라에 의해 패망하자, 복주(福州)에서 익왕(益王)을 세웠으며, 익왕이 죽자 다시 위왕(衛王)을 세우고 좌승상(左丞相)이 되었는데, 원나라 군사가 송의 최후 보루(堡壘)이던 애산(厓山)을 격파하자,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는 칼을 들고 처자를 바다에 빠져 죽게 한 다음 곧 위왕을 등에 업고 함께 바다에 빠져 죽었다. 『宋史 卷418 文天祥列傳, 卷451 陸秀夫列傳』
수나라 군대가 두 번 쳐들어왔지만 위엄을 잃었고, 598년 수 문제(隋文帝)와 612년 수 양제(隋煬帝)가 고구려를 침입하였다가 패배한 사실을 가리킨다.
당나라 병사가 세 번 바다를 건너 왔지만 패전하였다. 645년 당 태종(唐太宗)과 661년, 666년 당 고종(唐高宗)이 고구려를 침입한 사실을 가리킨다.
수길(秀吉)은 군세를 잘 보았지만 끝내 한성(漢城)을 넘보지 못하였고, 수길은 풍신수길(豐臣秀吉, 1537~1598)로, 중세 일본의 무장(武將)이다. 직전신장(織田信長)이 시작한 일본 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후 해외 침략의 야심을 품고 조선을 침략해 임진왜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한 사실을 가리킨다.
청정(淸正)은 전략 전술을 잘 사용하였지만 마침내 동래(東萊)에서 곤욕을 치렀다. ‘청정’은 가등청정(加藤淸正, 1562~1611)으로, 풍신수길과 덕천가강(德川家康)을 도와 일본 전국(戰國)의 통일에 공을 세운 무장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의 선봉장으로 침략하였다. 그러나 12월에 돌연 명나라 군사의 습격을 받아 울산성에서 농성하며 고전하다 구사일생으로 귀국하였다.
평수길(平秀吉) 풍신수길(豐臣秀吉)을 가리킨다. 풍신수길이 어렸을 때, 평신장(平信長)이 그를 양아들로 삼아 성을 평씨(平氏)로 고쳐 길렀다. 평신장을 이어 관백이 되어서는 풍신(豐臣)이라는 성을 썼다.
여산(廬山)의 큰 골짜기를 어찌 창고의 물건으로 채울 수 있겠으며, 한 애제(漢哀帝) 4년에 양웅(揚雄)이 상서(上書)하여 흉노를 치는 데에 국력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전대에 많은 인명을 잃고 재물을 소비하면서 흉노를 친 것은 한번 수고하지 않으면 영구히 편안할 수 없고 잠시 재물을 소비하지 않으면 영구히 편안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백만의 군사를 범의 아가리로 몰았고, 왕실 창고의 재물을 여산의 골짜기에 쏟아부으면서도 후회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通鑑節要 卷14 漢紀』
『군참(軍讖)』 『황석공삼략(黃石公三略)』에서 인용한 고대의 병법서(兵法書)인데, 작자가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다.
『통서(通書)』 중국 송나라 주돈이(周敦頤)가 지은 도덕을 역설한 책이다. 수양론, 윤리론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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