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년(1894, 고종31)의 창의는 비록 형세로는 적절한 때가 아니지만, 신하의 의리상 왕이 분개하는 상대를 대적하는 분노가 있어야 하기에 먼저 여산(礪山) 향교로부터 각 읍의 유생들에게 통고하였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안타까운 일이로다.-
다음과 같이 말하노라. 공부자(孔夫子)께서 가르침을 내리시기를, “지사(志士)와 인인(仁人)은 삶을 구해서 인을 해치는 경우는 없고 자신을 희생하여 인을 이루는 경우는 있다.”라고 하셨고, 맹부자(孟夫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삶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의리도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두 가지를 동시에 얻을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라고 하셨다. 무릇 인(仁)은 어버이를 섬기는 것을 우선하고, 의(義)는 임금을 섬기는 것을 주로 하는데, 인과 의는 같은 이치이니 임금과 어버이도 한 몸인 것이다. 인에 뜻을 두고서 삶을 구하는 마음을 둔다면 어버이를 섬기는 인이 될 수 없는데, 어버이를 섬기지 못하는 자가 어찌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의를 행하려 하면서 삶을 취하는 마음을 둔다면 임금을 섬기는 의가 될 수 없는데, 임금을 섬기지 못하는 자가 어찌 어버이를 섬길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차라리 자신의 몸을 희생할지언정 인을 해쳐선 안 되고, 차라리 자기의 삶을 버릴지언정 의를 뒤로해서는 안 되니, 이것이 성현이 후학들을 권면하신 이유이고, 후학들이 임금과 어버이 섬기는 것을 급선무로 해야 하는 이유이다.
아, 우리나라는 인과 의로 나라를 세워서 열성조(列聖朝)의 지극한 인과 극진한 의가 쌓이고 두루 미쳐서 윗사람은 자식처럼 아랫사람들을 사랑하고 아랫사람들은 어버이처럼 윗사람을 친애하였다. 이 때문에 나라에 어려움이 있으면 선비들이 모두 자신을 희생하여 인을 이루었고, 나라에 위급한 일이 있으면 사람들이 모두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한 것이니, 진실로 덕을 좋아하는 천성에서 그러한 것이지 인과 의의 이름을 빌린 속임수와 무력이 아니다.
저 임진년(1592, 선조25)과 계사년(1593)에 왜적들이 침범하고부터 음모와 독계(毒計)를 펼치고 승냥이 같은 속내를 마음껏 드러내어 우리 조정을 크게 놀라게 하고 우리나라를 어지럽혔다. 그리하여 백성들의 자애로운 아버지는 파천(播遷, 임금이 옮기는 것)하는 어려움을 겪었고, 임금의 사랑스러운 자식들은 길에 뇌를 쏟고 몸이 문드러졌는데, 우리 선조들이 비로 목욕하고 바람으로 빗질하며 창을 베고 갑옷을 깔고 지내면서 마음을 다해 임금을 보좌하고 힘을 합해 나라를 회복하였으니 바로 인을 해치지 않고 의를 버리지 않아서 살아서는 임금과 어버이에게 보은하였고 죽어서는 자손들에게 경계한 것이다. 저들이 끝내 토벌된 것은 우리가 먼저 공격을 가해서가 아니라 저들이 스스로 정벌당할 짓을 함으로 비롯된 것이니 지금에 이르기까지 300여 년이 흘렀다.
저 이른바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우리나라 비적(匪賊)들의 난을 엿보고서 흙먼지를 날리며 바다를 건너와 우리의 성벽을 넘고 우리의 궁궐을 침범하여 우리의 군부를 위협하고 우리의 신하들을 겁박하면서 ‘개화(開化)’라고 칭탁하였다. 대저 우리나라는 저들에 대해 장차 ‘우호적인 나라’인가? 아니면 또한 ‘원수의 나라’가 되는가? 만약 이들이 ‘우호적인 나라’라면 ‘개화’라는 두 글자를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과연 이들이 ‘원수의 나라’라면 어찌 이처럼 ‘개화’에 한결같은 마음이겠는가. 다만 그들의 교활한 계책을 시행하여 오랑캐의 문물로 화하(華夏)를 변화시키려는 뜻에 불과한 것이다.
대저 양나라도 중국이고 진나라도 중국인데, 노중련이 오히려 그들의 예의 없음을 배척하여 백성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니, 서주(西周)의 천하가 한스럽게도 천백년을 못 갔는데 노중련이 대의(大義)를 부지하고 주나라 왕실을 높였다. 하물며 우리가 왜적에 있어서 확연하게 화이(華夷)로 구별되는데 그들의 제도를 따라 그들의 백성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전날의 원한에 생각이 미치니 남산의 대나무로도 다 쓸 수 없고 동해의 물결로도 다 씻어내기 어려운데, 대저 어찌 몇몇의 신원연이 그 병사를 물리쳐 이 나라를 편안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소모사(召募使)가 남쪽으로 내려와 성지(聖旨)를 선포하였다. 종사(宗社)의 근심은 온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절박한 것이니, 비록 늙고 병든 백성들이라도 격분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하물며 효제(孝弟)를 행하는 젊은이들이 부모의 근심에 대해 이처럼 무관심할 수 있는가.
『군참(軍讖)』에 이르기를, “적이 기세가 등등하여 능멸하면 기다리고, 적이 패악한 짓을 하면 의롭게 한다.”라고 하였다. 저들이 우리의 약함을 능멸하면 우리는 기다려 대응하는 것은 약함으로 강함을 제압하는 방법이고, 저들이 우리의 부드러움에 패악한 짓을 하면 우리는 의리로써 바르게 하는 것은 부드러움으로 굳셈을 제압하는 방법이다. 의리가 의지하는 바에 병사들의 힘이 날로 새로워지니 바람이 몰아치듯 싸우고 강물이 터지듯 공격한다면, 저들이 강한데 우리가 아주 약하고 너무 부드러움을 보인다고 어찌 걱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우리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스스로 돌이켜서 정직하다면 비록 천 만 명의 사람이 있더라도 내가 가서 대적하겠다.”라고 하였으니, 군대를 의로써 일으키면 누가 ‘정직하지 않다’라고 하겠는가. 무릇 우리는 공자의 학문을 배운 사람이니 누군들 선왕의 유민(遺民)이 아니겠으며 또한 누군들 조상의 자손들이 아니겠는가. 시정(市井)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인신(人臣)이고 초야에 있는 사람들 중에 영웅이 없지 않으니, 우리 여러 현인들은 각자 충성스러운 갑옷과 의로운 방패를 정비하고 날을 정해 온 힘을 다해 떨쳐 일어나 우리 선왕과 선조들이 나랏일에 부지런히 했던 도리를 따라서, 천지 부모와 같으신 임금의 애타는 근심을 보위하고 우리 헌장(憲章)과 제도에 빛나는 문명의 나라를 창성하게 하라. 그리하여 우리가 배운 인을 이루고 의를 취하는 뜻을 어김이 없게 한다면 천만다행일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삼가 각 읍의 향교에 통고함.
숭정후(崇禎後) 갑오년 8월 일에 발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