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연락처
기념재단
TEL. 063-530-9400
박물관
TEL. 063-530-9405
기념관
TEL. 063-530-9451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사료 아카이브 로고

SITEMAP 전체메뉴

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동학농민혁명 관련 고문서 東學農民革命 古文書
일러두기

품목(稟目)

다음과 같이 보고합니다. 삼가 아룁니다. 병을 치료하는 자가 한때의 어지러움을 꺼려하여 10금의 좋은 약제(藥劑)를 버린다면 병이 반드시 고질(痼疾)이 되고, 거문고를 연주하는 자가 여러 줄들이 조율되 지 않은 것을 보고 거문고의 줄을 고쳐 매는 기러기발을 바꾸지 않는다면 거문고가 반드시 조율되지 않을 것입니다. 어째서이겠습니까? 본읍(本邑)의 경제적 형편과 민심이 고질이 된 병과 조율되지 않은 거문고와 같은데, 몇 년째 관원이 비어 있어서 온갖 폐단이 더 생겨나 겸관(兼官)겸관(兼官)의 독촉이 서로 객제(客劑)생수(生手)로 도드라지는 효과가 없지는 않았지만, 원래는 일관되게 치료하고 조율하는 것만 못합니다. 읍의 17개의 폐단이 마침내 백성들의 소요를 불러와서 형세가 장차 뿌리가 뽑힐 지경이니, 이완과 긴장을 조절한 이후에 소생하고 조화로워지는 조짐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밝으신 사또께서 이 땅에 임금의 분부를 받들어서 장조(張趙)

처럼 청렴하고 현명하다고 부임하기 전에 소문이 퍼졌고 소두(召杜)의 어루만지고 보살피는 은택이 공무를 살핀 후에 베풀어졌으니, 문창성(文昌星)이 돌아오고 합포(合浦)의 진주가 귀환했다고 말할 만합니다.

아, 본읍에서 백성들의 소요가 일어난 것은 비록 원통하고 억울함에서 연유한 것이지만, 또한 백성들을 격동시켜서 그러한 것이니, 속담에 이른바 ‘울고 싶은데 뺨 때린 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정을 살펴 보면 딱하지만, 그 행위를 따져 보면 어리석은 난류(亂類)의 소치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백성들의 소요가 일어날 즈음에 유언비어를 퍼뜨려 민심을 선동하여 본 고장의 사류(士類)들이 모두 당고(黨錮)의 화에 빠져 영읍(營邑)에서 죄를 헤아려 받았으니, 어찌 감히 죄 없이 수감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만, 실정을 미루어 살펴보면 또한 화에 연루된 일로 인한 것입니다.

저희들이 참으로 응당 관을 버리고 자취를 감추고서 다시는 발걸음을 내어 저희 읍에 관한 일로 모이는 자리에 참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합하(閤下)께서 이 피폐한 고을에서 정사(政事)를 잘하셔서 한 달도 채 못 되어 관의 업무에 익숙해져서 소 잡는 칼로 닭 잡듯 하여 칼을 대는 대로 풀리지 않음이 없었고, 혁파할 만한 것은 혁파하고 바로잡을 만한 것은 바로잡아서 간사하고 교활한 자들이 등용되지 못하였고 억눌렸던 현인(賢人)들이 자신의 뜻을 펼 수 있었으니, 추위 후의 따뜻한 봄 햇살이 거의 그늘진 벼랑을 비추었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들 이 덕화(德化)가 새로워지는 것을 보고자 하여 이미 꽂아진 지팡이를 다시 붙잡고 매헌(梅軒)의 아래에서 목을 빼고 와서 듣노니, 위 사항의 폐단들을 완문(完文)과 절목(節目)으로 만들어 영읍(營邑)이 성첩(成帖)하여 영구히 준행해야 할 법규로 삼고, 백성에게서 거두는 허다한 공용(公用)은 필요와 불필요, 완급(緩急)을 참작해서 긴급한 것은 헤아려 걷고 긴급하지 않은 것은 물리치며 정지할 만한 것은 정지하면 흉년이든 피폐한 이 고을의 민고(民苦)를 크게 구휼하는 일이 될 것입 니다. 백성들의 사정이 비록 곤란하지만 봉공(奉公)의 도리상 응당 써야 할 것은 부득이하게 백성에게 거두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 중에 가장 급한 것을 모아 보니 그 수가 7,880냥 3전에 이르렀는데, 민원(民願)에 따라 집집마다 분배하는 것이 이 또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편리하고 마땅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에 감히 한목소리로 성주(城主)께 아룁니다.

갑오년(1894, 고종31) 정월 일

후(後)

노석락(盧奭洛), 김사백(金思栢), 김호원(金鎬源), 정재봉(鄭在鳳), 박창환(朴昌煥), 조갑린(曺甲麟), 김우원(金禹源), 이병림(李炳林), 김기원(金基元), 명처홍(明處弘), 정석규(鄭錫奎), 김우정(金禹鼎), 신종억(辛鐘億), 권달원(權達元), 송석기(宋錫基), 황한규(黃漢奎), 최상모(崔尙模), 변치원(卞致元), 팽용오(彭龍伍) 등.

[제사]

필요와 불필요, 완급, 다소를 막론하고 ‘렴(斂, 거두어들임)’이라는 한 글자에서 등에 소름이 돋고 기가 움츠러드는 줄도 몰랐다. 비록 풍년이 들어 즐거운 해를 만나더라도 허름한 집에 사는 잔약한 백성들이 오히려 위로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 처자식을 기를 겨를이 없는데 하물며 이렇게 많은 돈을 더하는 것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마치 내가 아픈 듯하되 이미 부득이한 일에서 나왔고 이렇게 온 읍에서 함께하는 의론이 있기까지 하니, 지금은 비록 시행을 허락하지만 근심걱정이 그치지 않을 일.

17일 마포(馬浦)에서

행사(行使) (서압)

추신. 완문과 절목을 한번 두루 상세히 살핀 후 마땅한 것을 따라 시행을 허락하겠다.

주석
겸관(兼官) 조선 시대에 한 고을 원의 자리가 비었을 때 이웃 고을 원이 임시로 겸하여 그 사무를 맡아 보는 것을 말한다. 겸직(兼職)이라고도 한다.
객제(客劑) 낯선 약제. 좀 엉뚱하다는 뜻이다.
생수(生手) 생소한 수법. 서툰 방법을 뜻한다.
이완과 긴장을 조절 일을 조화롭게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예기』 「잡기 하(雜記下)」에 “활줄을 당기기만 하고 풀어 줄 줄을 모르면, 문왕이나 무왕이라도 어떻게 다스릴 수가 없다. 또 풀어 주기만 하고 팽팽하게 당기지 않는 것은 문왕과 무왕이 하지 않는 바이니, 한 번 당겼다가 한 번 풀어 주는 것이 바로 문왕과 무왕의 도이다.[張而不弛, 文武弗能也. 弛而不張, 文武弗爲也. 一張一弛, 文武之道也.]”라고 하였다.
장조(張趙) 한(漢)나라 때 지방관으로 명망이 높았던 장창(張敞)과 조광한(趙廣漢)을 합칭한 말이다. 이들은 일찍이 경조윤(京兆尹)을 맡아 치적이 탁월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앞에는 조장이 있고, 뒤에는 삼왕이 있네[前有趙張, 後有三王.]”라고 노래 불렀다고 한다. 『漢書 卷76 趙尹韓張兩王傳』
소두(召杜) 한나라 때 전후로 남양 태수(南陽太守)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던 소신신(召信臣)과 두시(杜詩)를 합칭한 말로, 당시 백성들은 이들을 칭송하여 “전에는 소씨 아버지가 있었는데 뒤에는 두씨 어머니가 있었다.[前有召父, 後有杜母.]”라고 하였다.
공무를 살핀 원문의 ‘시전(視篆)’은 관리가 공무를 보고 도장을 찍는다는 뜻으로 수령이 공무를 처리함을 지칭한다. ‘전(篆)’은 전자(篆字)인데 관청의 도장은 전자로 새기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문창성(文昌星)이 돌아오고 ‘문창성’은 문운(文運)을 주관하는 별의 이름으로, 문재(文才)가 높은 사람을 비유한다. 여기서는 문재가 높은 수령이 부임하여 문운이 부흥하였다는 의미로 쓰였다.
합포(合浦)의 진주가 귀환했다고 말할 만합니다. 『후한서(後漢書)』 「순리(循吏) 맹상열전(孟嘗列傳)」 에, “합포군(合浦郡)에서는 곡식 대신 바다에서 진주(眞珠)만 생산되므로 그것을 교지(交趾)와 통상하여 식량을 수입하였다. 그런데 앞서 합포군에 부임한 태수들이 탐욕을 부려 진주를 마구 채취하는 바람에, 진주가 마침내 교지로 차츰 옮아가 버려 가난한 사람들이 길가에서 굶어 죽게 되었으므로 마침 합포군에 부임해 온 맹상(孟嘗)이 전날의 폐단을 개혁하고 백성들의 생업을 영위하도록 하자, 1년도 채 못 되어 교지로 옮아갔던 진주들이 다시 합포군으로 되돌아왔다.”라고 한 고사를 차용한 것이다.
어찌 감히 죄 없이 수감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만, 『논어』 「공야장(公冶長)」에서 공자가 공야장에 대해 “사위로 삼을 만하다. 비록 포승에 묶여 수감되었으나 그의 죄가 아니었다.[公冶長, 可妻也. 雖在縲絏之中, 非其罪也.]”라고 한 말을 차용한 것이다.
정사(政事)를 잘하셔서 원문의 ‘내모(來暮)’는 ‘내하모(來何暮)’의 준말인데, 어찌 늦게 왔느냐의 의미로 고을 수령이 정사를 잘하자 백성들이 왜 늦게 왔느냐고 노래를 불렀다는 뜻이다. 『후한서(後漢書)』 「염범열전(廉范列傳)」에, “성도(城都)에 인물이 풍성하여 고을이 비좁았으므로 백성들로 하여금 야간에 일을 못하게 하고 불을 금지하였다. 그런데 서로 은폐한 바람에 날마다 불이 났다. 염범이 종전의 법을 삭제하고 물만 비축하도록 하니, 백성들이 편리하게 여겨 노래하기를, ‘염숙도는 왜 그리 늦게 왔는가? 불을 금하지 않으니, 백성이 편안히 일할 수 있네. 평생 동안 저고리가 없더니, 지금 바지 다섯 벌이 있다네.[廉叔度, 來何暮? 不禁火, 民安作. 平生無襦, 今五袴.]’”라고 한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칼을 대는 대로 풀리지 않음이 없었고, 어떤 문제든지 손쉽게 해결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진서(晉書)』 권34 「두예열전(杜預列傳)」에 “대나무를 자를 때 몇 개의 마디만 지나가면 모두 칼을 들이대는 대로 곧장 쪼개진다.[破竹, 數節之後 皆迎刃而解.]”라는 말이 있다.
이미 꽂아진 지팡이를 다시 붙잡고 이미 꽂아진 지팡이라는 것은 은거하는 것을 표현한 말로,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좋은 철을 생각하여 외로이 가고 혹은 지팡이를 꽂아 놓고 김매노라.[懷良辰以孤往, 或植杖而耘耔.]”라고 한 것에서 나온 말이다. 이 문장은 덕화(德化)가 새로워지는 것을 보고자 하여 은거를 깨고 나온다는 뜻이다.
위로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 처자식을 기를 겨를이 없는데 『맹자』 「양혜왕 상(梁惠王上)」에 “현명한 군주는 백성의 생업을 제정해 주되 반드시 위로는 부모를 섬길 만하고 아래로는 처자식을 기를 만하여 풍년에는 종신토록 배부르고, 흉년에는 사망에서 면하게 하나니, 그런 뒤에야 백성 들을 몰아서 선(善)에 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명령을 따르기가 쉬운 것입니다.[明君制民之産, 必使仰足以事父母, 俯足以畜妻子, 樂歲終身飽, 凶年免於死亡, 然後驅而之善, 故民之從之也輕.]”라고 한 말을 차용한 것이다.
이 페이지에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도를 평가해 주세요. 여러분의 의견을 반영하는 재단이 되겠습니다.

56149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문화체육관광부 전라북도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