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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동학농민혁명 관련 고문서 東學農民革命 古文書
일러두기

전라도 고부민란의 시작점[全羅道古阜民亂始初]

고부 군수(古阜郡守) 조병갑(趙秉甲)이 국령(國令)을 칭탁해 백성들을 불러 모아 명을 내리기를, “크게 백성을 모아 구막보(九幕洑, 만석 보)를 쌓아라.” 하니 백성들이 모두 명령을 따라 이 보를 쌓았다. 전답이 수천 석이었는데 각 마지기마다 조세 5두(斗)를 거두어 수천 석이 된 것이다. 몰래 전운사(轉運使, 조필영)와 나눠 먹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원망이 자자했다. 그들이 말하기를, “비록 국세[王稅]를 내는 논이라도 기경(起耕)한 지 삼 년 뒤에 세포(稅布)를 바치는 법인데, 올해 보를 쌓게 하고 조세 5두를 거두어 가는 것은 매우 억울한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온 읍(邑)의 사람들이 원망하는 소리로 상소하였는데도 일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아 민란이 일어난 것인데 소장의 첫머리에 이름을 올린 사람[狀頭]이 전녹두(全綠斗)이다. 이 사람은 동학도에 도통해 조화가 끝이 없기 때문에 장두(狀頭)가 된 것이다. 우리 군의 군수[本倅] 병갑이 한양으로 도주하였다. 이 일이 보고되자 임금께서 조병갑을 종루(鐘樓) 거리에서 결장(決杖)하고 화침(火針)을 놓았다. 광주 목사(廣州牧使) 박원갑(朴元甲)을 패초(牌招)하여 고부 군수에 제수(除授)할 것을 명하였다.

부임한 지 3일 뒤에 모든 백성들을 불러 모아 말하기를, “너희들이 억울해하는 점을 내 응당 다 풀어 줄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 하기에 농업으로 돌아갔다. 조정에서 고부군의 일을 자세히 알고자 해서 장흥 부사(長興府使, 이용태(李容泰))를 고부군 안핵사(古阜郡按覈使)로 보냈다. 전라 감영(全羅監營)에 도착해 감사(監使, 使는 司의 오류)와 사건에 대해 말을 주고받은 뒤 고부민란을 일으키고 선동했던 8인을 압송하여 엄히 주리를 틀고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전녹두가 몰래 동학도 수천 명을 모아 전라 감영에 이르니 감영의 영사(營使)가 앞에 닥친 일을 두려워하여 풀어 주었다.

전녹두가 동학도 수천 명을 거느리고 3월 초에 부안읍에 들어가니 부안 수령이 잠시 피신하였다. 그러자 이상의 동학도들이 텅 빈 이 기회를 틈타 병장기를 수탈한 뒤 연이어 옥구(玉溝)·태안(泰安)·고부 등 읍의 병장기를 탈취하고서 고부군 뒤편 두등산(頭嶝山)에 진을 쳤다. 전라도 관찰사가 이 일을 듣고 상장군(上將軍) 이재섭(李再燮)과 부장군(副將軍) 송사천(宋泗川)에게 위임하였다. 사천은 전라 좌우도(全羅左右道) 보부상[左右商]의 도반수(都班首)이다. 임소(任所)의 사람 수만 명을 불러와 일시에 전라 감영의 병장기로 무장하고서 두등산의 앞에 있는 낮은 산[案山]에 도달해 녹두의 진영을 살펴보니 군중의 깃발과 검극(劍戟)이 눈서리처럼 엄하였다.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수차례 싸움을 걸었는데 날이 이미 저물기 시작했다. 적진에 격문을 보내니, “상장군 정일창(鄭一昌)의 나이는 14세이고, 부장 전녹두의 나이는 30세이며, 말장(末將) 이일해(李一解)의 나이는 30세이고, 모사(謀士) 노성범(盧聖凡)의 나이는 40세이다.”라고 격문에 답을 해 왔다. 송 사천이 군정(軍丁)을 거느리고 두등산에 오르니 때가 황혼이 되었 다. 정일창이 장검으로 지휘하여 전투를 벌였는데, 송 사천이 적의 군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이재섭과 도망치니 대군(大軍) 가운데 죽은 사람을 이루 다 셀 수 없었다. 적장(賊將)이 전라 감영의 병장기를 빼앗으니 7개 고을의 병장기가 탈취당했다. 그 가운데 몰래 숨은 병졸이 요행히 몸을 피해 눈을 들어 살펴보니, 죽은 사람이 산처럼 쌓여 있고 흐르는 피가 천(川)을 이루고 있었다. 상장군 이재섭이 돌아와 군졸(軍卒)을 점고(點考)해 보니 죽은 사람이 914명이었다.

일이 임금께 보고되자 대대적으로 경군(京軍)을 보냈다. 상장군 홍재희(洪在熙), 부장 이 대인(李大人) 말장 김 대인(金大人)이 병대(兵隊) 500명과 청나라 병사 300명과 대포 12문[車]을 거느리고 전라 감영에 이르렀다. 판관(判官)이 수항(藪港)으로 나와 대군의 행차를 영접했다. 혹자가 이르기를 “4월 초10일에 고부군으로 떠났다.” 하였다.

완주 감영에서 기록하다.

주석
구막보(九幕洑, 만석 보) 원문에는 ‘구(九)’ 자가 누락되어 있으나, 『경상도고성부총쇄록(慶尙道固城府叢鎻錄)』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광주 목사(廣州牧使) 박원갑(朴元甲)을 패초(牌招) 패초는 조선 시대 왕이 필요한 신하의 입시(入侍)를 명할 때 패를 사용하던 제도로, 패초를 받은 신하는 어떠한 어려움과 장애가 있어도 지정된 시간까지 입시하지 않으면 중벌에 처해졌다. 여기 박원갑은 박원명의 오기이고 광주 목사(廣州牧使)는 광주 목사(光州牧使)의 오기이다. 경기도 광주는 유수(留守)를 두었다.
옥구(玉溝)·태안(泰安)·고부 등 읍의 병장기를 탈취하고서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당시 황토현전투 때 옥구와 태안에 진출하지 않았다. 내용의 오류이다.
상장군(上將軍) 이재섭(李再燮)과 부장군(副將軍) 송사천(宋泗川)에게 위임하였다. 당시 영장 이경호 등과 보수상을 파견했는데 이재섭, 송사천 등의 파견 사실은 오류이다.
도반수(都班首) 조선 후기에 보부상 조합에서 조를 거느리던 우두머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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