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과 같이 면(面)에서 첩보합니다. 일전에 대흥(大興) 지역 서쪽 세 곳에 영리한 후인(候人)을 보내어 동정을 자세히 살펴보니, 비단 그 읍의 유회소(儒會所)에서 장차 와서 도륙할 근심이 있을 뿐만이 아니라, 경군(京軍) 몇십 명이 대흥읍에 주둔하면서 사방으로 나와 동학도를 잡는 터라, 엊그제 밤에는 마침내 대흥의 동해동(東海洞)에 들어가 6, 7명을 잡아갔고, 어제 다시 들어가 또 수 명을 잡아갔으며, 방향을 돌려 동면(東面)으로 들어가 또 수 명을 잡아갔습니다. 이 곳들은 모두 북하면(北下面)과 경계가 닿아 있는 곳이기 때문에 매우 두려워하던 중에 반드시 북하면을 도륙하겠다고 운운하는 말을 또 들었습니다. 경군에 대해서는 비록 그들이 공문이 없더라도 저희들이 사력(私力)으로 막기가 어려우니, 이 일을 장차 어떻게 조처해야겠습니까.
또 “추동(秋洞)의 조복순(趙卜順)은 이미 대흥에서 잡았다가 놓친 죄인이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를 대신 잡아 장차 그놈을 잡고야 말겠다.”라고 운운하여 금명간(今明間)에 장차 추동에 들어와 도륙할 우려가 있기에, 추동의 백성들이 화를 면할 계책으로 조복순의 종적을 쫓아 공주(公州) 지역에 가서 찾아본 뒤 돌아오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이 본읍(本邑)의 군막소(軍幕所)를 지났는데, 해당 군막소에서 일의 내막을 알지 못하여 말하기를 “공주의 유생들이 무리를 모아 와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기까지 하니, 급히 관아에 보고하였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매우 두려워 연유를 서면으로 보고합니다.
갑오년(1894, 고종31) 11월 13일 묘시(卯時)
북하면장 홍순철(洪淳喆)
[제사]
인근 유생들이 법령을 허위로 전한 것도 일찍이 개탄했는데, 지금 또 세력을 믿은 병정들을 하나하나 조사하라는 임무를 받았기에, 막 명령을 내려 신칙(申飭)하였다. 이미 초토영(招討營) 관문(關文) 내용 내에 “공문이 있지 않으면 잡아 호송하는 것을 불허한다.”라는 내용이 있으니, 그렇다면 동학도를 잡는다는 핑계로 초토영에서 신칙한 것을 따르지 않는 자들은 바로 일 만들기를 좋아하여 난리를 일으키는 부 류이니, 또한 교화하지 못할 적이다. 이른바 두목과 영졸(領卒)들을 지명하여 보고해서 혹여도 전처럼 침범해 시끄럽게 만드는 일이 없게 하여 무고한 백성들을 안정시키도록 하라.
13일
관(官) (서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