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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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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관련 고문서 東學農民革命 古文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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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오면 의거소의 좌목[東五面義擧所座目]

선비는 위태롭고 어지러운 때를 만나 적을 토벌할 뜻은 있지만, 적을 토벌할 직무가 없는 자들이니, 혹 창의(倡義)를 자임하는 경우가 있으면 매번 협심하지 못하는 것을 근심한다. 지금 호남의 몇 개 주에서 의거(義擧)라고 이름한 자들을 예로 보자면 처음엔 마음속에서 맹세하여 거사를 함께 하지 않음이 없으나 그 끝은 마음을 달리하여 거사를 망치지 않는 경우가 드무니, 이는 경계로 삼을 만하다.

아! 비적들의 근심이 작년에 극심했다. 여러 읍들이 난리가 나고 백성들은 학대를 받는데, 비적들은 올빼미가 날개를 편 것처럼 기세등등하고 고슴도치의 털처럼 많이 모여서 달가운 마음으로 침범하니, 나주가 위기일발의 상황이었다. 나는 재주도 없이 외람되게 수령의 자리에 있으면서 의리의 마음이 간절하고 분노가 끓어올라 사람들을 독려하려는 마음을 가진 채 몇 달 동안 나주를 지켜 한결같은 법도로 적을 막고 토벌하되, 서리(書吏)와 군교(軍校) 중의 장령(將領)들에게 힘입어 우리 군민(軍民)들과 함께 협심하여 완전히 지켰다. 다만 나주 지역을 돌아보면 유생들이 침체되어 고개를 움츠리고 기가 죽어 모두 달아나 숨을 생각을 품고 있었으니, 비록 혹 의병을 규합하는 데에 뜻을 두더라도 또한 힘이 미치지 못하는 탄식이 있었다. 그리하여 한창 이것을 근심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비음면(非音面)의 대아(大雅) 유기연(柳紀淵)이 고관의 이름난 후손으로서 일찍부터 재주와 뜻을 품고서 개연히 의거하는 것을 자기 임무로 삼았다. 이에 동지들에게 앞장서 의론을 일으켜서 동오면(東五面)에 통문을 보내니, 사람들이 모두 메아리처럼 호응해 500명의 의병을 모으게 되어 동남쪽의 적들을 막았는데, 내가 이 말을 듣고서 훌륭하게 여겨 특별히 도통(都統)이라는 이름으로 표창하였다. 비적 무리가 남쪽으로 내려가자 자신이 한 부대를 담당하겠다고 극력 청하여 장흥의 적들과 싸워서 크게 승리하였다. 의병을 일으키고 나서부터 이후로 모두 계산해 보면 수괴(首魁)를 잡아 귀를 바친 것이 54명이었고, 회유해 귀화시킨 것이 86명이었고, 물자를 거둔 것은 헤아릴 수가 없었다. 뒤이어 관군과 함께 영암(靈巖)에 구원하러 달려가 합력해 굳게 지켜서 도둑질당하고 함락당하는 것을 면하게 하고서 돌아오니, 고을의 동남쪽에서 그를 중하게 여겼다. 이로부터 주변 지역에서 이런 소식을 듣고 충의를 바쳐 의병을 일으키니, 남쪽으로는 곡강(曲江)·상곡(上谷)·욱곡(郁谷)·,전왕(田旺) 서쪽으로는 수곡(水谷)·시랑(侍郞), 북쪽으로는 삼가(三加)·적량(赤良), 서남쪽으로는 삼향(三鄕)이 있었다. 이들이 모두 목숨 바쳐 힘을 다하니, 이 덕에 적의 침입 경보가 조금씩 사라졌다.

만약 이 일의 시발점을 논한다면 맨 먼저 동오면에서 시작하였으니, 그 공이 어찌 작겠는가. 그가 처음 의거할 때 세웠던 법규를 가져다 보면 엄하면서도 가혹하지 않고 온화하면서도 어지럽지 않아 정연히 법도가 있고 가지런히 질서가 있어 이로써 성공을 이루었으니, 이는 대아 유기연이 실로 주관하여 힘쓴 것이었다. 그는 벼슬하지 않은 유자(儒者)로 평소 군대의 일을 익히지 못했지만, 다만 충의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분개가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처음에 협심하여 일어나고 끝에도 협심하여 성공해서 적을 토벌할 임무가 없는데도 마침내 적을 다스리는 중임을 자임할 수 있었으니, 여러 읍에서 대충 의거를 행하는 자들이 아침에 모였다가 저녁에 헤어져 이름만 있고 실상은 없는 것에 비교해 보면 어찌 천양지차(天壤之差)일 뿐이겠는가. 그의 동지들을 낱낱이 보면 유병식(柳秉軾), 민주식(閔周植), 전치현(全致鉉), 유석룡(柳錫龍), 민영표(閔泳表), 유병문(柳秉文), 이풍식(李豊植), 유한연(柳翰淵), 정재현(鄭在鉉), 유석위(柳錫渭), 전영희(全泳禧), 박제운(朴齊雲), 이희로(李凞魯), 민인원(閔仁源), 유경화(柳敬化)는 선비로서 모의에 참여하였고, 나수식(羅壽植), 유병섭(柳秉涉), 이길로(李佶魯), 김용현(金龍鉉), 박노선(朴魯宣)은 집강(執綱)으로서 통솔하였고, 이영삼(李永三), 이경인(李景仁)은 포군을 통솔해 앞장섰으며, 그 아래로는 나금룡(羅錦龍), 나성일(羅成日), 김관백(金寬伯), 최성빈(崔成彬), 황극서(黃克瑞), 유치양(兪致陽)이 집사(執事)로서 명을 전달하였고, 전권삼(全權三), 황정현(黃政鉉), 최인범(崔仁範), 유권범(兪權範), 김명오(金明五)가 나뉘어 통군(統軍)이 되어 도왔다. 이 33명이 모두 도통수(都統首)에게 명을 들어 500명의 의병에까지 이르렀으니, 성명을 하나하나 낱낱이 나열할 수는 없지만 또한 모두 마음을 하나로 한 자들이었다.

돌아보건대, 나는 변변찮으면서 외람되게 초토사(招討使)에 임명한다는 명을 받았는데, 그들이 군공이 있는 것을 보고도 끝내 표창해 보고 하지 못하여 포상의 은전을 받게 하지 못했기에 이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또 세상에 드문 훌륭한 명성이 민멸되어 전해지지 못하는 것을 애석하게 생각한다. 다만 본소(本所)에서 의병을 일으킨 전말을 모아 기록해 좌목(座目)을 만들어서 그들을 표창한다는 말을 듣고 한마디 말로 서문을 지어 훗날 만에 하나라도 채록해 드러내 주기를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을미년(1895, 고종32) 늦봄 하순에 호남 초토사(湖南招討使) 지주(知州, 수령을 뜻함) 민종렬(閔種烈)은 쓴다.

주석
비음면(非音面)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 신북면 지역이다.
욱곡(郁谷)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 왕곡면 지역이다.
전왕(田旺)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 왕곡면 지역이다.
수곡(水谷)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수각마을 지역이다.
시랑(侍郞)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복암리 낭동마을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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