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종대왕(哲宗大王) 말년. 경주(慶州) 사람 최복술(崔福述)이라는 자가 부정한 도(道)로 무리를 모아 ‘동학(東學)’이라 이름하고 세상을 어지럽히며 백성들을 속이자, 임금께서 본도(本道)로 압송하라고 명하여 조사해 법으로 다스렸다. 계사년(1893, 고종30) 4월에 이르러, 동학의 무리인 최제우(崔濟愚) 등이 ‘유생들의 상소[儒疏]’라고 칭하면서 소장(疏章)을 받들고 궐문에서 부르짖으며 복술의 원통함을 풀어 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사대부와 선비들이 여러 차례 소장을 올려 최제우를 참형에 처할 것을 청하자 그 무리들이 듣고서 놀라 달아났고, 이어 양호(兩湖) 사이에서 무리를 모아 주둔하면서 성을 쌓고 깃발을 세웠는데, 멀고 가까운 곳의 비적 무리들이 이에 호응하여 그 세력이 점차 커졌다. 임금께서 이에 명하시어 어윤중(魚允中)을 선무사(宣撫使)로 삼아 급히 가서 선무하게 하고 이어 윤음(綸音)을 내려 어윤중에게 선유(宣諭)하게 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왕은 이르노라. 아! 너희 백성들아. 모두 나 한 사람이 해 주는 말을 듣도록 하라. 우리 열성조(列聖朝)의 책략과 가르침이 밝게 드러나 떳떳한 도리를 밝혀 사람이 지켜야 할 규범을 세우고 정학(正學, 유학(儒學))을 숭상하여 나라의 풍속을 인도하니 사농공상(士農工商)이 각각 자신의 업(業)을 편안히 여긴 지가 지금 500여 년이 되었다. 그런데 세도가 떨어지고 세속이 타락해 지향하는 것이 각각 달라져서 허망하고 거짓을 일삼는 무리들의 저주(咀呪)의 술법이 우리나라를 속이고 우리의 여러 백성들을 잘못되게 만들어 차츰차츰 술에 취한 듯 엎어진 듯하게 만들어 깨우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더구나 또 너희들의 이른바 ‘학(學)’이라는 것은, 스스로는 ‘하늘을 공경한다.’, ‘하늘을 존숭한다.’라고 하지만 너희들이 칭하는 공경과 존숭은 하늘을 업신여기고 하늘을 속이는 것 아님이 없다.
일당을 끌어들이고 무리를 부르는 것은 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 돌을 쌓아 성을 만들고 깃발을 세워 서로 호응하여 마침내 감히 ‘창의(倡義)’라고 쓰고는 통문을 보내거나 방문(榜文)을 걸어 인심을 선동하니, 너희들이 비록 어리석고 완고하지만 어찌 천하의 대세에 따라 조정에서 조약을 맺은 것을 듣지 못하고 도리어 감히 이를 핑계 대면서 마침내 화를 불러들이려고 하는가. 이는 ‘의병을 일으키는 것[倡義]’이 아니라 ‘난을 일으키는 것[倡亂]’이다. 너희들이 땅을 점거해 진을 치고 살면서 머릿수를 믿고 스스로 방자하게 굴어 심지어 조정의 정치와 교화가 이를 데가 없게 하고 명령이 베풀어질 데가 없게 만드니, 예나 지금이나 어찌 이런 이치가 있단 말인가.
이는 모두 나 한 사람이 인도해 주고 편안히 해 주지 못한 데서 연유한 것이지만, 또한 여러 군(郡)의 수령이 너희들을 착취하고 괴롭게 해서 그런 것이니, 탐관오리들은 장차 징계를 내릴 것이다. 나는 백성들의 부모가 되는지라 백성들이 스스로 의롭지 못한 곳에 빠지는 것을 보고 슬퍼하고 불쌍히 여기노니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어 밝은 곳으로 향하게 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호군(護軍) 어윤중을 선무사로 삼아 나를 대신해 급히 가서 선유를 선포하게 하노라.
이 역시 가르침을 먼저하고 형벌을 뒤로하려는 뜻이니 너희들은 반드시 서로 해산할 것을 권고하라. 그리고 협박에 못 이겨 따른 부류들은 모두 양민(良民)들이니 지금 만약 수괴를 잡아 바치거나 적진의 형세를 몰래 고하는 자는 그에 따라 큰 상을 베풀 것이다. 만약 계속 뉘우치지 않고 해산하지 않는다면 내가 응당 크게 처분을 내릴 것이니 너희들은 속히 생각을 고쳐 스스로 왕법(王法)을 범하는 지경에 이르는 일이 없게 하라.”라고 하셨다. 이에 동학 무리들이 물러나 해산하였다.
갑오년(1894, 고종31) 봄. 호남 고부(古阜)의 백성들이 무리 지어 소요를 일으키자 임금께서 명하시어 장흥 부사(長興府使)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按覈使)로 삼아 그에게 조사하게 하였는데, 이용태가 병을 핑계 대고 피하려는 꾀를 써서 시일을 허비하였고 또 기회를 틈타 백성들의 재물을 강탈하려고 하여 도리어 소요를 일으키는 일이 증가하였다. 이에 동도(東徒)의 수괴인 고부 지역의 백성 전봉준(全琫準)이 이때를 틈타 무리를 불러 모아 마침내 반역[不軌]을 도모하니 그 세력이 점차 커지게 되었다. 이에 임금께서 명하시어 홍계훈(洪啓薰)을 양호 초토사(兩湖招討使)로 삼아 장위영(壯衛營)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게 하였고,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을 감옥에 잡아다 가뒀으며 안핵사 이용태를 김제(金堤)로 유배하였으며 전라 감사 김문현(金文鉉)의 직임을 삭탈하게 하였다.
당시 비적들이 전주(全州)에 들어왔는데 김문현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자, 임금께서 하교하시기를, “백성들의 기쁨과 근심은 백성들을 다스리는 관리에게 달려 있으니 진실로 마음을 다해 맡은바 직무를 다하여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는 일이 없다면 비록 소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기더라도 그들이 소란을 일으키려고 하겠는가. 여러 고을이 잘 다스려지는 지의 여부를 잘 살펴 수령을 등용하고 축출하는 것은 감사의 책무인데, 애초에 꽉 눌러 안정시키지 못하고 내버려두어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고, 또 백성들을 어루만져서 조절하고 제어하지도 못하였으니, 한 지방을 위임받은 책무가 어디에 있는가. 김문현은 우선 삭탈의 형전(刑典)을 시행하라. 남쪽의 백성들이 소란을 일으킨 것은 고부에서 처음 비롯 되어서 옮겨져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의당 한번 조사를 벌여 조병갑을 왕부(王府, 의금부)로 하여금 수갑을 채우고 칼을 씌워 잡아오도록 하라. ‘자세히 조사한다[按覈]’라는 법의 뜻이 얼마나 긴급한 것인데, 아직까지 조사한 것을 보고하는 장계는 없고 도리어 소요를 일으키는 일이 증가하였으니, 일의 체모가 이미 무너졌고 잘못된 점 역시 많다. 이용태는 유배의 형전을 시행하도록 하라.”라고 하셨다.
또 하교하시기를, “한 지방을 위임받은 직임으로 완산부(完山府)처럼 중요한 곳에서 처음 소란이 일어났는데도 금지하지 못하고 함부로 들어오는데도 막지 못하여 마침내 성을 버리고 경계를 넘어가니, 한 지역을 나누어 받은 신하는 그 지역에서 죽는다는 의리가 어디에 있는 가. 그의 죄과(罪科)를 논해 보면 자연 해당되는 법률이 있지만 참작함이 없어서는 안 되니, 거제부(巨濟府)에 안치할 것을 특별히 명하노라.” 라고 하셨다. 이윽고 대신(臺臣)의 상소로 인하여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5월. 조정이 동도(東徒)들이 실로 많다는 이유로 중국에 도움을 요청하여 임금께서 명하시어 이중하(李重夏)를 영접관으로 삼아서 가서 일을 주관하게 하니, 이때에 이르러 청(淸)나라의 장군 섭사성(聶士成) 등이 군대를 거느리고 아산(牙山)으로 와서 정박하였다. 초토사 홍계훈 등이 적도(賊徒)를 토벌·평정하여 전주성을 수복하였다. 승전이 보고되자 임금께서 선전관을 특별히 파견하여 노고를 치하하고 도신(道臣, 감사(監司))으로 하여금 군사들에게 호궤(犒饋)하도록 하였다. 9월. 비적들이 크게 왕성하여 군읍을 멋대로 휘젓고 다니고 병장기를 약탈하여 관리들을 살해하고, 선비와 백성들을 핍박하여 그들의 도(道)에 억지로 가입시키며, 마을마다 포(包)를 설치하여 깃발을 걸고 서로 호응하니, 삼남(三南)이 모두 그 피해를 입어 여러 읍이 무너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비적들의 칼날이 곧바로 안성(安城)·죽산(竹山) 등지를 침범하였다. 그래서 임금께서 영관(領官) 이두황(李斗璜)과 성하영(成夏泳) 등을 보내 각각 영에 소속되어 있는 군병들을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고 체포하게 하였다. 의정부가 아뢰기를, “양호(兩湖 충청도·전라도)에서 비적들이 창궐하여 그 우려가 그칠 데가 없으 니, 청컨대 호위부장(扈衛副將) 신정희(申正熙)를 순무사(巡撫使)로 삼아 여러 군대를 지휘하여 형세를 따라 토벌하고 위무(慰撫)하게 하소서.”라고 하니 임금께서 이를 따랐다.
그리고 하교하기를, “백성들의 소요가 일어난 것은 수령들이 탐욕을 부리고 학대하는 데 따른 고통을 이기지 못한 데서 비롯한 것이니, 그 사정이 딱하였기 때문에 국가가 차마 토벌을 시행하지 못하고 오로지 위로하고 달래기만 하였는데, 지금 듣자 하니 이 무리들이 사는 곳에서 난을 일으켜 괴이한 소리를 내며 민중을 현혹하고 병장기를 훔쳐 성을 공격하고 백성들의 재물을 약탈하면서 전혀 거리낌이 없어 패악질이 날로 심해지니, 이는 양민으로 볼 수 없는 놈들이다. 지금 특별히 군사를 내어 요사한 기운을 쓸어서 깨끗이 하도록 명하노니, 만약 비적으로서 무기를 버리고 귀화하여 각각 자신의 업에 복귀하는 자는 응당 죽음을 면할 것이요, 만약 외려 머릿수를 믿고 복종하지 않으면서 왕명을 감히 거역하면 모두 주벌하여 용서치 않으리라.”라고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최근 비적들이 소요를 일으켜 임금의 명령에 항거하면서 ‘의병(義兵)’이라고 칭하니, 이러한 짓을 차마 한다면 무슨 짓을 차마 못하겠는가. 이 백성들의 뜻이 안정되지 않은 때에 또 어떤 협잡꾼과 간사한 무리들이 있어 문서를 위조하여 비적들과 내통한다는 말이 종종 들려오니 매우 근심스럽다. 이후에 만약 이런 수상한 부류들이 ‘밀지(密旨)’라고 말하거나 ‘분부(分付)’라고 칭하면서 백성들을 선동하고 관리들을 협박하는 자가 있으면 곧바로 잡아들여서 먼저 죽이고 후에 보고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지평현(砥平縣)의 전 감역(監役) 맹영재(孟英在)가 관포군(官砲軍)과 사포군(私砲軍) 100여 명을 거느리고 홍주(洪州)에 도착해서 비적의 괴수 고석주(高錫柱) 등 5명을 사로잡았다. 그러자 의정부에서 아뢰어 본군의 현감으로 삼았다.
10월. 수원의 비적 수괴 김정현(金鼎鉉)과 안승관(安承寬)을 남벌원(南筏院, 서울 동대문 밖)에서 효수(梟首)하여 민중들에게 경고하였다. 임금께서 명하시어 전라 감사 이승우(李勝宇)를 교체하여 다시 홍주 목사 겸 초토사로 임명하였는데, 방비하는 것이 법도에 맞아 비적들이 감히 경계를 침입하지 못하여 부근의 7, 8개의 읍이 그에게 의지해 중하게 여겼다. 당시에 법무 협판(法務協辦) 김학우(金鶴羽)가 동도(東徒)에게 피살당하였고, 충청 오영영관(五營領官) 염도희(廉道希)·태안 부사 ,신백희(申百熙) 종친부에서 파견한 관원인 김경제(金慶濟), 서산 군수 박정기(朴錠基)가 모두 동도들에게 살해당하였으며 은진 현감(恩津縣監) 권종억(權鍾億) 또한 동도들에게 포박당해 끌려갔다.
임금께서 명하시어 지중추원사 박제관(朴齊寬)을 호서위무사로 삼고 전라 감사 이도재(李道宰)에게 호남위무사를 겸하게 하고, 선무사 이중하를 영남위무사로 옮겨 제수하고서 임금께서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호랑이 입에서 빠져나와 부모의 품으로 안기는 듯이 하라는 하교를 내리셨다. 또 홍주 목사 이승우에게 유서(諭書)를 내리시기를,
“이에 특별히 유서와 부월(斧鉞)을 내리노니, 그대는 공경히 받아서 내가 그대에게 위임한 뜻을 저버리지 말라.”라고 하고 이윽고 특별히 한 품계를 더하도록 명하여 정의를 지키고 임금이 노여워하는 적을 토벌한 공을 포상하였다.
이때에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이 아뢰기를, “방금 일본 공사가 보내온 글을 보니, 문경 부사(聞慶府使)가 전 교리 이용호(李容鎬)와 전 참군 윤갑병(尹甲炳)이 왕명이라고 속여 난리를 선동한 것을 탐문해 내니 실로 죄인의 우두머리라고 한 것 등을 칭하면서 보고한 내용을 법에 의거해 조사하여 처리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패역(悖逆)의 무리가 서울과 지방에 출몰하여 비적들을 선동하니 듣는 사람들이 놀랄 만한 일입니 다. 이 무리들의 행적이 지금 이미 드러났으니 속히 붙잡아 조사하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 교리 송정섭(宋廷燮)이 서울과 지방에 출몰하여 왕명이라고 속여 난리를 선동하니 잡아다가 엄하게 조사할 것을 아울러 청합니다.”라고 하니, 임금께서 모두 따랐다.
순무사 신정희가 아뢰기를, “호남의 비적들의 소요가 가면 갈수록 창궐하는데, 나주 목사 민종렬(閔種烈)이 시종일관 굳게 지켜서 우뚝하게 선 지주(砥柱)가 되었으니, 청컨대 민종렬을 초토사로 삼아 우변의 각 읍을 그로 하여금 통제하게 하여 뜻대로 토벌하게 하소서.”라고 하니 임금께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천안(天安)에 사는 전 감찰 윤영 렬(尹英烈)과 아산 출신 조중석(趙重錫)이 300명을 불러 모아 군진(軍陣) 앞에 달려왔으니, 별군관(別軍官)으로 임명하여 공로를 세우게 할 것을 아울러 청합니다.”라고 하니 임금께서 따랐다. 출진(出陣)한 영관 이두황이 목천(木川) 세성산(細城山)의 비적 수괴 김복용(金福用)을 사로잡았고 관군이 공산(公山)의 여러 비적들을 격퇴하였다.
이때에 해주(海州)의 비적들이 무리 지어 소란을 일으켜 심지어 순영(巡營)을 침범하자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변방을 안정시키고 지역을 지키는 신하가 만약 능히 백성을 어루만져 주고 꽉 눌러 안정시켰다면 어찌 이러한 변고에 이르렀겠습니까. 청컨대 우선 감사 정현석(鄭顯奭)을 파직하소서.”라고 하니 임금께서 따랐다. 순무사 신정희가 황해 병영의 포군을 해당 장관(將官)으로 하여금 거느리고 가서 돕게 하자고 청하였는데 임금께서 따랐다.
소모관 맹영재는 군대를 움직여 홍주(홍천의 오기) 서석면(瑞石面)에 도착하여 셀 수 없이 많은 비적을 죽였으며, 교도소 영관(敎導所領官) 이진호(李軫鎬)는 일본군 대대와 힘을 합쳐 진격하여 회덕(懷德)에 도착하여 비적 무리를 포살(砲殺)하였으며, 소모관 정기봉(鄭基鳳)은 세성산의 남은 비적인 이희인(李熙人)·한철영(韓喆永) 등 60여 명을 체포하여 모두 즉시 포살하였다. 영관 이두황은 온양(溫陽)·신창(新昌) 등지의 비적들을 체포하여 죽였고 해미(海美)에 도착하여 비적 수만 명이 주둔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이 생각지 못했을 때 공격하니 비적들이 성을 버리고 사방으로 도망갔다. 마침내 군대를 정돈하여 성에 들어가 100여 명의 비적을 체포하여 죽였다. 또 참령관(參領官) 원세록(元世祿), 대관(隊官) 윤희영(尹喜永)·이규식(李圭植)과 함께 즉시 서산 매현(梅峴)에 있는 비적의 소굴을 쳐서 격살하니 남은 무리들이 달아나 숨었다. 또 유구(維鳩)에 도착하여 비적 1,000여 명을 체포하여 그 수괴 최한규(崔漢圭) 등을 밝혀내서 죽였다. 교도소 대관 이겸제(李謙濟)는 옥천(沃川)의 비적 정원준(鄭元俊) 등을 잡아 죽이고 총과 칼 등의 물건을 획득하였다.
홍주 군관 김병돈(金秉暾)·이창욱(李昌旭)·주홍섭(朱弘燮)· 한기경(韓基慶) 등은 군진에 달려가 힘껏 싸우다 전사하여 모두 포상하고 추증하라고 명하였으며, 고부 군수 양필환(梁弼煥)과 남원 부사 이용헌(李龍憲)은 비적에게 잡혔으나 굴하지 않고 비적을 욕하다가 죽어서 모두 군무 협판으로 추증되었다. 통위영관(統衛領官) 장용진(張容鎭)은 장위영 및 일본군과 함께 노성(魯城) 봉수봉(烽燧峯) 아래를 향해 세 갈래로 군대를 진격시켜서 비적들을 포살하고 논산의 대촌(大村)·고봉(高峯) 두 곳까지 추격하여 매우 많은 비적을 포살하고서 비적들의 진영을 빼앗아 점거하니, 남은 비적들이 호남의 경계로 달아나 숨었다. 순무사 신정희가 아뢰기를, “비적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 일정하지 않으니 선봉장 이규태(李圭泰)를 좌선봉으로 삼고, 영관 이두황은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으니 청컨대 우선봉으로 삼아 그들로 하여금 길을 나누어 토벌하게 하소서.”라고 하니 임금께서 따랐다.
12월. 장흥 부사 박헌양(朴憲陽)이 방어하는 책략이 있어서 비적들이 수개월 동안 감히 넘보지 못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사로잡혀 비적을 욕하며 굴하지 않다가 죽었다. 전라 감사 이도재가 나주목사 겸 초토사 민종렬비적의 수괴 전봉준을 생포하여 한양으로 압송하였다. 이 군대를 내어 토벌해 격파하였고, 능주 목사(綾州牧使) 조존두(趙存斗) 역시 군대를 내어 비적을 포획해 죽였다. 임금께서 비적의 수괴 김개남을 죽여 소의문(昭義門) 밖으로 시체를 내보냈고 성재식(成載植)·최재호(崔在浩)·안교선(安敎善) 등의 머리를 남벌원에서 효수하니, 호남 좌우도의 비적 무리가 점차 평정되었다. 각 도의 여러 비적들의 일은 다 기록하기 어렵다. 임금께서 칙령을 내리기를, “남쪽 비적들이 점차 평정되어 가니 순무영은 없애고, 출정한 장병들은 모두 군무아문으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여 수일 안으로 토벌하고 체포하게 하라.”라고 하셨다. 이어서 군무 참의를 보내 일본 병관(兵官)·군사 및 선봉 각 군진에 달려가서 위문하고 호궤한 다음 돌아오도록 명하셨다.
을미년 3월, 비적 전봉준(全琫準)·손화중(孫華仲)·최영창(崔永昌) 등을 교수형에 처하였다. 4월, 종정경(宗正卿) 이준용(李埈鎔)을 교동(喬桐)에 유배보냈고, 전 승지 박준양(朴準陽)과 전 참판 이태용(李泰容) 등을 처형하였다. 을미년 가을, 작년에 동도들이 봉기하여 민심이 흉흉할 때에 고종주(高宗柱)와 전동석(田東錫)이라는 자는 본디 추잡스러운 무리들로 때를 틈타 선동하여 몰래 반역을 도모하여 먼저 개화당의 사람들을 제거하려고 하였고, 이어 몰래 왕위를 찬탈하려는 반역을 도모하고자 하여 이준용이 왕실의 가까운 친척이라는 이유로 은밀히 흉악한 무리들에게 뜻이 모여지는 대상이 되었다. 동도가 패해 흩어지는 상황에 이르러 고종주 등이 흉악한 계책을 펼치기가 어렵게 되자, 마침내 무뢰배 최형식(崔亨植) 등을 불러 모아 야밤에 법무 협판 김학우(金鶴羽)를 찔러 죽였고 인하여 요직에 있는 여러 사람을 죽이려고 하였는데, 모두 호위병들을 스스로 데리고 다녔기 때문에 끝내 흉학한 짓을 펼치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그 무리인 한기석(韓祈錫)·조용승(曺龍承) 등을 사로잡으니 고문을 받고 자백하여 고종주·전동석·최형식 등은 모두 교수형에 처해졌고 나머지는 모두 유배형에 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