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이 오래도록 막혀 울적한 마음을 금하기가 어려웠는데 지금 용성(龍成)에서 편지를 보고 너무나 위로가 되었네. 취전(就田) 편과 아랫마을의 인편을 통해 두 차례 보낸 편지는 그간에 이미 받아 보았는가? 추위가 극심했다가 양기(陽氣)가 생겨나서 조금 누그러졌네만 순사(詢使)로 나간 뒤로 안팎의 여러 일들은 모두 평온한지, 갑자기 맞닥뜨린 땔나무와 쌀의 책응(責應)은 어떻게 감내하고 있는지 멀리서 염려되는 것이 한둘이 아니네. 참판(參判)과 청치(淸致)는 여전한가? 이곳은 대체로 무탈하다네. 나의 감기(感氣)와 기손(基孫)의 온증(瘟證)은 깊이 염려할 것 없다네.
아부(兒婦, 며느리)가 지극히 순산(順産)하였고 또 장부(丈夫)인 손자를 얻었으며, 태어난 일시가-초3일 축시(丑時)임.- 하나의 양(陽)이 처음 움직이는 때이니, 우리 집안에 이보다 큰 경사가 어디에 있겠는가. 초하루인 까닭에 산곽(産藿, 산모가 먹을 미역)을 마련해 둘 수가 없어서 급히 달려가 구매하였으나, 또한 초하루라 군색한 일이니 이것이 무슨 해될 것이 있겠는가. 생각하노라니 기특하고 기뻐서 잠을 설칠 뿐이네.
그의 숙부는 그간에 사타구니가 부어올라 통증을 겪고 계시니 매우 안타깝네. 문익(文益)은 근래 자주 만나지 못했는데 문익군이 집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네. 공주(公州)의 동학인(東學人)으로서 무리지어 왔던 자들은 이미 즉시 물러나 흩어지는 양상인데, 지금은 오히려 조용하니 어느 때에 개설(開設)할지 모르겠다고 하네. 항간(巷間)에 “만약 백성들의 소요가 일어난다면 패(牌)를 꽂는 데가 많다.”라고 하는데, 이는 모두 근거가 없는 소문이니 믿을 만한 것이 못되네.
거창(居昌)의 숙부께서 생신 전에 집으로 돌아온다고 하셨는데, 취전(就田)의 영도(榮到)는 이미 길을 떠난 듯하고 한림(翰林)과 동행한다고 하니, 또한 저간의 노경(路警)에 어디쯤 있는지 모르겠네. 서산(瑞山)에서 거둔 물건을 급히 바치라고 잇달아 독려하였으나, 아자(兒子)가 자세히 요량하기에 달렸네. 이전 인편에 보낸 편지는 부치는 것을 잊지 말게나. 낭저(廊底, 행랑(行廊))의 굶주리는 근심이 옥봉(玉鳳)의 집에까지 미쳐서 산에라도 올라 먹을 것을 구해야 할 지경인데 앉아서 보기만 하고 구원하지 못하니, 이것이 어찌 인자(仁者)의 마음이겠는가마는 우리 집안의 생계 또한 대책이 없으니, 근심스럽고 근심스러울 뿐이네. 나머지는 어지럼증이 심하여 이만 줄이네. 격식을 갖추지 못하였네.
임진년(1892, 고종29) 11월 초3일. 백형(伯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