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에 박사정(朴士正) 편으로 보낸 편지는 이미 받아 보았으리라 생각하네. 그리고 24일에 돌아온 화룡(華龍) 편에 편지를 받아 보고 너무나 위로가 되었으나 이 또한 조금 격조(隔阻)했기에 문득 울적한 마음이 드네. 취전(就田)의 교리(校理)는 이번 달 초4일에 출발하여 왔고 재청(齋淸)의 두 편지도 모두 도착했는데 그대의 편지를 보지 못했으니, 혹시 출재(出齋) 때문에 그런 것인가? 심히 궁금하고 답답하네.
이렇게 빨리 흐르는 세월에 벼슬살이하는 근황은 평온하고 집안의 안부는 아무 일 없이 그대로이며, 재청도 그간에 무탈한가? 동학(東學)의 소요가 대단하다고 하였는데, 그간에 이미 진정되었는가? 여러 가지가 다 염려를 놓을 수가 없네. 이곳의 여러 집들은 모두 무사하다네. 진사(進士)는 점차 완쾌되어 가고 아이 역시 잘 자라고 있으니 매우 다행이네.
거창(居昌)의 숙부께서는 오늘 떠나 관아로 돌아가는 길에 청동가(淸洞家)도 모셔간다고 하네. 안읍(安邑)의 주서(注書) 댁은 서산(瑞山)의 관아로부터 초2일에 원계(院溪)에 와서 머무르고 4일에 종가(宗家)에 와서 머물렀다가 이날 비로소 안읍에 들어오셨는데, 그 집이 이미 팔려서 응률(應律)의 아우 내외(內外)가 집에 있지 않다고 하니, 가봤자 또한 마음만 씁쓸할 것이네. 그리고 인마(人馬) 10여 명이 6, 7일 머무르는 동안 비용이 적지 않을 것이네.
서산의 수령이 6촌의 아들-이순흥(李順興)의 손자-인 12세 아이를 양자로 삼았는데, 아이의 사람됨이 자못 총명하고 준수하다고 하니 너무나 다행일세. 청길(靑吉)에게서 받을 돈은 이미 끌어왔는데, 그가 처자식을 데리고 도망갔네. 다른 사람에게 빚을 지지 않았고 윗사람에게 죄를 얻지 않았는데, 무슨 뜻으로 이런 계책을 세웠는지 모르겠네. 반드시 그의 본심이 아닐 것이네. 서산의 수령이 또 100꿰미를 찾아가서 포목(布木)으로 바꿔서 장차 가지고 가려 하는데, 모시고 가고 돌아올 때 전후로 간 것이 620냥이었네. 50냥은 화룡에게 내주어 그대의 처소에 전달해 달라고 하였는데, 언제쯤에나 들어가려는가? 치명(致明)이 서산에 내야 할 세금은 비록 목을 비틀더라도 어찌할 수가 없을 것이네. 중댁(仲宅)의 돈 420냥에 이르러서도 또한 끝까지 버티고 있으니 이 염치가 없는 사람을 장차 어찌해야 하겠는가?
도동(桃洞)의 원만하게 단도리한 노인은 심단(審斷, 판결)이 매우 형통하여 장차 함께 서용(敍用)되고 추증될 것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큰소리로 감탄하게 하고 사산(沙山)의 두 노인 역시 그러하니, 이는 치삼(致三)이 반드시 이조 판서와 이조 참판을 통해 속히 실직(實職)을 도모해서 그러하였을 것이네. 치삼이 출재(出宰, 지방 수령으로 부임)하려는 계책은 숙부께서 만약 나이가 많아 벼슬에서 물러나시게 된다면 쉽게 이루어질 것이네. 지금 듣자하니 거창의 댁에서 경중(京中)으로 전팽(專伻, 사람을 보냄)한다고 하기에 이 편지를 부치네. 이만 줄이네. 격식을 갖추지 못하였네.
계사년(1893, 고종30) 3월 9일. 백형(伯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