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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1894년 동학농민혁명기록문서 一八九四年 東學農民革命記錄文書
일러두기

[편지]

적성(積城)의 홍씨(洪氏) 댁이 집에 와서 지낸다고 하니 적적함을 면할 수 있겠구나. 홍랑(洪郞)에게 보내는 언장(唁狀)은 후에 보낼 인편에 써서 보내마. 여삼(汝滲)이 환갑이 지난 후에도 또 와서 지내면서 조카를 도와주고 있지만 끝내 향학(向學)의 뜻이 적어서 고생만 하고 아무 보탬이 없다고 할 만하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편지]

본읍(本邑)의 군기(軍器)를 탈취당한 후에 공주(公州)와 청주(淸州) 두 영(營)의 병사가 잡아간 도당(徒黨)들을 내보낸 것은 두 영에서 곤장을 한 대도 때리지 않고 모두 풀어 준 것이니, 이는 비록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이지만 악행(惡行)을 징벌하는 뜻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 무리들이 처음에는 비록 위축되어 굴복하였지만 지금은 의기양양하고, 처음에는 배도(背道)하겠다고 말했던 자들이 지금은 예전으로 돌아갔다네. 또한 입도(入道)하는 자가 많이 있고 또 몰래 사통(私通)을 돌리는 자가 있다고 하니 통탄스럽고 패악스럽다 할 만하네. 사람들이 모두들 다시 봉기할 것이라고 하는데, 만약 다시 일어난다면 반드시 살육이 있게 될 것이네. 이곳에 가만히 앉아 있어선 안되는데 무릉도원을 아스라이 생각하고 내 신세 곤궁함을 스스로 탄식할 뿐이니, 장차 어찌해야 하겠는가?

이른바 “입학(入學)한 지 여러 해가 되어 그만두고자 해도 그만둘 수 없는 수준이니 가르친 제자가 혹 1천여 명에 이르렀다.”라는 것이네만 회덕(懷德)의 장(張)ㆍ곽(郭)-두 사람은 오정(梧井)마을 사람이다.-ㆍ정(鄭)-율동(栗洞)마을 사람이다.-ㆍ김(金)-흡천(洽泉)마을 사람이다.-과 문의(文義)마을 사람 오일상(吳一相)-자(字) 대이(大而)-은 자칭(自稱) 삼남(三南)의 도검찰(都檢察)이고, 박운(薄雲)마을 사람 강채서(姜采西)ㆍ최명기(崔明基)ㆍ이일선(李一善)은 바로 군기를 탈취하는 변고를 일으킨 자들이니, 모두 가차 없이 죽여야 하는데 이를 만약 모두 풀어 준다면 말도 안 되는 일이네.

완산부(完山府)의 도적들이 나가고 초토사(招討使)의 관문(關文)을 보니, 우두머리인 김순명(金順明)과 14세 소년 장사 이복롱(李福弄)을 체포하여 죽였으며, 또 적병(賊兵) 500여 명을 죽이고 총과 창 300여 자루를 획득하였으며 장차 머지않아 성을 수복할 것이라고 하네. 너무나 다행스러운 일이네. 이 근처의 도당들이 이 관문을 보고 크게 기뻐하지 않는 기색이 있었다고 하니, 그 뜻이 매우 음흉하네. 그들의 도(道)를 그들만이 행하여 다른 사람들을 유혹함이 없고 협박함이 없으며 입도함에 작당(作黨)함이 없고 다른 사람들을 해함이 없이 한쪽에 거처하면서 행한다면, 이단(異端)의 무리로 구별하여 서로 상관하지 않을 뿐이니 그렇다면 어찌 오늘날의 변고가 있겠는가?

지난번 본읍에서 그 당(黨) 두 사람을 잡았는데 황해도(黃海道) 사람이라고 하였네. 이들은 오정의 장 접주(張接主)가 연원(淵源)인데, 선생을 보려고 왔다가 잡힌 것이네. 행탁(行橐)에서 동학의 문서를 찾았는데, 비록 칼이 씌워지고 묶여 있는 상황에 있었지만 오히려 ‘시천주(侍天主)’의 주문을 외웠다고 하니, 이는 죽어도 넘어지지 않는 경우라고 할 만하네. 이미 타도(他道)의 사람이라서 즉시 풀어 주었다고 하네.

우리 고을이 향약(鄕約)을 설행(設行)하고자 하였는데, 감영(監營)의 관문에 의거해 시행하여 옛날에 세운 법규를 찾아냈다네. 그리고 우리 고을의 수령이 집강(執綱)이 되고 거창(居昌)의 숙부께서 계장(契長)이 되어 각 면(面)에서 정속(正俗) 1인(人), 부정속(副正俗) 1인, 검찰(檢察) 1인을 선출하려고 비록 두 차례 유회(儒會)를 하였지만 아직도 선출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은 모두 정속의 직임을 기피해서라네. 내남(內南)은 후곡(後谷)의 성재(聲哉)가 정속이 되었네. 죽기를 각오하고 직임 회피를 꾀하는 것은, 이 시기에 동학의 무리들을 크게 두려워해서 입도하는 것을 금지하고자 하면 동학의 무리들이 작당하여 창(槍)을 가지고서 밤에 그의 집에 들어와 죽이려고 하는 까닭에서일세. 기왕 이 직임에 있으면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서도 그것을 금하지 않는다면 시소(尸素)를 면치 못할 것이니, 차라리 하지 않는 것만 못할 것이네. 이와 같다면 장차 전날의 우환보다 심한 점이 있을 것이네.

사영(士英)은 부상(負商)과 행상(行商)의 우두머리로서 또한 도당이 많아 동면(東面)의 송보경(宋寶卿)ㆍ사현(士賢)ㆍ기여(嗜汝)와 추곡(秋谷)의 선일(善一)과 세교(細橋)의 경학(景學) 및 다른 곳의 사람들이 모두 이곳에 들어갔는데, 지금 본 바로는 동학의 무리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잡아서 다스리는 사람이 있다 할 뿐 모두 다만 소창의(小氅衣)를 입고 읍촌(邑村) 사이에서 행하였을 뿐이네.

[편지]

원계(院溪)의 도문연(到門宴)은 이때를 당하여 초라하게 지냈네만 한 쌍의 젓대를 세우려 해도 재인(才人)의 무리들 역시 동학 무리에 들어가서 미루어 쓰기가 심히 어렵네. 태순(泰淳)이 급제하여 왔을 때 들였던 것은 대나무가 깨지고 쉰소리가 나서 듣고 있기가 어려울 지경이니 되려 우스운 일이네. 참봉이 보내는 편지는 인편에 곧바로 보냈는데, 모양이 좋질 않네.

주석
언장(唁狀) 상중(喪中)에 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위로의 편지나 글을 가리킨다.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죄가 의심스러운 것은 벌을 가볍게 하시고 공이 의심스러운 경우는 상을 후하게 주셨으며, 죄 없는 자를 죽이느니 차라리 떳떳한 법대로 하지 않는 실수를 하시겠다고 하여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이 민심에 흡족합니다.[罪疑惟輕功疑惟重與其殺不辜寧失不經好生之德洽于民心]”라고 한 말을 차용한 것이다.
무릉도원을 아스라이 생각하고 내 신세 곤궁함을 스스로 탄식할 뿐이니, 두보(杜甫)의 「북정(北征)」에 “무릉도원을 아스라이 생각하고 내 신세 곤궁함을 더욱 탄식한다.[緬思桃源內益歎身世拙]”라고 한 구절을 차용한 말이다. 이 구절의 뜻은, 진(秦)나라 때 사람이 난리를 피하여 무릉도원으로 들어가 숨어 살았는데, 자신은 그렇게 하지 못하므로 세상살이가 서툰 셈이라는 것이다.
이복롱(李福弄) 이복룡(李福龍)의 오기(誤記)인 듯하다.
연원(淵源) 동학(東學)의 조직 원리로서, 도통연원(道統淵源)이라 하여 도의 가르침을 전하는 이가 연원주가 되고, 그에 의하여 포교된 신자들을 자기의 연원으로 간주한다. 유학에서 사제지간이 같은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급문(及門)의 제자들이 연원이 되는 것과 같이, 동학의 조직에서도 1에서 3, 3에서 10, 10에서 50 등으로 나뭇가지처럼 연원의 점조직이 문어발 모양을 이룬다. 예를 들어 누구인가가 아래로 여러 사람에게 동학의 심법(心法)을 전수하여 연원이 되고, 그 입신자들이 각기 연원주가 되어 다시 입신자를 만들었을 때, 위의 연원주는 접주가 된다.
‘시천주(侍天主)’의 주문 동학의 핵심 사상이 들어 있는 21자(字)로 된 주문인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至氣今至願爲大降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를 가리킨다.
죽어도 넘어지지 않는 경우 삼국 시대 조경(曹囧)의 「육대론(六代論)」에 “옛말에 이르기를 ‘발이 100개 달린 벌레는 죽어도 넘어지지 않는다.’ 했으니, 그것은 붙들어 주는 자가 많기 때문이다.[百足之蟲, 至死不僵. 扶之者衆也.]”라고 한 말을 차용한 것이다.
선출 원문의 ‘입구(入彀)’를 번역한 것이다. 구중(彀中)에 들어왔다는 뜻인데, 구중이란 화살이 미치는 범위라는 뜻으로 규정된 범위에 들어온 것을 말한다. 당나라 태종이 “천하의 영웅이 나의 구중으로 들어왔다.[天下英雄入我彀中矣]”라고 한데서 유래하여 일정 자격을 가진 사람을 선출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시소(尸素) ‘시위소찬(尸位素餐)’의 준말로, 자격도 없는 사람이 자리만 차지하여 국록을 축내고 있다는 뜻의 겸사(謙辭)이다. 『서경』 「오자지가(五子之歌)」에 “태강(太康)이 시위(尸位)하여 안락으로 그 덕을 상실했다.” 하였는데, 이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직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뜻이고, 『시경』 「벌단(伐檀)」에 “소찬을 아니한다.[不素餐兮]” 하였는데, 소(素)는 공(空)의 뜻이고 찬(餐)은 밥이니, 무위도식한다는 말이다.
모두 다만 소창의(小氅衣)를 입고 읍촌(邑村) 사이에서 행하였을 뿐이네. ‘창의(氅衣)’는 벼슬아치가 평상시에 입던 웃옷으로, 대창의(大氅衣)ㆍ소창의(小氅衣)ㆍ학창의(鶴氅衣)가 있다. 소매가 넓고, 뒷솔기나 옆 솔기 두 곳에 모두 트임이 있다. 이는 보잘것없는 벼슬을 믿고 행세하고 다닌다는 뜻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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