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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동학당의 상황 東學黨ノ狀況
일러두기

동학당 4월 25일 술시(戌時, 오후 7~9시) 전라감사의 전보(양력 5월 29일) 장성(長城)에서 24일 보낸 보고를 접하니, 저들 수천 명이 이곳을 습격하러 왔다고 알려 왔습니다. 또한 정탐한 서리(胥吏)의 보고를 들으니, 저들은 오평(烏坪)에 결집하여 읍에서 20리 떨어진 곳에서 산을 등지고 진을 쳤다고 합니다. 이에 수비를 강화하라는 뜻으로 장성과 나주 두 읍에 엄히 훈계하여 특별히 방어하도록 했습니다. 같은 달 26일 미시(未時, 오후 1~3시) 전라감사의 전보(양력 5월 30일) 난민들은 장성ㆍ나주 등지로 가다가 길을 돌려 고부(古阜)로 갔고, 십로(十路)로 분리되었던 부대는 삼로(三路)에서 합세했다고 합니다. 전번에는 수가 감소되어 4,000~5,000명밖에 되지 않던 것이 지금은 수만 명이라고 하니, 흩어졌다 모였다 하는 것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들 가운데 소위 일을 도모하는 자는 나이가 겨우 14,5세로, 성은 전(全)이고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이자는 비상한 일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초토사(招討使)의 전보 난도(亂徒)를 초멸하려는 마음은 간절하지만 난도들은 달아나기만 하여 대치하지 못했고 한 번도 포를 발사하여 죄를 묻지 못하였습니다. 난도들은 다시 그 수가 불어나서 가볍게 보기 어려울 것 같으니, 외부의 병력[外兵]을 빌려 적을 막기를 바랍니다. 양력 5월 31일 전보 어제 받은 지급전보의 내용에 따라, 며칠 전 경군이 처음으로 동학도와 접전하였는데 1대(隊)의 병력이 패전하여 대관(隊官) 이두황(李斗璜)이 전사하고 경군 사망자가 300여 명이라고 합니다. 4월 26일에 받은 전주가도사(全州假都事)의 전보(양력 5월 30일) 당일 동학도들은 장성에서 원평(院坪)을 거쳐 두정(豆亭)에 도착하여 전주감영(全州監營)에서 30리 정도 되는 곳에 모여서 주둔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초토사는 군대를 인솔하고 다른 곳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지금 감영은 텅 빈 채로 바야흐로 수비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동 27일 사시(巳時, 오전 9~11시)에 받은 전라감사의 전보(양력 5월 31일)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초토병(招討兵)은 나아가 장성의 월평(月坪)에 도착하여 난도들과 만났는데 접전할 즈음 좌우 골짜기에서 복병이 크게 일어나 앞뒤로 협공을 당해 패배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측근 가운데 믿을 만한 사람을 정탐차 보냈는데, 지금 전주성 안팎의 늙은이와 어린이, 그리고 감영 소속의 사람들은 기회를 엿보고 달아났습니다. 적도들은 지금 30리 안팎에 있는데 수하에는 어린아이 한 명마저 없어서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으니 급히 경군을 출동시켜 밤을 낮 삼아 계속 내려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오후에 다시 받은 전보에는, 저들이 성 아래까지 육박하여 고함 소리가 진동하고……친히 전국(電局)으로 가서 사태가 급함을 전보로 보냈다고 했습니다. 동 27일 미시(未時, 오후 1~3시)에 전라감사가 보내온 전보 비적(匪賊) 떼가 이미 성 밑까지 접근하였으나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가 없습니다. 이상의 사태에 대해 당일 밤 대신들을 불러 회의를 열고 다시 평양(平壤)의 군사 500명을 지원병으로 파견하고, 아울러 신임 충청병사(忠淸兵使)에게 그날 출발을 명했다고 합니다. 동 28일 탐보(探報)(양력 6월 1일) 지금부터 전주는 동학도에게 속하고, 전보도 두절되었으며 안팎이 소란스럽습니다. 외무독판(外務督辦) 조병직(趙秉稷)은 어제 진하(陳賀)-김옥균을 처형하였으므로 역적을 토죄한 경사로 진하했다고 합니다.-를 마친 후 바로 전보국으로 갔는데, 하룻밤이 지나도록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가 전보국의 총판(總辦)이기 때문에 전신을 살펴보고 입품(入稟)하기 위해서입니다. 양호(兩湖)-전라ㆍ충청- 순변사(巡邊使)에 이원회(李元會)-병사[兵使]로 이전부터 인망이 있었음.-를 임명하여 당일 부임하게 하고 상황에 따라 적절히 대응하도록 하였습니다. 또 삼남(三南)-경상ㆍ전라ㆍ충청-에 윤음(綸音)을 내려 민심을 위무하고 참판(參判) 엄세영(嚴世永)을 염찰사(廉察使)로 임명하여 그날로 삼남에 내려보내 관리의 치적과 백성의 병폐를 일일이 탐색하도록 했습니다. 평안감영(平安監營)의 병정 500명을 순변사가 영솔하여 내려갔다고 합니다. 관군이 번번이 패하는 모양이 흙더미가 무너지고 기와가 깨지듯 쉽게 패한다고 말할 만합니다. 초토사(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이 그 일에 합당한 사람도 아니고 또 용병(用兵)에 익숙하지도 않아서 사람들은 모두 그를 멸시하는데, 이것은 조선의 양반들이 평민을 멸시하는 풍습 때문이니 어찌하겠습니까?-홍은 본시 평민이다.- 저들이 바라는 바를 모두 들어주어 전운(轉運)도 폐지하였다 합니다. 또 바라기를 감사(監司) 김문현(金文鉉), 전운사(轉運使) 조필영(趙弼永), 균전사(均田使) 김창석(金昌錫), 고부군(古阜郡)의 안핵사(按覈使) 이용태(李容泰) 등 4명을 전라도 땅에서 효수한 뒤에야 해산하겠다고 합니다. 음력 4월 26일(양력 5월 30일) 충청도 감사(忠淸道監司)의 전보 동학도(東學徒)들이 차례로 해산했습니다만, 봉변을 당한 양반들 집에서 통문(通文)을 띄우고 가동(家童) 수백 명을 모아 동학도를 쫓아가 살해하고 또 동학도의 집에 불을 지르므로 수일 안에 동학도 수만 명이 모여 다시 소란을 일으킬까 걱정스럽습니다. 동 4월 27일(양력 5월 31일) 경상도 감사(慶尙道監司)의 보고 지난번 동학 괴수 백홍석(白弘錫)을 살해했는데, 동학도 수만 명이 진주(晉州)에 난입하여 성안에서 큰 소란을 일으켰다고 하니 걱정스럽습니다. 동 28일(양력 6월 1일) 충청도 청주(淸州)의 전보 동학도가 다시 모여 보은(報恩)이 곧 함락될 지경이라고 하니, 경군(京軍)을 급히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동 29일(양력 6월 2일) 충청도 감사의 전보 공주(公州) 이남은 소식이 끊겼는데, 전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이 도주하여 본영(本營)까지 왔습니다. 그가 전한 소식을 들으면, 공주 이남은 국가의 소유가 아니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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