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일 받은 여러 보고 어제 미시(未時, 오후 1~3시)에 받은 전주감사(全州監司)의 전보에, “적이 성 밖에 임박하자 백성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기미를 알아채고 달아나서 온 영내(營內)가 텅텅 비어 사세가 급박합니다. 만일 다시 전보가 없으면 성을 보존하지 못한 것으로 아십시오.”라고 했는데, 어제 미시 이후에는 한 번도 전보가 오지 않아 경성전국(京城電局)에서 여러 차례 전보를 보냈으나 답전(答電)을 한 번도 받지 못했으니, 전영(全營)은 이미 함락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제 동학도가 전주감영으로 들어오자 전 감사는 빠져나와 산사(山寺)로 피신했습니다. 그러나 그곳 경기전(慶基殿)에는 태조영정(太祖影幀)을 봉안하고 있으므로 예조(禮曹)의 당상관(堂上官)을 파견하여 살펴보고 오게 했습니다. 전주전국(全州電局)은 동학도의 소요로 통신을 할 수가 없으므로, 금영(錦營)에서 상패(商牌)를 만들어 전주에 이르게 하고 급히 비각(飛脚)을 통해 공주로 보내어 전보통신을 보냈습니다. 순변사(巡邊使)는 내일 아침 출병하여 은진(恩津)으로 가서 그들의 앞길을 방어하겠다고 했습니다. 금백(錦伯)-충청감사-의 보고에는, 도내(道內)로 잇따라 들어온 동학도가 곳곳에서 봉기하자 열읍(列邑)의 관속(官屬)들은 대부분 관장(官長)에게 물러가겠다고 말하고 떠났으나 수재(守宰, 수령)들은 팔짱만 끼고 있을 뿐이고, 청산현(靑山縣)에 수천 명이 모여 있다고 합니다. 이번 소요는 본래 민간에서 일어나서 이속(吏屬)이 백성과 합세했는데, 수령들이 동학도라고 지칭하였으므로 동학도들은 이 말을 듣고 매우 놀란 나머지 이속과 백성에 붙어 세 무리가 합세하게 된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이속들의 소요가 가장 두려우니, 그것은 그들이 꾀도 많고 일할 줄도 아는 데다 산천 및 도로의 형편과 부고(府庫)의 전곡(錢穀)까지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번 정부에서 호남의 각 읍에 공문을 보내어 초토사(招討使)의 영내(營內)에 토병을 더 증원하도록 하였는데, 적도들은 그 기밀을 알아차리고 정부의 공문을 위조하고 인장(印章)까지도 조금도 차이가 없이 만들어서는 저들 무리 수백 명을 모읍(某邑)의 토병인 양 위장하여 초토사의 진영에 들여보내 그들이 은밀히 기밀을 알려 주고, 접전할 때는 내통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대패하였다고 합니다.-이것은 필시 이속들이 함께 꾸민 일일 것입니다.- 초토사가 영광(靈光)에 있으면서 당초 700명의 병정을 3대(隊)로 나누어서 2대(隊)를 장성(長城)으로 보냈으나, 이들은 싸움에서 패했습니다. 초토사의 전보와 계문(啓文)이 끊어진 이유는 다른 까닭이 아니라, 난도들이 중간을 끊어서 앞뒤가 통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초토사는 지금 영광에 주둔하고 있는데, 형세는 고립되고 힘도 다했습니다. 그러자 국왕이 은밀히 윤선 한 척을 영광으로 보내 초토사로 하여금 전주의 북쪽을 순식간에 차단했으나 이 일에 대해서는 비밀을 지키도록 하였으므로, 민혜당(閔惠堂)-영준-도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새로 발령된 전라감사가 공주에 도착했으나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강화영(江華營)의 병정들은 군산(群山)에 주둔하면서 관망만 하고 있다고 합니다. 순변사 이원회(李元會)는 서영(西營)-평안감영- 병정 5초(哨)를 인솔하고 내일 아침에 출발한다고 합니다. 서영의 병정들에게는 면포(綿布)와 마포(麻布) 각 1필과 돈 1관문(貫文)씩을 지급한다고 합니다. 탐정인(探偵人)이 말하기를 이원회는 70세의 노장이라 중임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5초(哨)의 병력으로 어찌 능히 적에 저항하겠습니까? 군량이 없기 때문에 충청도 안의 포미(浦米)에서 경사(京司)에 상납할 것을 순변사 진영으로 떼어내어 경군과 강화병(江華兵)이 모두 수령한다고 합니다. 어제 경성의 전국(電局)에서 전국주사(電局主事) 1명을 파견하면서 철선(鐵線) 및 전신기구(電信機具)를 내려보냈다고 하는데, 이것은 가는 도중에 통보한 것입니다. 1894년(갑오년) 4월 27일(양력 5월 31일) 국왕 전하는 팔도에 다음과 같은 칙유(勅諭)를 내렸음. 전교에 이르기를, “내가 밤낮으로 애쓰는 것이 백성을 위한 한 가지 일이건만 백성은 갈수록 곤궁해져서 곳곳이 소란스러우니 이것이 어찌 된 까닭인가? 대개 그 폐단에 대해서는 나도 여러 가지로 들은 것이 있으니, 바로 탐관오리가 백성을 돌보지 않고 도리어 침학과 횡포를 더하고 인민을 핍박하여 백성들이 생업에 편안히 종사하지 못해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런 수령들은 하루라도 더 머물면서 조금이라도 더 해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듣는 대로 내쫓아야 할 것이고, 그중에서도 가장 못된 자는 해당하는 법률로 엄히 징벌하여 민심에 사과해야 할 것이다. 토호(土豪)들이 무단 행위를 하는 것이 간혹 관병을 두려워하지 않아 무고한 백성들이 살아갈 수가 없으니 그런 자들은 마땅히 휘어잡아 강한 자는 누르고 약한 자를 부축하여 가난한 백성이 방황하고 탄식하는 일이 없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혹 어리석은 백성이 무리 지어 소란을 일으키며 명분을 훼손시킨다면 그 또한 하지 말도록 타이르고 통제해야 할 것이다. 또 나라의 세결(稅結)은 중요한 것이니 비록 한 웅큼이나 한 묶음이라도 함부로 늘릴 수 없는데, 간혹 조정에서 알지 못한다 하여 1결(結)에서 원래의 총수보다 몇 혹 몇 배를 더 받는 일도 있으니, 농민들은 1년 내내 고생하고도 항아리에는 모아 둔 곡식이 없으며, 비록 풍년이 들어도 세금을 내기에도 부족하여 이산하여 떠돌고 있다. 수령으로서 이런 짓을 하는 자는 비단 백성에게 포학했다고만 할 뿐이 아니니 과연 국법이 있음을 아는 자이겠는가. 철저히 조사하여 원결(原結) 외에 혹시라도 더 받는 일이 없게 할 것이요, 그리고 그들이 범한 죄를 따져 물어 아뢰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른바 명목 없는 잡세(雜稅)를 허다하게 징수한다는 것은 한 가지 물건이 시장에 들어오면 여러 가지 명목으로 세금을 거두고, 한 척의 배가 경내를 통과하면 숱한 항구에서 세금을 받아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상인들은 모두 괴로워하여 재화의 원천이 고갈되고 교역에 지장을 주게 되어 값은 날로 치솟을 것이니 마땅히 모두 없애도록 해야 할 것이다. 무릇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이런 모든 일은 수령들이 백성을 위해 고심하는 나의 마음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배만 불리려는 사욕에서 나온 것이니, 생각하면 차라리 말을 하고 싶지도 않다. 이런 일을 조사하여 두루 살피는 것은 감사(監司)의 책임인데, 지금 백성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시끄럽고 굳이 캐묻지 않아도 그 자자한 소문을 가릴 수 없을 지경인데도, 지금까지 한 번도 아뢰지 않고 잠잠하니, 이것이 어찌 대양(對揚)하는 의리이겠는가. 열읍의 수령들에 대해서 개탄스러운 일이 더 있으나 이것은 또한 묘당(廟堂)에서 규찰하고 훈계하는 데 달렸으니,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사람은 크게 징벌하고, 폐단이 되는 것은 철저히 바로잡아 고치되, 직접 결정할 문제는 직접 결정하고, 아뢰어 재결받을 일은 아뢰어 재결받아서 미루지 말고 서두르라. 이런 뜻으로 각 도에 엄히 신칙하라.”라고 하였다. 순변사 이원회는 출장하라는 명을 받았는데, 국왕의 교유(敎諭)와 그의 응대는 다음과 같다고 한다. 순변사 이원회가 오늘 아침 작별인사를 하며 알현할 때 어전에 엎드리자, 상감께서 말하기를, “곤(閫) 이외는 장군이 통제하는 것이니, 경은 모름지기 스스로 임하시오.”라고 하자 순변사가 대답하기를, “신의 나이가 지금 70인데 천만뜻밖에도 신에게 중한 책임을 맡기셨습니다. 신은 본래 재주도 없고 능력도 없는 데다, 옛말에도 ‘늙은 장수는 쓸모가 없다’고 하였는데 신이 어찌 감히 이런 중임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상감께서 말하기를 “경의 두터운 신망을 나는 평소 익히 듣고 있으니 경은 혜량하시오.”라고 하였다. 순변사가 대답하기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며 또 말하기를, “신이 이번에 가는 것은 다만 처분을 받들고 갈 뿐인데, 장차 무슨 일로 처분하시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상감께서는 오랫동안 말없이 계시다가, “자임(自任)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순변사가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별도로 처분을 내리신 후에 그 명을 받들 수 있습니다.”라는 뜻으로 재삼 아뢰었다. 상감께서는 말없이 앉아서 별로 기뻐하는 기색이 없더니 한참 뒤에 단지 임의로 변통하라고 하교하였다. 순변사는 “예, 예” 하며 물러났다. 위의 내용 외에 오늘(6월 3일) 아침에 온 전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음력 4월 29일(양력 6월 2일) 신시(申時, 오후 3~5시) 충청감사(忠淸監司)의 전보 지금 은진대관(恩津隊官)이 보낸 서신을 보니 초토사(招討使)는 원평(院坪)에서 길을 따라 행진(行陣)하여 오늘 전주(全州)에 도착해 접전할 것이라고 하나 이 말도 믿을 수는 없습니다. 만일 그가 쫓겨나면 그들은 반드시 은진을 침범할 것인데, 수비가 너무 소홀하여 고민입니다. 다시 정탐하여 아뢰겠습니다. 신임 전라감사는 은진으로 출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