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호(漢陽號) 기관수 도쿠나가 세이이치(德永正一)의 청취서 一 5월 8일 오후 2시 청국 군함 평원(平遠) 및 창룡호(蒼龍號)와 함께 친군병(親軍兵)을 싣고 출발한 한양호(漢陽號)는 다음 날인 9일 오후 1시 군산(群山)에 도착하자 곧 군대를 상륙시켰습니다. 창룡호는 오후 6시경에 도착했고 평원호도 도착하였습니다. 다음 날인 10일 한양호로 군을 상륙시키고 이후 군산에 정박하고 있습니다. 一 5월 18일 오전 2시 공미(貢米)를 받기 위하여 인천전운국(仁川轉運局) 낭중(郞中) 김용덕(金容悳)과 군산전운국원(群山轉運局員) 강고부(姜古阜) 2명을 태우고 그곳을 출범하여 18일 10시경 법성포(法聖浦)에 도착했습니다. 닻을 내리자마자 그곳에서 전부터 공미를 싣는 일들에 종사하던 조선인 1명이 와서 배 안을 살피는 거동이 심상치 않은 것 같았는데 곧 육지로 사라졌습니다. 동 18일 4시경에 조선인 3명이 공미 담당 관리를 소환하러 왔다고 했으나, 김용덕과 강고부는 모두 일이 많아 응할 수가 없으며 또한 용건이 있다면 본선에 오라는 뜻으로 답하자 3명 모두 육지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50~60명이 칼ㆍ창ㆍ화승총ㆍ죽창 등을 들고-병기가 없는 자는 새끼줄을 3중으로 꼬아 앞뒤로 이어 구슬을 단 것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해안에 모여 있다가, 그중에서 50~60명이 본선으로 와서 김용덕과 선장 다나카 도미노스케(田中富之助), 운전수 나가노 겐지로(永野源次郞), 기관수 도쿠나가 센지로(德永淺次郞) 및 도쿠나가 세이이치(德永正一) 5명을 거친 새끼줄로 세게 묶었습니다. 다나카 도미노스케는 칼로 등을 두세 번 맞았지만 예리하지 않아서 부상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해안에서 약 4정(丁)쯤 떨어진 곳으로 끌고 가 두목으로 보이는 자가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한 뒤, 다나카 도미노스케와 도쿠나가 세이이치를 여러 명이 따라붙어 본선까지 강제로 연행해 와서 김낭중이 가지고 있던 돈 50관문(貫文), 강고부가 가지고 있던 돈 50관문을 강탈했습니다. 처음에 그들을 묶을 때, 강고부는 어디에 있느냐고 자주 찾았습니다. 그는 난을 피하여 공미를 운반하는 작은 배의 돛대 사이에 숨어 있었는데, 이때 발각되어 포박당해 함께 그곳으로 끌려왔습니다. 돈을 빼앗아 그들의 소망이 달성된 듯, 우리 일본인 4명을 풀어 주었는데 배로 돌아온 것은 오후 9시가 지나서였습니다. 배에 있던 조선인에게 내일 아침 한양호를 부수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강 가운데에 정박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되어 그날 밤 12시경에 몰래 증기를 올리고 닻을 감아 올려 군산으로 돌아왔습니다. 5월 24일 공미를 받으려고 곰소-군산에서 남쪽 15~16리에 있습니다.-로 나갔더니, 현익호(顯益號)가 강화병(江華兵)을 싣고 와 있었으므로, 곧 한양호로 강화 군사를 법성(法聖)으로 호송하고 다시 곰소로 돌아와 공미를 실었습니다. 5월 26일 그곳을 출발하여 다음 날 27일 군산으로 돌아왔습니다. 같은 달 31일 군산을 출발할 때 인천항에서 서상집(徐相集) 소유의 풍범선 순초환(順初丸)을 만났는데, 이 배에서 (“사람 살려”라고) 외치는 소리가 계속 나서 항행을 멈추었더니 지난번에 포박되어 끌려간 후 생사를 알 수 없었던 김용덕과 강고부 두 사람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김용덕을 한양호에 옮겨 태우고 강고부는 그대로 군산으로 향했습니다. 김용덕의 말에 의하면, 자신은 법성에서 8리쯤 떨어져 있는 곳까지 가서 그들에게 심하게 맞았으며, 한때는 고통으로 숨이 끊겨 멍석에 말아 들판에 내버려진 바람에 7일간 음식을 입에 대지 못했으나 간신히 생명을 건져 법성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강고부는 훨씬 멀리 떨어진 곳-18리 정도-에 강제로 끌려가 김용덕과 마찬가지로 가혹한 조치를 받아 생명이 위험했는데, 다행히도 그들 중에 강고부의 가마꾼이었던 자가 4명 있어 동학도가 술에 취해 나가떨어진 틈을 타서 야밤에 가마에 태워 몰래 보리밭 속에 숨겨 주었습니다. 기회를 틈타 탈출해 목숨을 건졌지만, 반쯤 죽다 살아난 터라 김용덕은 지금도 일어서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一 한양호를 이렇게 장시일 동안 그 지방에 머물게 한 것은 전주의 중군(中軍)이 인천항으로 올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一 처음 친군병(親軍兵)이 군산에 상륙했을 때, 청국인 10명 정도가 같은 전라도의 전주를 향해 떠났습니다. 그중 1명은 금색으로 수놓은 소매 장식을 붙이고, 또 1명은 비단옷을 입은 자로 두 사람 모두 말을 타고 있었습니다. 4명은 청나라 순포(巡捕)의 제복을 입었고, 나머지는 수병인지 순포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으나 총기ㆍ도검 등을 휴대한 것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 일행은 5월 16일에 돌아와 한양호를 타고 본함으로 갔다고 하는데, 비단옷을 입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또 순사 몇 명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一 포박될 때 모두가 구타당하여 다소 아팠지만, 이제는 통증이 없습니다. 一 군산에서 마쓰다(松田) 모(某)와 고야나기(小柳) 모(某)를 본 것 외에는 일본인도 청국인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一 청나라 군함에서 소증기선이 1회 육지로 왕복했지만 사관 등이 상륙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날 저녁 이 배는 식품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一 5월 22일 다시 법성에 갔을 때는 동학도의 폭민 등을 한 사람도 보지 못했는데, 강화 병사가 손으로 수령 1명을 포박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또 강화 병사는 법성에 상륙하여 바로 영광(靈光)을 향해 출발했다고 합니다. 一 영광군수는 쌀 공급을 위하여 해룡호(海龍號)에 승선해 법성과 영광 사이를 다니면서 자못 애를 쓰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나이가 겨우 30 내외지만 재간이 있다고 합니다. 一 한양호는 이번에 법성 및 곰소에서 공미 1,070포를 싣고 왔습니다. 해룡호가 쓸 석탄 50톤을 싣고 바로 군산으로 갈 예정이라고 합니다. 一 5월 18일 한양호 승선원이 조난당했을 무렵, 인천의 다나카 사시치로(田中佐七郞)가 소유한 인천마루(仁川丸)도 강 가운데에 정박하고 있었으므로 급히 알려서 다음 날 19일 인천마루는 닻을 올리고 군산으로 갔습니다. 동학도는 인천마루를 습격하려고 했으나, 앞바다에 나가 있었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상 참고를 위해 보고드립니다. 1894년 6월 2일 인천주재 2등 영사 노세 다쓰고로(能勢辰五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