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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동학당의 상황 東學黨ノ狀況
일러두기

전주민란의 근황 일본 거류지 제54호 이토 리사부로(伊藤利三郞) 고용 쓰에 베이사쿠(津江米作) 구술 올해 3월 7일 바닷길로 인천을 출발하여 3월 8일 군산에 도착, 다음 9일 이곳에서 강경(江景)ㆍ연산령(連山嶺)ㆍ가천(佳川) 등지를 거쳐 4월 15일 전주(全州)에 도착해서 체류한 지 1개월 정도 지난 5월 22일 전주를 출발하여 황산(黃山)에 이르러 황산 및 가천 사이에서 체류, 같은 달 28일 황산을 출발하여 충청도 노성(魯城)ㆍ공주령(公州領)을 거쳐 육로로 6월 1일 인천에 돌아왔습니다. 4월 15일 전주에 도착한 후 월말까지는 인심이 평온하여 아무런 풍문도 없다가 5월 1일경부터 동학당이 일어나 이미 전주에서 12~13리 내외 되는 곳까지 밀어닥쳤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다음 날인 2일에는 감영 병사 약 200명 정도가 화승총을 지니고 영문(營門)을 경호했고 관리가 출입할 때에는 반드시 3,4명의 호위병을 거느렸습니다. 또 매일 사격을 연습하여 상을 주는 등 자주 병졸을 고무시키는 것 같았습니다. 5월 4일에는 동학도 수천 명이 점차 감영에서 6리쯤 떨어진 금구(金溝)에 모여 시시각각 감영을 습격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있어 밤에는 인심이 술렁거렸습니다. 판관 민영승(閔泳昇)은 성 내외에 지시하여 거주민은 농ㆍ상ㆍ노ㆍ유(農ㆍ商ㆍ老ㆍ幼)의 구분 없이 한 가구당 1명씩 죽창을 들고 급히 진북정(鎭北亭)에 모이게 하였는데, 모인 사람이 약 7,000명-그중에는 12,13세의 어린아이와 60세 전후의 노인도 있었다고 함.-이었는데, 그중 1,000명씩 조를 짜서 영성(營城)의 문 네 곳을 나누어 지키게 하고 나머지는 지휘를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동 5일 아침 본인도 위와 같은 죽창부대 2,000명 정도를 보았으나, 어젯밤부터 오늘 오후에 이르기까지도 내습할 기미가 없었습니다.-왜냐하면 전주의 직할 민호 1만여, 성내 주민 2,000여 호, 성의 담은 석축으로 사방에 문이 있고 남서의 두 문은 매우 크고 동북의 두 문은 아주 작으며 성의 담은 높이가 약 1장(丈)이기 때문이라 함.- 6일 전주성(全州城)에서 3여 리 떨어진 ‘원평’까지 내습하였다는 보고가 있었으나, 이날도 무사히 지나고 다음 날인 7일에도 오로지 경계만 하는 모양이었습니다. 8일 금구부사(金溝府使) 및 감영의 중군(中軍)은 영병(營兵) 200명과 향병(鄕兵) 죽창부대 3,000명을 이끌고 백산(白山)으로 달려갔는데, 이곳에서 동학도 3,000여 명과-실은 600~700명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접전하여 영병 사망자가 130여 명에 죽창부대도 헤아릴 수 없이 전사하였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다음 날 9일부터 11일에 걸쳐 감영으로 도망쳐 돌아온 패잔병 등이 전하는 말에 의한 백산 싸움의 상황은 이러합니다. 8일 동학도는 솥발[鼎足]처럼 생긴 백산의 높은 언덕을 점거하여 세 군데에 진을 쳤으나, 그들이 지니고 있는 병기 중에는 원래 군대의 총도 다수 있었습니다. 영병은 이날 백산 기슭에 진을 치고 대치했으나 아직 싸우지는 않았습니다. 이때 남원부사(南原府使)의 원병으로 총잡이 50명이 합세했으나 모두 피로한 모습이었습니다. 영병의 배후에 주둔했는데, 밤이 된 후에도 이 1대는 모두 자는 모양이었습니다. 영병ㆍ향병 모두 다음 날 접전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경계를 게을리했으나 누가 알았겠습니까? 야밤의 어둠을 타고 홀연히 진중에서 포성이 요란하게 울리니 관병(官兵)이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낮에 남원의 원병이라고 한 것은 완전히 적군의 계략으로, 저들 50명의 총잡이가 연달아 총을 쏘며 돌격하는 것을 신호로 앞산에서 수백 명의 동학도가 돌격하자 이에 응하여 전후좌우 네 방향에서 돌진해 오니, 관병은 순식간에 크게 패하여 뿔뿔이 흩어졌다고 합니다. 패한 후 감영으로 도망쳐 돌아온 병졸은 물론 대관(隊官)들의 모습도 봉두난발에 옷은 먼지투성이라, 실로 눈으로는 볼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중군(中軍)도 관립(冠笠)이 망가져 상투머리에 맨발인 채로 탈출해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날 관병이 대패한 후 성안에서 다시 죽창부대 1,000명 정도가 동원되었는데, 이 1대가 곧 113명의 늙고 젊은 남자를 염주알 꿰듯이 새끼줄로 꽁꽁 묶어 전후좌우로 감시하며 감영으로 잡아온 것을 보았습니다. 이들 중에는 양민의 자제가 많았다고 하며 동학당은 겨우 몇 명뿐이었다는 것입니다. 9일에는 앞서 잡아온 피의자들을 조사하여 다음 날인 10일 60명을 방면했습니다. 11일 경군 990명이 군산에서 도착하였다는 설이 있었는데 실제로는 600명이라고 합니다. 이날 저도 경군이 도착하는 것을 보았는데, 초토사의 옆에 청국(淸國)의 해군 사관 같은 자 1명,-나사복(羅紗服)에 소매에는 금줄 하나를 달았습니다.- 기타 주단의 평복을 입은 자 3명 및 그 밖에 7, 8명 도합 11,12명의 청국인이 동행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감영 안에 도는 소문으로는 모두 17명이라고도 하는데, 이 중 5명은 모레 13일 군산으로 돌아간다고 하며 그 나머지는 초토사와 시종 동행하였습니다. 14일 진북정(鎭北亭)에서 조련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날도 현장을 목격하였는데 감사(監司)ㆍ초토사(招討使)와 동석했던 청국인 3명-주단 평상복-과 기타 순포(巡捕) 같은 자 4명, 합쳐서 7명을 보았습니다. 모두 붉은 비단 주머니에 넣은 장도와 서양 창을 지니고 있었고, 앞의 귀빈(貴賓) 3명은 17연발 신식 총을 소지하고서 연습을 끝낸 뒤에 자랑하듯이 이를 발사하였습니다. 이때 감사도 무라타총(村田銃)을 시험 발사하였습니다. 이 밖에 청나라 수병 등을 다시 보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당시 전주에서 들은 풍문에 의하면, 청나라 수병이 군산에 상륙하여 적의 뒤를 덮칠 계획이 있다는 한 가지였습니다. 이날 연습을 마치자 감사는 연무당(演武堂)에서 곧 연회를 베풀고 초토사와 청국 빈객을 대접했는데, 성대한 술잔치를 벌여 기생 수 명을 앉혀 놓고 구경꾼의 눈앞에서 음악을 연주하면서 크게 즐겼습니다. 때가 때인 만큼 이런 짓은 대단히 불쾌한 일이라고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날 밤 9시경 전임 완영(전주감영) 영장(領將) 김(金) 모(某)는 감영으로 가서 홍계훈(洪啓薰) 초토사를 만나 동학도의 기세가 급함을 설명하고 영병(營兵)을 청하여 한쪽을 진압해 줄 것을 상의했으나 홍계훈의 의견은 달랐습니다. 이것저것 논쟁이 일어나자, 홍계훈은 끝내 격노하여 친병에게 명해 곤장을 치고 김 모를 꾸짖었습니다. 이 때문에 김은 더욱 부끄럽고 화가 나서 항변하면서 굴하지 않으니, 홍은 마침내 노하여 측근으로 하여금 현장에서 김을 베어 죽이게 하여 영내(營內)의 소요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사고가 발생한 줄도 모르고 외출했다가 숙소로 돌아오는데, 어느 틈에 영병이 각 시가지를 경계하고 내 여관 앞에도 많은 사람이 주둔하여 엄밀한 조사 심문을 받고서야 겨우 집 안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이날 밤 김(金)이 효수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의 나이는 60세나 되는데 일찍이 동학도를 진압한 일도 있다고 하며 이 지방에서는 제법 저명인사였습니다. 영내에서는 그가 동학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품는 사람도 있고, 어쨌든 불쌍하게 되었다고 그 비참한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또 들은 바에 의하면, 감사와 초토사는 이래저래 생각이 달랐고, 김에 대해서도 두 사람의 의논이 서로 용납되지 않는 면이 있었다고 합니다. 15일에는 지난 8일 잡아온 죄수 중-이 중 60명은 전날 방면되었음.- 3명을 효수형에 처하고 기타는 모두 방면ㆍ석방하였습니다. 이 3명은 전적으로 동학도당이라는 것이며 어젯밤 참살된 김 모도 위 3명과 같은 곳에서 효수되었습니다. 16일 경군 200명이 야밤에 갑자기 영광(靈光)ㆍ무안(務安)으로 출발했습니다. 21일 다시 경군 200명을 파견하여 영광ㆍ무안 지방으로 출발시켰습니다. 22일 초토사가 몸소 남은 200명을 인솔하고 영광ㆍ무안으로 출진하였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때 동행했던 청나라 사관도 홍(洪)과 함께 갔다고 합니다. 전주에 머무르고 있는 경군(京軍)이 난폭하게 한 상황은 없습니다. 또 군대를 이탈하여 서울로 돌아간 자가 있다는 소문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직접 말하는 것을 들어 보면, 경군의 군량(軍糧)은 현금으로 지급하되 매일 병사 1인당 아침저녁 두 번은 밥값으로 각각 1문전(文錢) 30문(文)씩, 낮에는 술값으로 20문씩 합계 80문-일본 돈 12전 정도-을 지급할 뿐이라, 병사 중에는 하루에 한 번 밥을 먹고 나머지 밥값으로 탁주를 사 마시고 취하는 무리가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 병사는 누구나 3개월 전부터 그달 식량을 타지 못하여 서울에 있는 가족들의 생계를 걱정하는 자가 매우 많은 상태였습니다. 전주성(全州城) 내외의 주민 중에 동학당이 많을 것으로 생각되나 그들은 보통의 한복을 입고 있어서 식별할 길이 없습니다. 또 토병(土兵) 같은 경우도 현재 상황에서는 관가의 병사지만 죽어도 장사를 지내지 못하고 부상을 입어도 돌보지 않으며 힘껏 싸워도 포상하지 못하는 상황이므로, 형세에 따라서는 난당(亂黨)에 가담하는 일이 상당히 있을 것 같다고 합니다. 현재 영병(營兵) 한 사람은 백산 싸움에서 총알이 배를 관통했지만 충분한 치료를 받지도 못하고 감사로부터 1관문(貫文)-일본 돈 1원 50전-을 받고 제대했다고 합니다. 이상과 같은 상황으로 5월 1일 이래 전주(全州) 및 부근 지방은 인심이 흉흉하여 상점은 폐쇄되고 농부는 농사짓지 않고, 전주 시가에서는 다만 소량의 야채류를 팔 뿐이며, 일반 상거래는 완전히 중지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올해 조선의 벼농사가 아무리 풍작이더라도 전라도 한 도는 거의 기근이 든 해와 같을 것입니다. 이는 현지에 있으면서 목격한 실상과 지방의 조선인이 하는 말을 대조하여 추측한 것입니다. 다만 보리농사는 전라도 및 연도(沿道)의 곳곳이 거의 최상의 작황을 보였습니다. 전주의 쌀값은 5월 7일부터 8,9일까지 1되에 5문(文) 정도로 비쌌는데, 그 후 그곳을 떠날 때까지 그다지 변동은 없었던 듯합니다. 앞에서 기록한 죽창대(竹槍隊)는 경군이 도착하자 일단 해산했는데, 경군이 영광 지방으로 출발한 후 다시 5명에서 1명을 빼내 영성(營城)의 경호에 충당했다는 것입니다. 또 영내의 관리들은 여전히 근무하고 있었으며, 아울러 근방 지방 장관(地方長官)의 감영 이탈은 없다고 합니다. 이번 민란의 기원은 요컨대 올해 전라도 지방에서 공미(貢米)를 가혹하게 징수하는 것을 원망하는 동시에 전운사업(轉運事業)에 불만을 품고 있던 자가 일을 터트린 것 같습니다. 여기에다 종래 감사 및 지방관의 학정에 원한을 품은 자가 많았기 때문에 이러한 각 지방 백성의 원망과 불평을 근거로 동학도가 이에 편승한 것 같습니다. 전주에 머무르는 동안 마침 이곳에 있었던 일본인은 사카이 헤이조(酒井平藏)-경성 거류- 외에 사마귀 빼는 약을 판매하는 자 1명-40세 전후-뿐이었습니다. 또 청나라 행상 2명이 약간의 잡화를 성 밖에 진열해 놓은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충청도 연로 지방의 상민(商民)은 평온하다. 다만 공주 장날은 원래 전라ㆍ경상 2도의 상품을 대상으로 하는데, 근래에는 이 2도의 상인이 한 사람도 오지 아니하여 시장은 실로 쓸쓸하기 이를 데 없다고 합니다. 또 이 지방 인민의 동학에 대한 감정은 오히려 매우 좋은 편이지만, 내가 지날 때는 전라도 지방의 전황(戰況) 등이 아직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새로운 소식도 없으며 지극히 평온하였습니다. 연도의 황산 및 강경에서 만났던 일본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시라키 히코타로(白木彦太郞) 다나카 료스케(田中良助) 고야나기 요시하치(小柳嘉八) 오노 고베에(大野五兵衛) 나카후지(中藤) 모(某) 기노시타 사사이치(木下笹市) 오다카 시게타로(尾高茂太郞) 겐노(源野) 모(某) 쓰치가와 마사야스(土川政泰) 하세가와 가쓰조(長谷川勝藏) 마쓰다(松田) 모(某) 미키(三木) 모(某) 함석 세공(細工)업을 하는 성명 미확인자 1명 연령 21~22세 합계 13명 이상을 참고를 위해 보고드립니다. 1894년 6월 2일 인천주재 2등 영사 노세 타쓰고로(能勢辰五郞) 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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