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성 함락 후 관군(官軍)과 적군(賊軍)의 운동에 관한 휘보(彙報) 초토사(招討使)의 보고 장계. 양력 6월 2일 도착. 음력 4월 23일-양력 5월 25일- 황룡(黃龍) 장날을 전후하여 그들이 나주(羅州) 등지로 갈 것이라고 하여 추격하려고 했으나, 그들은 간사한 계략이 많기 때문에 완영(完營)-전주를 말함.-을 지키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25일-5월 29일- 군사를 돌려 완영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들이 장성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제각기 먼저 완영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금구(金溝)의 원평(院坪)에 이르렀을 때, 백성을 위문하러 나선 선전관(宣傳官)-5월 25일 보고한 잡보를 참조- 및 하인 2명과 윤지(綸旨)를 받아 보니 선유(宣諭) 종사관 이효응(李孝應), 배은환(裵殷煥) 등이 모두 피살되었다고 합니다. 어찌 이런 역적이 있겠습니까? 빨리 달려서 뒤쫓아갔으나 아직도 하루나 남아 있어 우리보다 먼저 그들이 완영에 도착하였고 완판(完判)-전주판관- 및 체백(遞伯)-전 감사-은 겨우 화를 면하고 다른 곳으로 도주했다고 합니다. 28일 진시(辰時, 오전 7~9시)경 완영의 앞산에 도착하여 진을 치고 전주성을 공격하여 유시(酉時, 오후 5~7시)까지 악전고투를 벌인 끝에 그들 중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자, 칼을 휘두르는 자, 천보총(千步銃)을 쏠 수 있는 자 30여 명을 격살(擊殺)했으며 그 밖에도 수백 명을 체포ㆍ참살하였습니다. 승리의 기회를 잡은 김에 성을 계속 공격하여 결국 함락하려 했으나 날이 저물어 퇴진하고 말았습니다. 저들은 술시(戌時, 오후 7~9시)경 불을 질러 성 안팎을 다 태우고, 그 괴수는 잔당을 모아 성채(城堞)를 굳게 지키고 대포를 쏘면서 항전했습니다. 이에 구름사다리[雲梯]를 이용하여 공격할 계획입니다. 저들은 이제 백성으로 대할 수 없으므로 마지막 하나도 남기지 않고 없애려고 합니다. 백성들은 그래야 조금 누그러질 것이니 하촉(下燭)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적의 기세가 너무 확대되어 후원이 반드시 필요하니, 청영(淸營)의 병사를 당일로 빨리 내려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이상의 보고문 중에 장성에서 대패한 것을 운운한 것은 대개 초토사가 꺼리어 이것을 은폐한 것 같습니다. 또 여기서 말하는 청영의 병사란 청주(淸州)의 병정을 지칭한 것입니다. 이 청영 병사의 후원에 관하여 충청감사는 아래와 같은 전품(電稟)을 했던 것으로 보아 초토사의 요청에 응하지 않으려는 것으로 짐작됩니다. 충청감사의 전보 말뜻이 비록 이와 같더라도-아마 초토사 청원의 말뜻을 지칭하는 듯함.- 청영 병정들은 태반이 병을 앓고 있고, 겨우 300여 명 중에서 200명은 옥천(沃川)과 은진(恩津)을 수비하고 그 나머지는 병영을 수비하고 있습니다. 은진과 옥천 또한 중요한 길목이므로 도와드리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어제의 전보는 비록 급하게 재촉했지만, 이 전보는 믿을 수 없을 듯합니다. 그러므로 청병(淸兵) 파견 여부는 구교(句敎, 훈령)를 기다려 본 뒤에 회답을 보낼 계획이며 그때 자세히 보고하기로 하겠습니다. 4월 그믐날(6월 3일) 신시(申時, 오후 3~5시) 충청감사의 전보 바로 정탐수교(偵探首校)의 보고를 받아 보니, 심병(沁兵)-강화병이다.-은 초토병(招討兵)과 한곳에서 만나 저들과 크게 싸워 승부를 결정짓지 못한 상태에서 금산(錦山), 진산(珍山) 등지로 향했다고 합니다. 다시 전보 동학도의 앞선 무리들은 먼저 여산(礪山)에 도착하였는데 장차 은진으로 갈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전보 4월 28일-양력 6월 1일- 신시(申時) 무렵 초토사가 군사를 이끌고 전주를 습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적의 무리 300여 명의 목을 베었습니다. 관군 사망자는 7명이고, 초토사의 편비(褊裨) 이교응(李教應)과 대관(隊官) 이학승(李學承)이 사망했습니다. 다시 전보 초토사가 저들과 전주에서 큰 싸움을 벌여 200여 명을 베어 죽이고, 갑옷 입은 자 30여 명을 쏘아 죽인 후 잠시 군대를 후퇴시켰습니다. 다시 초토사로부터 충청감사를 거쳐 보낸 전보 28일-양력 6월 1일- 진시(辰時, 오전 7~9시)에서 유시(酉時, 오후 5~7시)까지 전주로 전진하여 싸움을 벌인 끝에 갑옷과 투구를 갖춘 자와 천보총을 쏠 수 있는 적군 30여 명을 죽이고, 또 100여 명을 체포하여 죽인 후에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나 날이 저물어 퇴진했습니다. 음력 5월 2일(양력 6월 5일) 충청감사의 전보 초토사의 진(陣)은 용두산(龍頭山)에 있고 강화병의 진은 서문에 있으며, 저들은 성내를 점거하고 있는데 동정을 알 수가 없습니다. 다시 전보 초토사가 세 번 대접전을 벌여 전후에 걸쳐 저쪽 병사의 사망자는 300여 명이고, 관군 사망자는 500~600명입니다. 이상의 각 보고에 의하면, 초토사는 전날의 대패를 씻기 위하여 강화병과 힘을 합쳐 6월 1일-음력 4월 28일- 전주로 가서 난민들과 크게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성을 수복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만 관군 측의 보고에 의하면 이날의 전투는 관군이 승리한 것 같습니다. 윤지(綸旨) 선전관(宣傳官) 피해 1건 본건의 사실은 지난번의 보고 중에도 보이지만 별도의 보고에 의하면, 윤지를 받들고 선유(宣諭)하기 위해 내려간 선전관 이주호(李周鎬)가 적진으로 달려갔는데, 선유가 끝나기도 전에 난자당해 사람과 말이 모두 죽었습니다. 순변사의 진군 순변사는 처음에 공주로 가서 방어할 작정이었으나, 그 후 초토사가 승리하여 남문 밖에 진을 치고 나갈 길을 막고 있으며 적이 성안에 있다는 보고를 접하였으므로, 정부는 순변사에게 전보로 명령하여 곧바로 전주로 가게 했다고 합니다. (1894년 6월 7일 스기무라(杉村) 임시대리공사의 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