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대일 (58) 1984년 6월 13일 ○ 동학당의 상황 조선 파견 현황 보고 본 함(本艦)은 1894년 6월 10일 오후 9시 조선으로 파견한다는 명을 받고 바로 준비하여 11일 오전 1시 30분 사세보(佐世保)항을 출발, 같은 날 밤 8시 30분 부산항에 도착해 군함 오시마(大島)와 교대하여 이 항구에 정박했습니다. 부산항 총영사 무로타 요시후미(室田義文) 씨와는 항상 연락을 취하고 거류지 방어 계획 등도 역시 대략을 정해 두었습니다. 무로타 씨의 담화에 따르면, 부산 근방은 현재 조용하며 각처에서 도적이 봉기했다는 등의 소문은 자주 있지만 모두 그대로 받아들일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동학당 1명을 체포하려고 하자 토민(土民)이 화를 내 한때 떠들썩한 정도이며, 나아가 부산항으로 침입하는 등의 일은 결코 없습니다. 그렇지만 동학당인 자가 어디에 잠복해 있는지 미리 헤아릴 수 없어 불시의 대비는 필요불가결합니다. 뿐만 아니라 적이 충청도로 들어가면서부터 경성(京城)으로 통하는 전신선을 절단하여 불통이 되었으므로, 인천과 경성 등에 전신을 발송하기 위해서는 모두 상해(上海)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통신이 매우 불편합니다. 그러므로 일본의 확실한 소식을 얻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우연히 거류민의 상업을 위해 부산 부근에 왕래하는 무리가 길거리 소문을 가져오는 정도에 그쳐 동학당의 사정은 자세히 알기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합니다. 본 함은 오로지 동래부(東萊府) 부근에서 습격해 오는 적을 방지할 목적이므로 육전대(陸戰隊) 편제를 준비하고, 함포 발사선(發射線)을 부산성(釜山城)으로 통하는 도로로 향해 정박지를 선정해 정박했습니다. 현재 군령부장의 명에 따라 송도(松島)에 하선하여 암초 측량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동학당의 정황은 불편한 통신으로 인해 확실한 정보를 얻기가 어렵지만, 총영사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동학당은 전라도의 전부, 경상도의 진주를 함락하고 충청도로 들어가 공주를 함락시키고 나아가 경기도로 들어가려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동학당이라고 칭하는 자는 불과 1천 4~5백 명으로 그중 기마병은 백여 명입니다. 그 밖에는 도로의 토민(土民)이 한때의 기세에 편승해 갑작스레 봉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면천(沔川)에 상륙한 중국군은 동쪽으로 진격해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계에서 동학당을 방지하는 방책을 취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동학당은 중국군이 그 통로에 도달하기 전에 먼저 우회해 경기도로 나올 것이라고 합니다. 또 동씨(무로타)의 담화에 따르면, 러시아함 수 척과 약간의 러시아병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해 인천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러시아함이 나가사키(長崎) 시민에게 양식의 공급을 요구하였으므로, 그곳의 상인에게서 정보가 흘러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동씨는 현재 외무성에 사실 조사를 청구했으나, 아직 회답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곳의 무역 등에는 아직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습니다. 위 보고 가운데 동학당의 사정, 러시아함의 인천행 등은 단지 소문일 뿐 확실하지 않으나 다소 참고를 위해 보고합니다. 1894년 6월 13일 부산항에서 도리우미(鳥海) 함장 도코 세이지(東鄕正路) 해군대신 백작 사이고 쓰구미치(西鄕從道) 귀하 보일(報壱) (58) 1894년 6월 14일 대원군에 관한 건 나카무타(中牟田) 군령부장 앞 경성주재 야스하라(安原) 소좌 대원군은 몇 년 동안 은폐되었으나 항상 현재의 시정을 개탄하고 은밀히 그 정황을 탐명(探明)했다고 합니다. 최근 우리 영사관에서 이전부터 대원군과 사이가 가까운 와타나베(渡邊) 모(某)로 하여금 그 현황을 탐색하기 위해 면담하게 하였습니다. 당시의 문답필기를 구했으므로 참고를 위해 다음에 게재합니다. 순사 와타나베 다카지로(渡邊鷹次郎) 구두복명필기(口頭復命筆記) 1894년 6월 3일 대원군(大院君)을 만나 전라도 지방의 민란(民亂) 상황을 물어보았더니, 답(答) 대원군이 말하기를 “이번 백성들의 소요는 동학당(東學黨)이 아니라 농민들이 지방관의 폭정으로 인한 고통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봉기한 것이다. 그중에는 비범한 인물도 가담하고 있어 그 책략 행위가 놀랄 만한 경우도 많다. 아마도 쉽사리 진정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또 “경성(京城)에서도 반드시 봉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절박한 것은 아니다. 만약 봉기가 일어나게 된다면 민씨(閔氏) 무리는 뼈와 살이 남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번 일이 일본 공사관(公使館)에 해를 끼칠 염려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보증한다. 다만 공사(公使)와 영사(領事)가 이번에 민씨 무리와 자주 왕래한다면 혹시 그 해를 입게 될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문(問) “이곳에서 봉기한다면 그것은 민씨에 반대하는 무리일 것이고,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꽤 많지 않겠습니까?” 답(答) “민씨에 대해서는 모두 반대하고 있다. 민씨를 좋다고 말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다.” 문(問) “민씨의 정략을 옳지 않다고 반대한다 해도 그 주모자가 없다면 봉기하는 일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답(答) “민씨 집안 무리를 제외하고는 인물이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이곳에도 인물이 있으나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또 “조만간 청나라 군대 수백 명이 올 것이다.” 문(問) “그 일은 벌써 중지하기로 한 것으로 들었는데 어떠합니까?” 답(答) “중지한 것이 아니라 가까운 시일 내에 청군 수백 명이 법성(法聖)ㆍ군산(群山)ㆍ목포(木浦) 이 세 곳으로부터 올 것이 확실하다.” 주(注):소관(小官)이 지난 10일 입경하기 전에 이곳에서 불온한 소문이 있었으므로 시민들 가운데에는 피난 준비를 한 자도 얼마간 있었다고 합니다. 6월 4일 대원군을 만나 다음의 건을 물어보았습니다. 문(問) “원세개(袁世凱)는 한전(韓錢) 수만 냥을 사들이고 창고의 무기를 꺼내 오고 곡식을 1,000포가량 매입하였으며 이곳 상인에게 군복을 내준 것은 어떠한 연유입니까?” 답(答) “그것은 이곳에서 쓸 것이 아니고 전쟁터로 보내는 것이다. 상인에게 군복을 내준 것은 모두 병사이기 때문이다. 곡식은 1만(萬) 석(石)을 매입한다고 들었으나 1,000석이었을 것이다.” 주(注):이상의 한전과 곡류는 그 뒤 인천에서 아산 지방으로 회송되었다고 합니다. 또 상인이면서 군인 복장을 한 자가 당이사(唐理事) 30명을 데리고 이전에 공주를 향해 출장했다가 지난 12일 귀경했다고 합니다. 6월 9일 대원군을 방문했을 때 다음의 문답을 하였습니다. 문(問) “러시아의 출병(出兵)은 사실입니까?” 답(答) “그 일에 관해서 여러 가지를 탐지하였는데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조사한 것이 아니며 생각건대 민씨(閔氏) 일족 중에서 러시아에 출병을 의뢰한 것으로 본다.” 문(問) “이와 같은 일은 우스꽝스러운 일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청군을 불러들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러시아의 출병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이것을 다시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았더니 대원군은 냉소하며 다음과 같이 답했습니다. 답(答) “민씨 일족이 모두 일치된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한편으로는 청나라 군사를 청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러시아군에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각자 자기가 연결되어 있는 바에 따라서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민씨 일족 중에도 러시아에 북쪽 경계를 넘겨주려고 약속하는 등의 사실이 있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러시아에 북쪽 국경의 땅을 주겠다고 약속한 사실 등이 있지 않느냐. 그러므로 러시아에 출병을 요구한 일이 반드시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문(問) “동학도의 근황은 어떠합니까?” 답(答)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우두머리 2명은 이미 죽었고 전주(全州)도 회복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대원군의 문(問) “오토리(大鳥) 공사(公使)는 언제 서울에 도착합니까?” 답(答) “조만간 도착할 것이다.” 문(問) “공사는 이중당(李中堂)과 친한 사이가 아닙니까?” 답(答) “청나라에서도 공사로 오랫동안 재임했기 때문에 매우 친하게 지냈을 것이 틀림없다. 조만간에 공사가 부임하게 된다면 오토리 공사와도 잘 상의하셔서 민씨의 폐정(弊政)을 개혁하면 어떠하겠는가.” 대원군 답(答) “만일 오토리 공사와 이중당이 상의하여 우리나라의 국정을 개혁하려 할지라도 나는 그러한 일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12~13년 동안이나 세상일에 관계를 끊고 지내기 때문에 일단 구경하고 있는 정도이다.” 문(問) “조만간 일본 군대가 거류민 보호를 위해 온다고 하는데, 만약 그렇게 되면 청나라 군대와도 충돌이 없을 것이라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대인(대원군)께서 먼저 입궐하셔서 조처하시는 것이 어떠합니까?” 답(答) “내가 말하는 것은 한마디도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오히려 여러 가지 의심만 부를 뿐이다. 이러한 일로 대궐에 들어가는 일은 물론이고 만약 와서 이야기한다고 하여도 상담에는 관여하지 않을 생각이다.” 보일(報壱) (58) 1894년 6월 15일 동학도 정황 및 청병(淸兵) 출발에 관한 건 나카무타(中牟田) 군령부장 앞 경성주재 야스하라(安原) 소좌 양력 6월 12일 전라감사의 전보 전주성(全州城) 내에 있던 적도들이 각기 병기를 갖고 동북문에서 나와 사방으로 흩어졌다고 합니다. 방금 초토사(招討使)가 보내온 서한에 의하면, “사시(巳時, 오전 9~11시)에 전주성을 회복하고 감영으로 들어갔으므로 우선 전보합니다. 상세한 상황은 초토사의 공문을 기다려서 아뢰겠으며, 순변사(巡邊使)는 방금 이곳에 도착했습니다.”고 합니다. 같은 날 순변사 어제 사시(巳時)에 전주에서 도망친 적도는 당일 신시(申時, 오후 3~5시)에 600~700명이 깃발을 들고 포를 쏘며 창과 총을 갖고 김제읍(金堤邑)에 와서, 이교청(吏校廳)-관서(官署)- 여염(閭閻)-관리의 집-에 난입하여 밥을 차려 먹고 묵으려고 했습니다. 김제군수의 보고에는 “이처럼 보통 적의 형세가 갑자기 출몰하고 사라지는 일이 많으므로, 초토사는 양 통제영(統制營)의 병사로 나누어 전주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청국 군사를 호궤(犒饋)-양식 등을 운송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하고 5월 10일-양력 6월 13일- 공주(公州)로 출발한다는 보고를 이에 전달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양력 6월 13일 영접사(迎接使) 외무협판(外務協辦) 이중하(李重夏) 섭군(聶軍)-아산으로 상륙한 청국 병사-은 내일 출발하고 섭(葉)의 군대-아산으로 상륙한 청국 병사-는 모레 출발한다고 합니다. 군량과 대포는 이미 대부분 보냈습니다. 가서 섭지초(葉志超) 장군과 상의하여 완영-전주감영-의 도적들이 이미 흩어졌으니, 행군은 조금 기다리고 미리 정탐을 보내겠다고 했는데, 섭 장군은 “공주에서 친히 적의 형세를 살펴본 뒤에 군대를 이동할 것이다. 황제의 명령을 받들었으므로, 갑자기 돌릴 수는 없다.”고 답했습니다. 거듭 완곡하게 말을 했으나 전혀 듣지 않으니 양해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