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삼(軍三) (58) 1894년 7월 18일 ○ 동도의 반란 一 7월 19일 인천의 히라야마(平山) 야에야마(八重山) 함장이 해군대신에게 전달한 오시마(大島) 함장의 보고7월 18일 오후 7시경 오시마함이 풍도(豊島)에 정박 중 한 척의 조선 전마선(傳馬船)을 타고 온 일본인 1명이 왔습니다. 그 이름을 물었더니 히다카 도모시로(日高友四郞)라고 했습니다. 나가사키현(長崎縣) 잇키(壹岐) 사람인데 부산에 거주하면서 내지(內地)에서 행상(行商)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여러 가지를 심문하였습니다.올해 5월 16일 부산에서 조선 배를 임대하여 가이견(甲斐絹)ㆍ한랭사(寒冷紗)ㆍ카네킨(金巾) 등을 싣고 5월 31일 전라도 흥덕현(興德縣) 사포(砂浦)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 거의 2개월을 머물렀는데, 그동안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동학당은 지금 더욱 창궐하여 무장(茂長)ㆍ정읍(井邑) 등의 지방은 현재 동학당의 집결지가 되었고, 지방관 등은 이름만 있을 뿐 동학당에 좌우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음력 6월 4일-7월 5일- 사포를 출항하여 우도라고 부르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도 동학당 400명 정도가 있었는데, 갑자기 20명 정도의 같은 무리-어른과 아이들-가 흉기를 가지고 히다카(日高)가 타고 있던 배로 느닷없이 들어와 상품과 조선 돈을 합쳐 3,000원(圓) 정도를 약탈해 갔다고 하며-이때 배 두 척을 고용하고 있었습니다.- 현미(玄米) 70석(石)도 탈취하려 했다고 합니다. 또 아파서 배 안에 누워 있던 히다카를 육지로 끌어내 포박하고 매질하였으나 히다카는 굴복하지 않고 항변했고, 50원을 뇌물로 주고 쌀은 약탈을 면했는데, 현재 본선(本船) 뱃머리에 정박 중 조선 배에 옮겨 실어 놓았습니다. 그는 이튿날 풀려나 배로 돌아왔으나, 부산으로 귀항하는 것은 도리어 위험했기 때문에 일단 인천으로 가기로 결정하고 오늘 이곳으로 왔다고 합니다.-오늘은 7월 18일-동학당의 말을 들어 보면 부자의 소유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고 하나 사실은 저들의 사욕을 채우고 있을 뿐입니다. 동학당이 일본인을 혐오하는 것은 사실이고 따라서 동학당이 아닌 주민들도 자연히 그 분위기에 동화되어 행상하는 데도 매우 불편함은 물론 상법(商法)에 따라 영업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히다카(日高)를 포박할 때 협박하기 위해 가지고 온 무기는 화승총(火繩銃)으로 붉게 녹슬어 과연 사용할 수 있을지 의심할 정도였다고 히다카가 말했습니다.동학당이 전주를 버리고 갈 때 히다카도 그 광경을 목격했다는데, 그 병력은 4,000명 정도이고 이틀에 걸쳐 계속되었으며 그들은 경군(京軍)과 좋은 관계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히다카가 들은 소문에 따르면, 동학당은 현재 장성(長城)-지명으로 흥덕현에서 4리 정도-의 산 위에 양식을 모아 놓고 있다고 합니다.동학당은 지금도 여전히 말을 약탈하는 일에 급급하며 승마(乘馬)ㆍ태마(駄馬)를 가릴 것 없이 약탈해 갔다고 합니다. 그 무리는 지방의 인민에게 인심을 얻으려 하나 절반은 그들을 싫어한다고 합니다. 동학당 때문에 곤란을 겪는 것은 부자들이므로 일부 부자들은 재산을 싣고 해상으로 피난한다고 합니다. 저 무리가 쌀을 약탈할 때 1포대-일본의 9말[斗]-에 2원(圓) 70~80전(錢) 정도의 싼값으로 지방 인민들에게 팔아넘기는 이유 중 하나는 인심을 얻어 보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쌀을 판 돈을 사사로이 착복하는 데 있다고 합니다.군산의 창고-전라도와 충청도의 경계 지역-에도 2~3일 안에 동학당이 올 것이라는 소문이 있다고 합니다. 히다카는 무장(茂長)ㆍ정읍(井邑) 주변의 상황은 완전히 동학당의 세상이어서 동학당의 해산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별지의 포고는 히다카가 옮겨 적어 온 것으로 바로 동학당이 표방한 것입니다. 히다카 도모시로(日高友四郞)의 족적(族籍) 나가사키현(長崎縣) 이키노쿠니(壹岐國) 가이시무라(香椎村) 51번지 약탈당한 품목은 아래와 같음 한전(韓錢) 600관(貫) 일본의 900엔 가이견(甲斐絹) 200필(匹) 840~850엔 한랭사(寒冷紗) 12함(函) 80~90엔 명태 10태(駄) 90엔 (동학당 포고는 생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