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보 (58) 12월 30일 ○ 순천부(順天府) 부근 정찰보고 본함(本艦) 순천부 부근 순라(巡邏) 정찰보고 이달 22일 본함이 순천부 묘도(猫島) 서쪽으로 회항한 것은 이미 보고드린 바와 같습니다. 그 뒤 24일부터 항해사관(航海士官) 등에게 소증기선과 거룻배를 타고 좌수영 전면에 해당하는 돌산도(突山島)의 서쪽 해안 및 이 섬의 남쪽 해안에 있는 방도진(防蹈鎭),-해도에는 순천포로 잘못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좌수영 지방의 서쪽 해안에서 수로를 탐험하게 하였습니다. 이달 25일부터 본함은 거룻배를 보내 송도(松島)-해도에는 유리도[梳里島]-의 남쪽 수로를 우회해 순천부 옛 돌산진(突山鎭) 앞바다로 회항하여 육지로 보내 정찰하게 했더니 동학당은 없고 양민은 쓰쿠바(筑波) 육전대(陸戰隊)가 전쟁 이후 비로소 산간을 떠나 고향으로 귀가할 수 있게 되어 크게 감사의 뜻을 표했습니다. 이날 밤에 그 만(灣)에 정박하고 다음 날 항해장 등이 소증기선을 타고 수로를 탐험한 뒤 본함은 순천부 내 해창(海倉) 앞바다-순천부성으로부터 해창까지는 일본의 1리 반-에 정박했습니다. 해창에서 출항한 조선 배 2척을 억류하여 동학도의 사정을 심문하였더니 덕양(德陽)의 전쟁 후 바로 동학도가 순천으로 도주했고, 그날 이후 좌수영 방면에 출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바다가 얕아서 해창에서 일본의 척도로 3해리(海里) 정도 떨어진 해상에 정박했기 때문에 상세하게 정찰하기 어려웠고, 따라서 시위행동(示威行動)을 위해 25,26일 오후 함포 교련 사격을 시행했습니다. 위 조선 배에 승선한 한인(韓人)의 진술에 따르면, 25일 밤 동학당 도통령(都統領) 김봉준(金鳳俊)은 그 출생지 금구(金溝)로 돌아갔고 순천부에는 경상, 전라-영호(嶺湖)- 본부-대의소(大義所)-를 설치하고 본부장 김인배(金仁倍) 및 정우형(鄭虞炯) 이하 4~5천 명 이상이 모여 있다는 것입니다. 각설하고 22일 덕양(德陽)에서 일본군이 적의 진지에서 산허리까지 추격하였을 때 적은 퇴각하였으므로 산 정상의 사체를 확인하지 않고 곧바로 적을 추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적의 전사자가 얼마인지 확인하지 못했는데 각지를 정찰한 결과에 따르면, 4~5십 명은 전사한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그날은 전투 중 동학도가 덕양 방면 일본의 척도로 약 1리(里) 사방의 산야(山野) 등을 태웠기 때문에 사체를 확인하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날의 전쟁 이후 동학도는 세력을 크게 잃고 방어 자세로 돌아섰습니다. 순천부성은 해창 앞바다 본함의 정박지로부터 일본 리 4~5리나 떨어져 있으므로 육전대만으로 간신히 포위공격을 했기 때문에 수령을 추포(追捕)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해 일단 부산으로 귀항했습니다. 육군 수비대 및 경성공사관에도 통보하였고 부산수비대는 다행히 이번 달(12월) 30일 출발해 오는 1월 7일경에 순천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그러므로 본관도 조만간 좌수영을 순라(巡邏)할 전망이며, 이 내용을 보고하는 바입니다. 1894년 12월 30일 조선국 부산항 쓰쿠바(筑波) 함장 구로오카 다테와키(黑岡帶刀) 대본영(大本營) 해군 참모관 귀중 추신. 순천 부근은 해도(海圖)가 없으므로 지금까지 제대로 신속한 활동을 하기 어려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