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보 (58) 1월 ○ 구로오카(黑岡) 쓰쿠바(筑波) 함장의 보고 구로오카 쓰쿠바 함장 보고 지난 3일 본함(本艦)에서 정탐을 위해 나갔다가 4일 김(金) 절도사가 간첩 혐의로 좌수영에 연행해 온 동학도 정탱원(鄭撑元)을 소관(小官)의 눈앞에서 친히 심문했습니다. 지난 1일 밤 순천부(順天府)의 동학도들이 수령을 죽이고 다른 부현(府縣)에서 온 동학도를 내쫓았으므로 이 정탱원도 탈주해 온 자임이 분명합니다. 그 죄인은 좌수영에서 일본 군함과 영병(營兵)이 연합해서 순천을 공격할 계획이라는 것을 듣고 동학도가 놀란 나머지 분열했을 것이라고 진술했습니다. 그러므로 지난 3일 본 함대의 정탐 과정에서 본 순천ㆍ광양에서 온 사자(使者)가 소지했던 서류도 사실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김(金) 절도사는 지금까지 국왕이 여러 번 칙유(刺諭)를 내렸는데도 복종하지 않던 동학도가 이번에 갑자기 순순히 따르겠다는 뜻을 보인다 해도 그것을 쉽게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다시 본관(本官)에게 동학도를 진압하는 데 조력해 줄 것을 청했습니다. 따라서 이달 4일 좌수영에서 하동(河東) 앞바다를 거쳐 광양 앞바다로 회항, 다음 날인 5일 이른 아침부터 묘도(猫島)의 군함 정박지에서 약 2해리(海里) 떨어진 곳에 있는 광양현 하포(下浦)에 본 함대의 분견대(分遣隊)를 상륙시켜-미우라(三浦) 해군 대위와 다카키[高木] 해군 소위가 지휘하도록 했음- 이 포구부터 정찰하면서 광양성-하포로부터 우리 단위로 3리 남짓 되는 곳-으로 가게 했습니다. 또한 다나카(田中) 해군 소위가 1개 분대를 지휘하여 중간까지 보내, 본 함대와 연락을 취하게 하였습니다. 귀순한 관리와 인민들은 조선 악대(樂隊)를 시외(市外)까지 보내 앞장서서 이끌었으며, 성안으로 맞이해서 모두 순종하겠다는 뜻을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별지에 적은 것과 같은 효수(梟首)한 자들의 머리를 실제로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또 민포(民砲)-장병- 1,600명을 모아 하동부(河東府)와 마주한 광양현 하월포(下月浦)로 보내 동학도를 뒤쫓고 있다고 진술했습니다. 지난날 부산에서 순천으로 향했던 우리 1개 중대와 좌수영에서 남해현(南海縣)을 거쳐 하동부에서 우리 육군과 결합했던 100명의 조선 병사는 같은 날-5일- 오후까지 광양현에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 부대들이 하동부에서 섬진강(蟾津江)을 사이에 두고 월포(月浦)의 동학도와 교전했기 때문으로 생각합니다. 이주회(李周會)의 지휘 아래 신성포(新城浦)에서 우리 육군을 기다리고 있던 500여 명의 조선군도 5일까지 순천으로 단독 행군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순천 방면의 형세가 일변했으므로 당 함대는 일단 죽림포(竹林浦)로 회항해서 다시 이곳 부산에 닻을 내렸습니다. 뒷수습의 방책을 열심히 계획 중에 있습니다. 이상 삼가 보고드립니다. 1895년 1월 조선국 부산항 선임 함장 쓰쿠바(筑波) 함장 구로오카 다케와키(黑岡帶刀) 대본영(大本營) 1895년 1월 5일 군함 쓰쿠바(筑波)는 전라도 광양현 앞바다 정박지에서 광양현성(光陽縣城)으로 분견대(分遣隊)를 파견, 다음과 같이 동학당의 베인 머리(首級)와 시체를 검시하게 했음. 영호(嶺湖, 영남과 호남) 대접주(大接主)-즉, 경상, 전라 양도 도통령(都統領)- 전주 부근 금구(金溝) 사람 김인배(金仁培) 영호 수접주(首接主)-즉, 경상, 전라 통령- 순천 사람 유하덕(劉夏德) 이 두 사람은 효수(梟首)되었다. 광양현(光陽縣) 봉강(鳳岡) 접주 박흥서(朴興西) 그 외 대략 40명은 총살되었다. 순천부 억저(臆底) 접주 김가(金哥) 그 외 4명은 포박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