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보 (58) ○ 통상(統相)의 회유(回諭) 요즘 세상의 거칠고 소란스러움이 생민(生民)의 병으로 인한 고통이나 생활의 곤궁보다 심하다. 이를 어루만져 위로하고 품어 지키는 까닭을 생각하여 잠 못 이루고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오로지 보국제민(輔國濟民)의 일을 생각해 능히 부끄러움을 느끼고 한탄하지 않을 것인가? 여러 가지 폐해와 각종 노역을 바로 면제해야 할 것을 어찌 오늘을 기다려 비로소 이를 면제하려고 생각하는 것인가? 만약 경영(京營) 설치를 위해 새로이 백성의 폐해를 늘리는 것이 있다면 어찌 조목조목 말하지 않는가? 그 영(營)을 설치한 뒤 수백 년 동안 영(營)에 소비하는 바를 가지고 민폐라고 말하지만 이를 존폐하는 것은 정부에 달려 있다. 정부에 잘 호소해야 할 것이다.-이하 한 구절은 원문이 불명확하다.- 지금의 민정(民情)을 보면 속히 구제를 행하여야 할 것이다. 잠시라도 어지럽고 막히는 일 없이 각기 편히 쉬게 하라. 대의소(大義所)로 하여금 이와 같은 도를 행하게 한다면 반드시 서로 협력할 것이다. 이에 유고(諭告)한다. 58 1895년 9월 21일 조선 내지(內地)의 적도에 관한 보고 이번 달 2일 보고 후 평양사령부로부터 특파한 탐정의 보고에 따르면, 상원(祥原)의 적은 그 실제 숫자는 187명으로 집기와 재물을 실은 소와 처자식을 데리고 14일 수안(遂安) 방면으로 떠났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그곳에 머물고 있으면 일본군이 와서 공격할 우려가 있으니 속히 해주(海州)를 점령함이 상책이다 하였으므로 그들이 무리지어 있던 오십봉(五十峰)의 가옥은 18일 밤 촌민이 불을 질러 태웠습니다. 또한 적도가 구실로 삼는 바는 양민을 범하지 않고 단지 간관(奸官)을 제거함이 주된 생각이라고 하였습니다. 어제 오후 평양의 미즈노(水野) 대좌로부터 추가로 다음의 전보가 도착했습니다. 상원군수(祥原郡守)의 보고에 따르면, 음력 7월 26일 적도 97명이 오십봉에서 내려와 당일 34명이 서흥령(瑞興嶺)을 거쳐 상원군 동현령(東峴嶺)으로 갔습니다. 63명은 27일 수안(遂安) 신적동(新積洞) 등에 이르러 숙박했습니다. 다음 날 소 5마리를 빌려 기계를 적재하고 황주(黃州) 양촌지(楊村地)로 가서 소 5마리를 송환했습니다. 그 뒤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다. 단지 구월산 또는 해주로 가는 것이 목적일 것이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이상 보고드립니다. 1895년 9월 21일 남부병참감 다카이 노리요시(高井敬義) 병참총감 자작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 귀하 58 1895년 10월 2일 조선 내지 적도 패주의 보고 전보 [10월 2일 오후 7시 38분 어은동(漁隱洞)발같은 달 3일 오전 0시 20분 착] 어은동 아스카이(飛鳥井) 병참사령관 가와카미 병참총감 지난번 보고한 ‘조쥬산’의 적은 지난 30일 해주 관병이 그들을 포위하고 불을 질렀기 때문에 평안도로 도망쳤다는 황주(黃州)주재 이모리(飯森) 소좌의 보고가 있었습니다. 조선보(朝鮮報) 58 1896년 1월 17일 전보 [1월 17일 오전 11시 20분 인천발같은 달 같은 날 오전 0시 25분 착] 가흥(可興)에 있는 미야케(三宅) 대위의 전보에 따르면, 원주군(原州郡)에서 폭도가 봉기해 관아를 점유하니 군수는 충주로 도피했고 관찰사(觀察使)가 진압을 위해 두 차례 출병을 청했습니다. 당 병참부에는 병사가 적어 이에 응할 수 없었는데 그 정황을 정찰하기 위해 군조 이하 5명을 오늘 17일 아침 원주로 파견했다는 내용의 보고가 있었습니다. 인천 다카이(高井) 병참감 가와카미 병참총감 조선보 58 1896년 1월 17일 전보 [1월 17일 오전 11시 15분 인천발 같은 달 같은 날 오후 0시 15분 착] 낙동(洛東)지부장의 보고에 따르면, 지난 15일 안동부(安東府) 관찰사로부터 부근의 인민이 단발이 싫다고 집합해 불온한 상태이므로 출병 보호 요청이 왔으나 거절했습니다. 13일 의성(義城) 부근에서 우리 측량반을 습격하였는데 어쩌면 이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해평(海平)에서 파견한 정찰 및 당 병참부에서 파견한 조선인의 보고는 아직 없습니다. 또 측량반이 갈 안동부는 위험할 수 있기 때문에 어제 정찰을 목적으로 하사 이하 7명을 안동으로 파견했다고 합니다. 인천 다카이 병참감 가와카미 병참총감 조선보 58 1896년 1월 21일 1896년 1월 22일 육부(陸副) 제1호 전보 [1월 21일 오후 5시 30분 경성발 7시 20분 착] 원주에는 이전에 공주 지방으로 행군한 1중대를 돌려 다시 홍주(洪州)의 폭도 진압을 위해 친위대로부터 1중대가 오늘 출발했습니다. 정찰 인원에 간호수 1명을 추가했습니다. 우사가와(宇佐川) 중좌 가와카미 중장 조선보(朝鮮報) 58 1896년 1월 26일 전보 [1월 26일 1시 10분 경성발 10시 55분 착] 24일 행군연습중대(行軍演習中隊)에 소속된 구라타(藏田) 대위가 오전 9시 정남(正南) 온양 부근에서 보낸 보고가 어젯밤 도착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22일 온양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별다른 이득 없이 임의로 퇴각했습니다. 적병은 그 뒤 안동을 향해 퇴각하였으므로 추적하고 있습니다. 또 그 전투에서 부상자 4명을 살렸고, 소관(小官)은 머리에 상처를 입고 총알이 박혔지만 매우 가볍습니다. 기호(騎虎)의 기세여서 도중에 돌아가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경성 우사가와(宇佐川) 중좌 가와카미 중장 조선보(朝鮮報) 58 1896년 1월 30일 전보 [1월 30일 오후 1시 50분 경성발 같은 달 같은 날 오후 2시 30분 착] 친위(親衛) 1중대를 춘천 지방으로 파견하기로 했습니다. 일반례에 따라 특무조장 1명과 하사 1명에 대한 파견 허가를 청합니다. 우사가와 중좌 가와카미(川上) 중장 조선보(朝鮮報) 58 1896년 1월 31일 육부(陸副) 제4호 전보 [1월 31일 오후 6시 경성발 같은 날 오후 7시 착] 홍주(洪州) 지방의 폭도는 진정되었습니다. 안동(安東)의 적은 지난 30일 밤에 격파하고 현재 인민을 위로하고 다독이는 내용을 담은 구라타(藏田) 대위의 보고가 있었습니다. 동관(同官)에게는 치료를 위한 귀대를 명했습니다. 우사가와 가와카미 중장 조선보(朝鮮報) 58 1896년 2월 7일 전보 [2월 7일 오후 0시 47분 부산발 같은 날 오후 2시 착] 가흥(可興)의 미야케(三宅) 대위의 보고에 따르면, 1. 여주(驪州)에서 폭도가 봉기했기 때문에 전선(戰線)을 감시하기 위해 인천에서 파견된 상등병 이하 4명이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하사 이하 9명을 그쪽으로 파견했다고 합니다. 2. 장호원(長湖院)에서 온 보고에 따르면, 공사를 하기 위해 가흥을 떠났던 인부 2명이 여주 부근에 이르렀는데 폭도에게 피습되어 장호원으로 도망쳐 돌아왔습니다. 3. 여주 감시소에서 도망쳐 온 조선인의 말로는 “5일 여주 장날에 폭도 수백 명이 모여 감시소의 인부 2명을 살해했을지 모른다. 그 밖에 측량수 1명, 통역 1명, 기타 일본인 2명도 습격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했습니다. 이를 요약해 보면 전신선을 절단한 것은 폭도들의 소행일 것입니다. 따라서 가흥에서 파견한 하사 이하 9명의 병사와 이천(利川)에서 출장 온 부대가 협력해서 폭도를 격퇴하고 신속히 전신선 공사를 끝내도록 명령했습니다. 이후의 정황은 아직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상 보고합니다. 부산 이즈노(伊津野) 병참사령관 가와카미 병참총감 58 1896년 2월 7일 전보 [2월 7일 오후 10시 50분 인천발2월 10일 오전 9시 10분 부산발2월 10일 오전 10시 55분 착] 이천(利川)병참지부장으로부터 다음의 보고가 있었습니다. 여주(驪州) 부근에서 측량수와 통신공부(電信工夫)가 폭도에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있었으므로 지난 5일 오후 7시 정찰을 위해 군조(軍曹) 이하 11명을 파견했는데 여주에서 수천 명의 폭도와 만나 교전하였으나 폭도가 다수여서 공격하지 못하고 6일 오후 3시에 돌아왔습니다. 정찰대에는 이상이 없으며 사상을 입은 폭도는 약 7~8명으로 보입니다. ○ 측량수 2명, 통신공부 4명, 일본 상인 1명은 살해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 장호원(長湖院), 이천(利川)의 중간 촌락에도 폭도 수천 명이 집합해 있어 우편물은 불통이라고 합니다. ○ 또 여주로부터 3리 거리에 있는 측량수 5명, 통역 1명도 폭도에게 습격을 당했고, 그 가운데 2명은 부상을 입은 채 돌아왔으며 나머지 4명은 행방불명이라고 합니다. 인천 다카이(高井) 병참감 가와카미 병참총감 조선보 58 1896년 2월 7일 전보 [2월 7일 오후 2시 55분 부산발 같은 날 오후 5시 30분 착] 가흥(可興)의 미야케(三宅) 대위로부터 다음의 보고가 있었습니다. 오늘 오후 5시 반 야스오카(安岡) 특무조장의 보고에 따르면, ‘세이안리’-여주의 남쪽 3리-에 있던 측량수 4명, 통역 1명, 인부 1명이 6일 오전 7시 폭도 수백 명에 포위되어 권총으로 대적한 끝에 적 3명을 죽이고 그 가운데 2명은 부상을 입고 간신히 이천으로 돌아왔고 그 밖의 4명은 폭도에게 살해당했을지도 모릅니다. ○ 여주에 있던 전신공부(電信工夫) 4명, 측량수 2명, 일본 상인 1명이 폭도에게 살해당했습니다. ○ 6일 장호원에서 돌아온 병졸의 말에 따르면, 장호원과 이천 사이에 있는 촌락에 폭도 수천 명이 모여 있어 우회로를 통해 돌아왔습니다. 같은 날 출발한 우편부도 도중에 돌아왔습니다. 지금 우편은 불통입니다.-이 보고는 우회로를 통해 보냅니다.- ○ 5일 여주에 파견된 기쿠치(菊池) 군조(軍曹) 이하는 6일 아침 여주에 도착해 3시간 동안 폭도와 싸웠습니다. 적은 수천 명으로 그 기세가 자못 맹렬해 우리 군 9명으로 격퇴하지 못하고 오후 3시 반 이천으로 돌아왔습니다. 적의 사망자 8명, 우리 병사는 무사합니다. ○ 이상과 같은 정황이므로 먼저 우편선로(郵便線路)를 회복하고 이어서 전신선 공사에 착수하기 위해 다카기(高木) 조장(曹長) 이하 12명-공부, 인부 포함-을 출발시켰습니다. 장호원을 거쳐 우편선로 근방의 적을 쫓아내고 이천의 부대와 합류해서 다시 여주의 적을 격퇴할 예정입니다. ○ 어제 이곳에서 출발한 부대로부터는 아직 어떤 보고가 없습니다. ○ 각 수비병 인원이 적어 병사를 파견하기에 매우 곤란하다고 합니다. 이상과 같은 정황이므로 낙동(洛東) 및 태봉(台封) 수비병 가운데 25명을 가흥으로 임시 파견하고 대구수비병을 통해 낙동, 태봉의 결손을 보충할 것을 명했습니다. 이상 보고합니다. 부산 이즈노(伊津野) 병참사령관 가와카미 병참총감 조선보 58 1896년 2월 8일 [2월 8일 오전 5시 55분 부산발 같은 날 오전 7시 45분 착] 부산 이즈노 병참사령관 가와카미 병참총감 가흥(可興)에 있는 미야케(三宅) 대위의 보고에 따르면, 여주로 향한 오카자키(岡崎) 군조(軍曹)가 오후 7시 돌아와 보고한 전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 오늘 오전 8시 여주로 들어가려 했을 때 앞쪽 산자락에서 2~3명의 보초(步哨)를 보았습니다. 더 전진했을 때 보초가 총을 발사하여 응전했는데 적의 수가 점점 불어나 약 500명 정도였습니다. 우리 군사들이 2시간 30분 동안 대적했지만, 우리 측은 총을 가지고 있는 자가 5명에 불과해 위태로운 지경에 빠질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퇴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적도 사상자가 10여 명 발생하였고 전주(電柱)가 60개 남짓 잘려 쓰러져 있었습니다.-여주의 남쪽- 그 폭거가 대단했고 근방의 민심은 매우 불온했습니다. 여주 이북 전선의 피해는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이상 보고합니다. 58 1896년 2월 8일 전보 [2월 8일 오후 11시 20분 부산발9일 오전 3시 착] 가흥에 있는 미야케 대위의 보고에 따르면, 7일 장호원의 다카기(高木) 조장(曹長)으로부터의 보고에, 장호원과 이천 사이의 적은 ‘세이아린’ 방면에 이르렀습니다. 우편선로가 조금 통했습니다. 따라서 이천의 부대와 함께 오늘 밤 12시 이곳을 출발해 ‘세이아린’의 적을 협격하고 이어서 여주의 적을 공격할 예정입니다. 7일 야스오카(安岡) 특무조장의 보고에 따르면, 여주의 적은 관사를 빼앗고 그곳에 자리를 잡아 그 기세가 매우 창궐합니다. ‘세이아린’에서 습격당한 측량수는 모두 부상당해 도망쳐 와서 경성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이상 보고합니다. 부산 이즈노 병참사령관 가와카미 병참총감 58 1896년 2월 8일 전보 [2월 8일 오후 10시 인천발(우편)같은 달 12일 오전 11시 30분 부산발같은 달 12일 오후 1시 25분 착] 여주 지방의 전신선이 단선되었으므로 수리 원호를 위해 경성임시전신부(京城臨時電信部)에서 공부(工夫)를 파견하고 용산수비대에서 하사 이하 8명을 오늘 오후 파견했습니다. 이상 보고함. 인천 다카이 병참감 가와카미 병참총감 조선보 58 1896년 2월 9일 1896년 2월 10일 육참(陸参) 제26호 전보 [2월 9일 오후 11시 45분 가흥발2월 10일 오전 1시 20분 접수] 장호원(長湖院) 이북 병참선로는 폭도로 인해 폐색(閉塞)되었으므로 본관은 경성으로 가지 못하고 당분간 이곳에 머물겠습니다. 9일 오후 가흥(可興) 사이토(齊藤) 대위 대본영(大本營) 쓰치야(土屋) 대좌 조선보 58 1896년 2월 9일 1896년 2월 10일 육참(陸参) 제25호 전보 [2월 9일 오후 11시 45분 가흥발2월 10일 오전 1시 20분 접수] 본관은 오늘 가흥에 도착했습니다. ○ 이 지방 폭민의 상황은 이즈노(伊津野) 소좌가 보고할 예정이라 상세히 적지 않겠습니다. 여주 부근의 폭도는 더욱 증가해 창궐하고 있습니다. 오늘이나 내일 중에 태봉, 낙동에서 모두 25명의 추가 병력이 도착할 예정이지만 현재의 상황에서 이 병력으로는 격퇴할 가망이 없습니다. 또 많은 병력을 조령(鳥嶺) 이남으로부터 불러들이게 되면 이 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산재한 각 수비지역이 습격당할 우려가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이곳 수비대장은 어쩔 수 없이 경성으로 밀사를 보내 18대대에 응원을 요청했습니다. ○ 조령 이북 송파진(松坡鎭)까지의 수비병은 71명으로 6개소에 나뉘어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한 지역에 10명 내외입니다. 현재 절박한 상황이므로 가장 가까운 제18대대에 응원을 요청함이 지당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9일 가흥 사이토 대위 대본영(大本營) 쓰치야 대좌 58 1896년 2월 9일 전보 [2월 9일 오후 8시 15분 인천발(선우(船郵))같은 달 12일 오후 0시 부산발같은 달 같은 날 오후 3시 착] 지난 5일 이후 여주(驪州) 부근 및 이천(利川), 곤지암(昆池岩)의 중간에 폭도가 모여 있는 건에 관해서는 이미 5차례의 보고를 전보로 보냈으나 우편과 전신이 모두 불통되어 바닷길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앞서 보낸 5차례의 보고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여주 남쪽에서 전신주 60개를 절단하고 그 북쪽에서도 손해가 심한 상태인 것으로 보아 기세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인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천, 가흥 등지에서 약간의 부대를 보내고 또 태봉(台封), 낙동(洛東)에서도 약간의 부대를 가흥으로 보내 폭도를 격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병력이 소수여서 그 목적을 달성할지는 예단할 수 없습니다. 또 오늘 전신선을 수리하기 위해 경성임시전신부에서 건축수(建築手)를 파견하는 것과 관련해 용산수비대에서도 하사 이하 8명을 파견하였습니다. 그러나 폭도를 초멸(剿滅)하지 않으면 전신의 수리는 수포로 돌아갈 것이므로 그들을 진압하고자 하나 각지의 수비대가 부족한 탓에 목적을 달성할 수 없어 그저 방관하는 분위기입니다. 따라서 조선국 친영대(親營隊) 또는 경성수비대를 파견해 폭도를 진정시켜 주도록 고무라(小村) 공사에게 건의하였으나 경성수비대를 움직이는 것은 좋은 방책이 아닙니다. 또 친영대는 현재 ‘신센’-불분명하나 어쩌면 춘천을 가리키는 것인가.-의 폭도를 공격하고 있는데, 그곳이 진정된 다음에 여주 방면으로 보낼 터이니 일단은 대구 또는 낙동의 수비병을 가흥으로 보내기 바란다는 답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닷길로 통신을 할 배가 없으니 편선(便船)이 마련되는 대로 대구와 낙동의 병사를 가흥 방면으로 보내야 할 것이라는 내용을 이즈노(伊津野) 소좌에게 전달할 생각입니다. 이상 일단 보고드립니다. 인천 다카이 병참감 가와카미 병참총감 58 1896년 2월 9일 전보 [2월 9일 오후 9시 20분 부산발 같은 날 오후 10시 10분 도착] 장호원(長湖院)에서 온 소식에 따르면, ‘세이안’으로 향한 적이 이미 여주로 진출했습니다. 장년들이 거기에 가담해 마을 안에는 부녀자뿐입니다. 여주의 적은 더욱 창궐합니다. 곤지암(昆池岩)에서 전해 온 소식에 따르면, 분원감시소(分院監視所)가 폭도의 습격으로 위험해져 상등병 이하 3명 및 공부(工夫)는 철수했고 곤지암에서 2리 떨어진 곳에서 폭도 약 2백 명을 만나 잠시 싸우다 적이 후퇴했습니다. 준공부(准工夫) 1명이 중상을 입고 곤지암에 돌아와 죽었습니다. 광주(廣州), 양근(楊根) 지방에 폭도가 많다고 합니다. 이상 보고드립니다. 부산 이즈노(伊津野) 병참사령관 가와카미 병참총감 58 1896년 2월 10일 전보 [2월 10일 오전 0시 10분 부산발같은 날 오전 3시 17분 도착] 가흥(可興)의 미야케(三宅) 대위로부터 다음과 같은 보고가 있었습니다. 경성공사에 보고-사이토(齋藤) 참모도 동의- ○ 9일 오전 5시 반 여주(驪州) 부근에 도달한 정찰대(20명)의 보고에 의하면 “우리 척후병이 적의 보초와 충돌하여 교전에 들어갔는데 적의 기세가 매우 맹렬하여 퇴진했고, 이때 근처에 있는 촌락에서 모두 적에게 호응한 탓에 간신히 장호원(長湖院)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때가 오후 1시인데 장호원 근처의 인민들도 모두 적도에 가담한 것 같았으며 도처에 적도가 아닌 사람이 없었습니다.”라고 합니다. 이상과 같은 상황으로 미루어 생각건대 여주의 적도에 가담하는 자가 나날이 늘어 그 세력이 급격히 증가하는 데다 연도선로(沿道線路)의 인민도 가담하고 있는 형국인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얼마나 더 큰 세력이 될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미 우편선로가 불통되었습니다. 현재 해당 지역의 수비대 인원은 송파진(松坡鎭)에 9명, 곤지암(昆地岩)에 9명, 이천에 16명, 장호원에 8명, 가흥에 19명입니다. 오늘 태봉(台封)에서 온 자가 8명, 내일 낙동(洛東)에서 올 자가 17명이며 기타 안보(安保) 이북에서는 급히 해당 지역에 응원할 만한 병력은 없습니다. 이 정도의 병력을 가지고는 우세한 적도를 격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편선로의 개통도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귀지(貴地)에서 적절한 병력을 파견해서 이들을 하루빨리 격퇴하여 우편선로를 개통하고 아울러 전신선 가설공사가 빨리 이루어질 수 있도록 조치해 주기를 희망합니다. 이상은 병참감(兵站監)에게 보고할 여유가 없어 특히 귀관(貴官)에게 본인의 의견을 보고드리는 바입니다. ○ 이상의 보고는 조선인을 통해 길을 우회해서 보내는 것이니 도착하지 못하거나 또는 도착이 늦어질 우려가 있습니다. 위 정황에 관해 전신선 보호를 위해 대구에서 가흥으로 1개 소대를 파견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사이토(齋藤) 참모가 9일 가흥에 도착하여 당분간 머무를 것입니다. 이상 보고드립니다. 부산 이즈노 병참사령관 가와카미 병참총감 58 1896년 2월 10일 2월 10일 특사를 통해 원산발 전보 [2월 12일 오후 6시 20분 가흥발9시 8분 착] 안동에 있는 구라타(蔵田) 대위로부터 지난 2일 예안(禮安)에 잔적(殘賊)이 있으므로 이를 격퇴하려 한다는 보고가 있었는데 전신선이 절단되었기 때문에 그 뒤에는 보고를 받지 못했습니다. 친위 3중대로 하여금 오늘내일 중에 춘천 지방의 적도를 공격할 예정입니다. 여주 부근에도 적도가 봉기하였습니다. 전신선이 절단된 곳은 이곳에서부터 남쪽입니다. 경성 우사가와(宇佐川) 중좌 가와카미 중장 조선보 58 1896년 2월 11일 전보 [2월 11일 오후 6시 20분 부산발2월 12일 오전 7시 착] 오늘 오전 10시 중대장 이하 117명-군의 1명, 간호수 1명, 인부 15명-이 가흥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사이토(齋藤) 참모는 선로가 아직 개통되지 않았지만 되는 대로 경성을 향해 가흥을 출발했습니다. 이상 보고합니다. 부산 이즈노 병참사령관 가와카미 병참총감 58 1896년 2월 11일 전보 [2월 11일 오전 1시 부산발같은 날 오전 2시 착] 여주 부근의 폭민이 더욱 증가하여 심하게 창궐하고 있는데 전신선을 파괴한 탓에 수(數) 리(里)에 걸쳐 피해를 입고 있으나 현재의 수비병만으로는 격퇴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곳 수비대 제1중대-1소대, 1분대가 빠짐-를 가흥에 파견하기로 하였습니다. 이상 보고합니다. 부산 이즈노 병참사령관 가와카미 병참총감 58 1896년 2월 12일 1896년 2월 13일 육참(陸参) 제29호 전보 [1896년 2월 12일 오후 6시 15분 부산발(원산으로부터 우편)1896년 2월 12일 오후 11시 접수] 지난 8일 폭도 수백 명이 철령성(鐡嶺城)으로 진행하여 빈번하게 발포했습니다. 그들을 격퇴하기 위해 9일 오전 8시에 전투를 시작했는데 그 뒤 소식이 없습니다. 이상 보고합니다. 10일 오후 5시 원산 나카가와(中川) 소좌 대본영(大本營) 쓰치야 대좌 58 1896년 2월 12일 1896년 2월 13일 육참(陸参) 제31호 전보 [1896년 2월 12일 오후 6시 40분 부산발(원산으로부터 우편)1896년 2월 12일 오후 8시 10분 접수] 원산(元山) 남부에서는 앞서 보고한 바와 같이 폭도가 봉기하여 30리 사이의 전신이 파괴되어 보고할 길이 두절되었습니다. 경성을 우회하여 두세 차례 특부(特夫)를 세웠으나 경성과 부산 사이 역시 불통이라고 들었습니다. 이번에 해로(海路)를 통한 통신편을 얻지 못한다면 어쩌면 보고할 시기를 잃을 우려가 있습니다. 정기선(定期船)은 오는 24일 전에는 입항하지 않으므로 원산 부산 사이의 항로에 임시로 배를 보내줄 것을 청합니다. 11일 오전 4시 원산 나카가와 소좌 대본영(大本營) 쓰치야 대좌 58 1896년 2월 12일 1896년 2월 13일 육참(陸参) 제28호 전보 [1896년 2월 12일 오후 6시 40분 부산발(원산으로부터 우편)같은 날 오후 11시 접수] 다마이(玉井) 대위 일행 10여 명이 길주(吉州)에서 토민(土民)에게 심한 폭행을 당해 부상을 입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대위는 일행과 함께 단천(端川)으로 철수하여 아침 7시에 돌아왔습니다. 우리 군은 지금 단천에 주둔하고 있지만 지휘가 쉽지 않기 때문에 대위와 협의를 한 다음 쌍방의 인원을 서둘러 돌아오게 할 예정입니다. ○ 이전에 청구한 헌병의 건은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임무상 남북의 상황에 따라 헌병은 더욱 필요하므로 특히 다시 논의해 줄 것을 품신(稟申)을 겸해 보고합니다. 10일 원산 나카가와 소좌 대본영(大本營) 쓰치야 대좌 58 1896년 2월 12일 1896년 2월 13일 육참(陸参) 제30호 전보 [2월 12일 오후 6시 40분 부산발(원산으로부터 우편)같은 날 오후 11시 접수] 전신선을 수리하기 위해 파견한 공부(工夫) 보호를 겸해 지난달 28일 다카히사(孝久) 군조(軍曹)에게 상등병 2명, 졸(卒) 3명, 공부 2명, 군역부(軍役夫) 1명을 데리고 강원도로 출발하게 하였습니다. 일행은 전신선을 수리하면서 낭천(狼川)으로 나아갔는데 폭도가 봉기해 파괴한 것이 수십 리에 달해 수리할 가망이 없어 철수하던 도중 지난 4일 오전 9시 회양(淮陽) 남쪽의 신안(新安) 비탈길 지척지간에서 폭도 등 4백여 명으로부터 불시의 요격을 당해 치열하게 발포했습니다. 군조는 부하를 지휘해 즉각 응전하였으나 폭도들이 모두 총기를 휴대하여 탄환이 비와 같이 쏟아졌습니다. 그곳에서 군조는 전사하고 부하가 분전했으나 모두 부상을 당해 진퇴가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 가운데 역부(役夫) 1명이 머리에 중상을 입은 채로 그곳에서 도망쳐 지난 7일 돌아와 보고했습니다. 이 역부의 말에 따르면, 군조 외에도 모두 그 자리에서 전사한 것으로 인정됩니다. 그보다 앞서 2일에 폭도가 봉기한 것을 듣고 다카히사 군조 일행을 염려하여 이마이(今井) 조장(曹長)에게 군조 이하 10명과 함께 회양 남쪽에 있는 탄감리(炭甘里)로 보냈는데 6일 오전 8시 폭도 1천여 명이 사방에서 요격했습니다. 우리 군이 이에 분전해 폭도 수십 명을 죽이고 후방을 격퇴하고 회양으로 철수했으나 인가와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때 우리 상등병 1명이 부상당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하고 다시 지난 7일 오후 다니(谷) 소위 이하 40명이 회양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안변(安邊) 이남에서는 모두 폭도에 가담했습니다. 따라서 고산(高山)을 향해 병사 10명을 추가로 파견해 중간에서 모든 일을 처리하게 하였습니다. 이상 부산을 통해 보고합니다. 10일 원산 나카가와 소좌 대본영(大本營) 쓰치야 대좌 58 1896년 2월 14일 2월 14일 오전 10시 45분발 인천(우편) 전보 [2월 16일 오전 9시 30분 부산발같은 날 오전 11시 10분 착] 곤지암(昆池岩) 수비대장으로부터 다음의 보고가 있었습니다. 11일 경성발 우편물을 12일 이천으로 보냈는데 광연(廣硯)에서 폭도에게 빼앗기고 우체부[脚夫]는 무사히 도망쳐 돌아왔습니다. 이 보고에 따라 즉각 광연으로 병사를 파견해 격퇴했습니다. 폭도는 광연에 집합해 곤지암을 습격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오늘 10시 러시아 장교 2명, 수병 1명이 측량 기계를 휴대하고 경성으로 향했습니다. 어제 오후 러시아 수병용 화물 11개-모포 약 100매-를 경성으로 보냈습니다. 이상 보고합니다. 인천 다카이 병참감 가와카미 병참총감 58 1896년 2월 16일 2월 16일 [오전 11시 15분 부산발오후 1시 8분 착] 12일 이후 안주(安州) 부근에서 폭도가 봉기했습니다. 지금 통신소가 위험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측량부원과 함께 평양으로 철수할 것을 명했습니다. ○ 13일부터 개성 부근에서도 봉기하여 측량부가 포위당할 위험이 있으므로 감시소의 인원을 철수했음을 보고합니다. 가와무라(川村) 제리(提理) 데라우치(寺內) 장관 58 1896년 2월 17일 1896년 2월 17일 육참(陸參) 제32호 전보 [2월 15일 오후 7시 20분 부산발2월 15일 오후 9시 10분 착] 오후 5시 가흥(可興)의 미야케(三宅) 대위로부터 다음의 보고가 도착했습니다. 여주(驪州)의 적정(賊情)은 그 뒤에도 달라진 사실이 없습니다. 영월(寧越), 평창(平昌)의 적들이 제천(堤川) 부근에 모였는데 관찰사로부터 그들 중 일부가 이미 청풍군(淸風郡) 황강(黃江) 근처에 도착했고 장차 충주를 습격하려는 상황이라는 급보가 와서 지금 하사 이하 12명을 충주부(忠州府)에 파견했습니다. 죽산현(竹山縣)과 노은(老隱, 가흥에서 서쪽으로 3리 떨어진 곳. 무극[無極]으로 통하는 길)에서도 봉기할 징조가 있어 정탐 중입니다. 지금 곤지암(昆池岩) 및 이천(利川)에서 온 보고에 의하면, 12일 오후 곤지암을 출발한 우체부가 광연(廣硯)에서 적을 만나 우편물을 탈취당하고 간신히 도망쳐 돌아왔습니다. 그곳의 수비병도 이들을 공격하였고, 때마침 이천에서도 수비병을 파견하여 마침내 이를 격퇴하였습니다. 이천과 장호원, 간당바위[カンタンパイ] 부근에 적의 출몰이 끊이지 않고 있어 아래와 같은 계획을 세웠습니다. 현재는 우편선로(郵便線路)를 개통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따라서 각 수비지의 경계가 더욱 중요합니다. 오늘 도착한 요시카와(吉川) 소위가 내일 장호원으로 진격해서 먼저 우편선로에 있는 적을 소탕하고 이어서 여주 부근을 정찰하고 17일 도착할 다나카(田中) 대위가 이끄는 부대를 기다렸다가 적의 근거지인 여주를 공격할 예정입니다. 부산 이즈노 병참사령관 대본영(大本營) 58 1896년 2월 18일 전보 [2월 18일 오후 1시 25분 부산발같은 날 오후 2시 25분 착] 충주는 17일 오후 5시 100명의 폭도에 의해 점령당했고 인가(人家)의 과반수가 소실되었습니다. 오후 7시 다나카(田中) 대위가 이끄는 2소대가 충주 부근에 도착해 오늘 새벽 공격을 실행할 예정입니다. 충주 서쪽은 전선(電線)이 파괴되었다고 주민[土人]이 말했습니다. 이상 보고합니다. 부산 이즈노 병참사령관 가와카미 병참총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