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당에 관한 특별보고 1894년 9월 30일 부산에서 중로(中路)병참감 요시카와 노부요시(吉川宣譽) 1. 공병 제6대대 제1중대의 일부가 동학당과 싸운 것은 이미 그 개략을 전보를 통해 상신하였는데, 그 상보(詳報)를 수집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공병 소위 고토 우마지로(後藤馬次郞)가 부하인 하사 병졸 25명, 일본 인부 12명을 데리고 용궁(龍宮)으로부터 문경(聞慶)으로 나아가는 도중-이전에 다케우치(竹內) 기병 대위가 조난당했을 때 일단 조령(鳥 嶺) 근방에 있었던 야전공병에게도 명을 내려 일시 후원을 하게 했지만 그 뒤 해 당 공병은 인천에 집합할 것을 명받았기 때문에 돌아가는 도중이었을 것입니다.- 9월 28일 오전 9시경 ‘세키몬’-20만분의 1 지도에는 지명이 없습니다. 문경으로부터 5리 동쪽에 해당합니다.-에서 동학당을 만나 전투를 개시했습니다. 적은 그 수가 약 6백 명으로 매우 요해지에 자리를 잡고 견고하게 방어하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좌우로 척후를 보내고 중앙의 요도(凹道)로 전진해 3백 미터 거리의 지점에서부터 발포하였습니다. 적도 맹렬하게 발포하였지만 마침내 무기를 버리고 사방으로 흩어져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예천(醴泉)과 소야(蘇野)-문경의 동북쪽 약 2리의 갈평(葛平)으로부터 4리 북쪽에 해당합니다.- 쪽으로 도망간 것 같습니다. 우리 군 사상자는 없고, 적은 사망자 2명을 유기했습니다. 이자는 훌륭한 갑옷의 겉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두목으로 이자가 죽었기 때문에 패배하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 밖에 부상자는 다수 있었지만 한 명도 남겨 두지 않았습니다. 단지 도로 위에 혈흔이 많은 것으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진지에 자리 잡은 가옥 11채는 모두 불태웠습니다. 노획품은 화승총 103정, 칼 4자루, 창 3개, 말 2두, 한전 9관문 이외에 기타 다수의 무기를 확보했지만 인부가 부족해 짐말 6마리분 정도를 문경으로 가져왔습니다. 기타는 도중에 버려두었기 때문에 문경사령부에서 곧바로 하사 및 인부 20명을 파견해 이를 수집하는 데 착수했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또 용궁 부근에서 혈흔이 떨어진 지면을 고토 소위가 주워 왔다고 합니다. 다케우치(竹內) 대위가 소지한 것일 것입니다. 또 도망간 적은 다른 부대로 하여금 추적해 공격할 것을 명했습니다. 2. 9월 29일 대구에서 헌병 1명에게 변장을 시켜 통역을 수행해 탐정으로 보냈는데 대구 동쪽 3리의 지점에서 한인 약 30명에게 습격을 당해 돌을 던지면서 2리 정도를 추격당해 간신히 도망쳐 돌아왔습니다. 따라서 곧바로 미야케(三宅) 보병 대위가 수비병 10명을 이끌고 출장해 폭도 3명, 촌리(村吏) 1명을 포박해 돌아왔습니다. 대구에서 현재 심문 중입니다. 3. 경상도 안동의 사대당에 관해서는 지난번 보고한 대로입니다. 기타 전라도 각지의 동학당은 음력 8월 27일-양력 9월 26일- 남원에서 대공론장을 열 것이므로 집회하라는 내용의 격문을 사방에 보냈고 이미 집회하는 자도 수만 명이 됩니다. 각자 무기를 지니고 곳곳에 횡행(橫行)하여 무리가 아닌 사람의 재산을 강탈하므로 행로는 위험하여 여행자의 통행이 거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전라도 운봉(雲峯)-경상 전라 양도의 경계-의 영장(營將)은 병력을 요소에 파견하여 수비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동학당이 경상도로 들어오지 않도록 방어하고 있다고 합니다.경상도 진주는 지난번 그 영내에 동학당이 봉기하였지만, 목사(牧使)와 병사(兵使)가 효유(曉諭)하여 진정되고 종식되었다고 합니다. 경상도 의령(宜寧)에서도 민란이 일어나 관장(官長)을 축출하고 속리(屬吏)의 집을 불태웠습니다. 경상도 기장(機張)에서도 음력 8월 27일-양력 9월 26일-부터 각 마을의 인민이 당을 일으켜 당외자(黨外者)의 집 8~9호를 불태웠습니다. 각 마을의 인민이 이를 두려워해 모두 집합하여 음력 9월 1일-양력 9월 29일- 관청으로 몰려와 호소하였다고 합니다. 4. 앞의 내용은 모두 탐정을 하여 얻은 바로 한인이 말하는 바를 모두 믿을 수는 없지만 곳곳에서 민란이 봉기하여 불온한 상황을 드러낸 것은 의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각 사령부에는 모두 더욱 경계하고 위험한 지점에는 병력을 증원하고 예비 탄약을 보냈습니다. 사방을 정찰 수색하게 해 우리 병참로의 안전을 꾀하는 것에 분주하였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전신선의 절단이 계속 발생하여 참담하고 분하며 매우 황송합니다. 이 때문에 밤낮없이 엄밀히 순회 단속을 명해 수상한 자는 바로 격살(擊殺)하게 하려 합니다. 이미 그제 28일 낙동에서 전신주를 쓰러뜨린 한인 1명을 참살(斬殺)하여 두루 내보이게 하였습니다. 이상 보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