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당 여문(餘聞) 이번 달 2일 용산을 출발해 광주, 이천, 죽산, 진천, 청주 등을 거쳐 9일 전주에 도착하였습니다. 전라감영을 방문해 동학당의 수령으로 세상에 알려진 김봉균(金鳳均)을 다음 날 저녁 김이 보낸 사람의 안내로 포정국(布政局) 뒷방에서 면회하고 3시간 남짓 필담을 하였습니다. 김봉균은 일명 전명숙(全明叔)이라고도 하는데, 내가 면회할 때는 김으로 칭했습니다. 아마도 김(金)은 실제 성이고, 전(全)은 거짓 성일 것입니다. 나는 방에 들어가 붓을 잡고 통성명하고 어느 친구로부터 전에 그 인물과 포부를 들어 갈망하고 우러르는 마음을 금할 수 없어 이번에 경성에서 찾아와 방문한 취지를 알리고 이어서 내 소지(素志)와 동양의 현 상황, 조선의 실상, 진정(眞正) 윤리의 주의, 진정 경제의 주의를 말하며 오늘날에 대처하는 방법 수단을 논하고 김(金)의 교시를 청했습니다. 김도 역시 두세 차례 사양하며 듣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내가 도한(渡韓)한 이래 느낀 바를 가지고 말을 하였더니 김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습니다. “우리들은 단지 민가(閔家) 일족이 요로를 차지하고 있어 위세와 권력을 휘두르고 사복(私福)을 함부로 하는 것을 보고 개탄을 금할 수 없어 연래(年來)에 동지를 규합하여 이를 물리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여러 차례 정부에 이를 호소하였지만 일체 채용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민가 안에서 우리들의 호소하는 바람을 가로막고 전하에게 전달되지 못하게 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마침내 임금 측의 간신을 제거할 것을 명분으로 삼아 거병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거병은 뜻하지 않게도 매개가 되어 오늘날 일본과 청의 병란을 조선에서 보기에 이른 것은 우리들이 천추의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다행히 일본이 높은 뜻을 가지고 자주 우리 정부에 권고하여 마침내 그 여력을 통해 우리나라를 위해 힘을 다해 수고하여 이미 민가를 물리치고 대원군을 일으켜 폐해를 고치고 정법(政法)을 바르게 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많은 부분이 달성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반대로 생각을 바꾸어 일상의 업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렇지만 일본이 하고자 하는 바, 대원군이 하고자 하는 바를 우리들이 아직 상세히 알지 못해 마음을 평안히 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열심히 동지가 말썽을 일으키려는 것을 억제함과 동시에 우리 정부의 움직임을 알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지난번 공(公)-나를 가리킴.-의 지인 여러 명과 만나서 여러 가지 가르침을 받아 실로 오랫동안의 미몽(迷夢)에서 벗어났습니다. 오늘 다시 공의 내방을 받아 크게 나의 지혜와 식견을 늘리니 감격을 그칠 수 없습니다.” 내가 질문하여 말하기를, “족하(足下)는 충의(忠義)의 선비로 일본이 하고자 하는 바, 대원군이 하고자 하는 바를 상세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아직 마음을 편안히 할 수 없다고 하셨는데 내가 실로 느끼는 바입니다. 단, 오늘날 조선의 쇠폐(衰弊)함으로 오로지 민족(閔族)의 행위와 같이 말하는 것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바입니다. 대체로 나라가 망하는 것은 망하는 날이 아니고 그 쇠함은 쇠하는 날이 아닙니다. 오늘의 조선이 있는 것은 수백 년 동안의 정법의 폐해가 자주 일어났지만 이를 혁신하는 자가 없이 헛되이 옛것을 지키고 세계의 대세를 달관(達觀)하지 못하고 인습이 오래되어 마침내 이러한 슬픈 처지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민씨 일족의 행위는 미워할 만한 것이지만 이것은 단지 똥 속의 구더기일 뿐입니다. 공(公)은 똥을 퍼서 버리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헛되이 구더기를 죽이려고 합니다. 내가 공을 위해 아쉬워하는 바입니다.” 김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정말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똥을 버리는 방책은 나는 아직 생각하지 못했던 바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이러한 졸렬함을 비웃더라도 원래 어쩔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공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여기에서 나는 더 여러 가지를 이야기하였습니다. 김은 시종 묵묵히 보면서-내가 종이에 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 다가와 얼굴색을 바꾸며 말하기를, “당신이 말하는 것은 신하가 입에 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것을 실행한다면 대의는 어찌 되고 명분은 어찌 될 것입니까?” 아직 김이 깊은 마음을 자세히 밝히지 않으므로 나는 이성계의 전기-내가 도항할 때 여러 책 또는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전해 내려오는 말을 가지고 편찬한 것- 한 통을 품에서 꺼내어 보여 주었습니다. 김이 두세 줄을 묵독하고 갑자기 나에게 돌아앉아 입을 다물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 소매를 붙잡고 이를 제지하며 붓을 들어 “족하는 들으시오. 왕도를 부르짖고 서경과 은의 탕왕과 주의 무왕을 즐겨 읽는 것은 과연 어째서입니까.[聞足下常唱王道好讀書經殷湯周武果爲何事]”라고 크게 썼습니다. 김은 다시 자리에 앉아 숙독하며 잠시 묵묵히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눈빛이 심상치가 않고 혹은 나의 얼굴을 쳐다보고 혹은 다른 곳을 돌아보며 입술 끝이 조금 떨렸습니다. 이로부터 화두를 바꾸어 전주를 다시 함락시킬 때의 상황 또는 최근 이야기되는 동학도 재기(再起)의 진위를 물었습니다. 김이 말하기를 “전주에서 도망친 것은 경군(京軍)에게 대항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동학도가 재기했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각 주현(州縣)을 횡행하는 자는 우리 동지의 이름을 훔친 자이고 그들에 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 등등.” 나아가 서양 사정을 묻고 답하고 제공한 술과 고기를 먹고 작별을 고하고 감영(監營) 문밖의 여관으로 돌아왔습니다. 11일 이른 새벽 김이 나의 숙소로 찾아와 내 면전에서 어젯밤의 필담서를 찢어 불 속에 던지고 한전(韓錢) 10속(束) 정도를 주었습니다. 나는 사양하며 받지 않았습니다. 오전 10시 전주를 출발했습니다. 이날 아침 다시 김과 필담하였는데, 그것은 청일전쟁의 이유와 시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전주로부터 용담(龍潭)으로 갔습니다. 부산 상인에게 편지를 부탁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전주로 돌아가 또다시 청주로 나와 귀경길에 오르려고 하였으나 사정이 있어 길을 돌려 보은(報恩), 화령(化寧) 등을 지나 15일 상주(尙州) 능암리(綾巖里)의 최시형(崔時亨)을 방문했으나 없었습니다. 김의 소개장과 편지 한 통을 남기고 나왔습니다. 문경(聞慶)을 거쳐 마령(馬嶺)을 넘어 유곡(幽谷), 연풍(延豐), 충주(忠州)를 지나 지난 20일 오후 6시 경성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번에 간 것은 실은 동생의 소식을 알기 위한 것이었는데 도중에 동생의 친구를 만나 안심했습니다. 김을 방문한 것은 제2의 목적이었지만 지금으로부터 생각하면 김을 방문한 일만 있었던 것 같은 모양이 되었습니다. 김의 풍채를 보면 연령이 40세 정도, 얼굴은 조금 네모나고 성긴 수염이 길게 자랐으며 눈에는 일종의 이채(異采)가 있었습니다. 글을 쓸 때는 입을 약간 삐죽이고 잠시 생각하며 읽은 뒤 나에게 내밀었습니다. 아는 것은 넓지 않지만 한인 가운데에서는 드물게 보는 박식자입니다. 이는 항상 외부 사람을 즐겨 접하고 이야기를 들으려는 자일 것입니다. 자못 담대하고 지식이 있으며 또 일에 얽매이지 않는 기풍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보통 한인과 마찬가지로 시기심이 깊으나 단지 보통 한인과 같이 말과 행동으로 널리 드러내지 않을 뿐입니다. 잘 생각해 약점을 은폐하고 결코 이를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군자도 아니고 영웅도 아니고 또 원래 간사한 인물도 아닙니다. 겉으로 차갑고 속으로 뜨거운 일개의 호남입니다. 이상 기억을 더듬어 참고로 제공합니다. 9월 21일 성명 추신. 노상의 거짓 동학도 이야기는 왕왕 귀에 들리지만 실제 목격한 일은 한 번도 없습니다. 전라감사가 정치를 시행함을 제대로 하고 있다면 병력을 빌리지 않더라도 소멸될 것은 물론입니다. 김에 대해서는 지금 다소 칭찬을 하고 싶지만 일단 있는 대로 말씀드립니다. 우리 정부의 주선에 따라 이를 등용한다면 한인의 행복일 것입니다. 요컨대 한인 가운데에서는 드문 남자입니다. 이상 일독하시기 바랍니다. 1894년 9월 23일 육군 포병 소좌 와타나베 데쓰타로(渡邊鐵太郞) 상석 해군 참모관 전보 [10월 1일 오후 1시 35분발같은 날 오후 5시 20분 착] 동학당 공격을 위해 낙동(洛東)으로부터 처음으로 나온 보병과 공병 50여 명은 시다(志田) 견습사관이 이끌고 용궁(龍宮), 예천(醴泉), 안동(安東) 부근을 정찰하고 도중에 적 4명을 죽였습니다. 안동에서도 조선군을 내보내 적은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따라서 적의 막사를 불태우고 천막 2개, 창 2자루를 획득해 어젯밤 낙동으로 돌아왔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일시 진정된 모습이지만 다시 어디인가 모여 있을 것입니다. 탐정을 게을리하지 않고 물리치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부산 후루카와 병참감 가와카미 병참총감 상석 해군 참모관 전보 [10월 9일 오후 8시 인천발같은 달 10일 오전 5시 35분 부산발같은 달 같은 날 오전 10시 30분 착] 지난번 이후 동학당에 관해 낙동 부근 각 병참사령관의 보고에 따르면 안동, 예천, 용궁 쪽은 먼저 진정되었지만 풍기, 단양, 보은군 지방은 아직 동학당의 소굴로 중국인이 수십 명 참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현재 부근 병참지로부터 헌병 수비병을 파견하고 있습니다. 이는 깊이 고려하기에 충분하지 않지만 살피건대 아산(牙山) 잔병(殘兵)의 선동에 의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지난번 이후 보은 지방 외에서도 중국인 12명을 포박하여 지금 인천으로 호송 중입니다. 상세한 것은 나중에 보고하겠습니다. 인천 이토(伊藤) 병참감 가와카미 병참총감 상석 해군 참모관 비(秘) 신문에 게재를 금한다. 전보 [10월 10일 오전 10시 45분발같은 날 오후 4시 40분 착] 다음 전보를 외무대신으로부터 수취했습니다. 합당한 처분이 있기 바랍니다. 답장을 기다립니다. 내지에 파출된 조선 경찰관의 확실한 정보에 따르면, 전라도 동학당의 대군은 부산으로부터 35리의 거리에 있는 하동을 빼앗아 지방 장관은 도주했습니다. 이 동학당은 세력이 더욱 창궐하려고 하고 가까운 이웃 지방은 전혀 수비가 없으므로 각하에게 다른 생각이 없다면 본관은 이곳 병참부장과 상담해 폭도를 무찔러 없애고 그 수령을 체포하기 위해 일한(日韓) 경찰관은 데리고 출병하려고 합니다. 외무대신 편 무로다(室田) 영사 인천 고다마(兒玉) 육군 차관 가와카미 병참총감 비(秘) 상석 해군 참모관 전보 [10월 11일 오전 3시 50분 부산발같은 날 오전 6시 15분 착] 제3호의 전보 잘 받았습니다. 하동의 동학당은 창원, 김해, 남해-진해일 것이다.- 등지에 점차 진입할 조짐이 있으므로 영사와 대략 협의해 두었습니다. 또 논의에 착수할 것입니다. 부산 이마바시(今橋) 소좌 가와카미 병참총감 상석 해군 참모관 전보 [10월 18일 오후 5시 10분발같은 날 오후 10시 50분 착] 경성에서 이곳 영사에게 알려 준 바에 따르면, 전라도 창의군(彰義軍)이라고 칭하는 일본인 격퇴 소탕을 주의로 하는 폭도가 봉기해서 경성으로부터 조선군과 우리 군 2개 소대가 파견되었다고 합니다. 또 지난번 하동 방면으로 내보낸 척후의 보고가 아직 도달하지 않았습니다. 소문에 폭도는 이미 하동을 물러났다고도 합니다. 또 진주에도 일부 폭도가 있다고 합니다. 모두 아직 믿기 어렵습니다. 척후의 확실한 보고를 받아 가능한 한 폭도의 근거지를 공격해 일거에 징계를 가하려고 합니다. 또 멀리 전라도에 병사를 보낼 경우가 된다면 병참로의 수비와 전신선 보호를 돕기 위해 얼마간의 추가 병력을 청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미리 상신을 해 둡니다. 부산 이마바시 소좌 가와카미 병참총감 전보 [10월 22일 오전 8시발같은 날 오전 10시 착] 동학당은 지금 진주 부근에 있습니다. 그 수는 자세히 모르지만 4~5천 이상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 가운데 강요에 의해 참여한 자도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진압을 위해 장교 이하 150명과 조선 순사 몇 명을 파견했습니다. 자세한 것은 서면으로 보고하겠습니다. 부산 이마바시 소좌 가와카미 병참총감 전보 [10월 26일 오후 3시 50분 문경발같은 날 오후 4시 15분 부산발같은 날 오후 5시 착] 오늘 아침 6시경 동학당 2천여 명이 안보(安保)병참지부를 공격해 사방을 포위하고 여러 곳에 불을 지르면서 격렬히 사격했습니다. 수비병 38명으로 고전한 끝에 겨우 격퇴했습니다. 지금도 추격 중입니다. 적으로 인해 전신이 절단되어 병참감에게 보고할 수 없었으므로 직접 보고합니다. 문경 데와(出羽) 소좌 대본영 상석 해군 참모관 비(秘) 전보 [10월 27일 오후 6시 50분 경성발같은 달 28일 오전 7시 부산발같은 달 같은 날 정오 접수] 이노우에(井上) 공사 나베시마(鍋嶋) 서기관 다음 전신을 총리대신에게 전달할 것. 10월 25일 밤 안보(安保)병참부가 동학도 때문에 소실되었다고 합니다. 아마 그런 원인으로 전신선이 불통된 것 같습니다. 동학당은 충주 부근에 크게 모이고 있습니다. 충주에서 동쪽으로 약 4리 떨어진 서창(西倉)이란 곳에 2만 명, 보은(報恩)에도 또한 많은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며칠 내에 충주를 공격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가흥(可興)의 남쪽 약 1리의 거리에 있는 내창(內倉)에도 그들의 한 무리가 있어 우리를 공격할 계획이라는 소문이 있으므로 근방의 인민이 크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용산에서 보낸 원병이 10월 26일 도착하였으므로 내창의 동학당을 쫓아내고 그런 뒤 충주를 향해 행진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병력이 미약하므로 낙동과 용산으로부터 더 원병을 보내주기 바랍니다. 동학당의 현 상황은 위와 같이 가흥에 있는 후쿠토미(福富) 대위가 이토(伊東) 중좌에게 보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10월 25일 인천에서 귀 대신(大臣)에게 전보한 그대로 5중대를 파견하는 것은 무엇보다 필요하며 지금이야말로 동학당을 토벌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언제쯤 위의 5중대가 파견될 수 있습니까? 이상은 본 공사가 청구한 위의 군대가 도착할 때까지는 경성의 수비병은 물론 순사까지 파견하여 동학당에 대응하도록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나라의 수도는 완전히 수비할 수 없게 되고 따라서 주한 영국 총영사에게 영국의 해군 또는 홍콩의 수비병을 불러들이는 좋은 구실을 제공하게 될 것입니다. 또 본 공사가 이곳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위에서 말한 것은 이전에 영국 총영사가 기도한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부디 본건은 바로 대본영의 평의에 부치도록 서둘러 조치가 있기 바랍니다. 사정이 절박해 귀 대신에게 직접 전보를 보낼 필요가 있으므로 본건은 귀하가 외무대신에게 연락하기 바랍니다. 상석 해군 참모관 비(秘) 전보 [10월 29일 오후 6시 20분 인천발같은 날 오후 8시 5분 부산발같은 날 오후 10시 착] 전에 이천의 감옥에 가두어 두었던 동학당 10명은 감옥을 파괴하고 도주를 계획하였으므로 이들을 모두 총살했습니다. ○ 28일 가흥의 수비병은 내창-가흥 동쪽 약 2리-, 서창-충주 동쪽 약 4리-의 동학당을 물리치고 총기, 창, 화약, 납 등의 노획품은 즉각 태워 버렸습니다. ○ 낙동 쪽의 동학당 수천 명이 선산(善山)에 모여 사령부를 공격하려는 상황이었으므로 먼저 공격해 물리쳤는데, 사령부 고원(雇員) 하마다 토모히로(濱田寬裕)가 죽었다고 합니다. ○ 보은 부근에는 다수가 모여 있으므로 이를 물리치려 하여도 각 사령관은 병력이 적은 것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증원되는 수비대 도착을 기다려 일거에 섬멸할 계획입니다. 인천 이토(伊藤) 포병중좌 가와카미 병참총감 상석 해군 참모관 전보 [11월 11일 오전 9시 55분발같은 날 오전 11시 착] 하동(河東) 지방의 폭당(暴党) 진압대로부터 지난 7일발 보고가 도착했습니다. 폭민이 또다시 모여 곧바로 격파하여 6명을 죽이고 27명을 포로로 삼았다고 합니다. 부산 이마바시 소좌 가와카미 병참총감 상석 참모관 비(秘) 전보 [11월 11일 오후 2시 20분 인천발같은 날 오후 4시 35분 부산발같은 날 오후 10시 30분 착] 동학당 토벌에 대한 일체의 일은 후쿠바라(福原) 소장으로부터 본관에게 위임되었습니다. 후비보병 제19대대는 오는 12일 용산을 출발해 1개 중대는 공주가도를 통해 전주부로 향하고, 1개 중대는 청주가도를 따라 대구로 향하고, 1개 중대는 우리 병참로 부산가도를 따라 대구로 향해 세 길로 분진(分進)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각 중대는 2일분의 휴대 식량과 3일분의 군량[糧秣]을 준비하였습니다. 이에 관해 이노우에(井上) 공사와 협의한 다음 동학당 정벌을 위해 위 지방에 있는 조선병은 모두 우리 장교의 지휘, 절도에 따르고 만약 어기는 자는 군법에 의해 처분할 것 및 연도(沿道)의 지방관은 군량과 숙소 공급의 처리에 진력할 것을 조선 정부로 하여금 명령하게 했습니다. ○ 경성에 주둔한 우리 군대가 교육한 조선의 교도중대(敎導中隊)가 8일 경성을 출발해 일본군 장교 2명, 하사 약간 명을 감독으로 부속시켰다는 내용의 통달이 이노우에(井上) 공사로부터 있었습니다. 이 부대는 현재 요지(要地)에 머물며 우리 부대의 전진을 기다려 함께 행진할 계획입니다. 상세한 것은 우편으로 보고하겠습니다. ○ 강화병(江華兵) 260명은 동학당 토벌로 충청도 공주로 가는 도중 8일 밤 인천에 상륙했습니다. 인천 이토(伊藤) 중좌 가와카미 병참총감 상석 해군 참모관 전보 [11월 15일 오전 0시 40분 인천발같은 날 오전 1시 부산발같은 날 오전 2시 37분 착] 동학당 토벌을 위해 후비보병 제19대대를 세 길로 나누어 출동시킨 것은 이미 보고한 바와 같습니다. 이노우에 공사는 적도가 강원, 함경도 방면으로 도망갔다고 생각하여 추가로 경성수비대 가운데 1개 중대를 동쪽 길로 파견하려 한다는 것을 협의하였으므로 이에 동의를 표해 두었습니다. 위 수비대의 1개 중대는 며칠 안에 출발할 것으로 믿습니다. 인천 이토 병참사령관 가와카미 병참총감 상석 해군 참모관 전보 [11월 15일 오후 4시 부산발같은 날 오후 5시 40분 착] 이번 달 11일 동학당을 진압할 때 우리 수비병 3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모두 병졸이며 경상입니다. 동학당의 사상자는 202명이었으나, 우리 군에는 사망자가 1명도 없습니다. 부산 병참병원장 다나카(田中) 일등 군의 야전위생장관 상석 해군 참모관 전보 [11월 15일 오후 5시발같은 날 오후 7시 10분 착] 진주 지방에 파견 중인 스즈키(鈴木) 대위로부터 보고가 있었습니다. 지난 11일 8시부터 11시까지 진주와 단성현(丹城縣) 사이에서 동학당의 대부분과 전투해 이를 격파했습니다. 적은 세 방향으로 흩어져 물러났습니다. 우리 병사 3명이 부상을 입었고 적의 사체는 186, 부상자는 아직 분명하지 않습니다. 부상을 당한 병졸은 지금 이곳으로 돌아왔고 적의 무기류를 많이 보내왔습니다. 부산 이마바시(今橋) 병참사령관 가와카미 병참총감 상석 해군 참모관 전보 [11월 16일 오전 10시 인천발같은 날 오전 11시 15분 부산발같은 날 오후 1시 30분 착] 동학당이 강원도와 함경도 양도로 도주하는 것을 막을 목적으로 이노우에(井上) 공사는 추가로 경성수비대로부터 1개 중대를 파견해 동로(東路)에 있는 동학당 토벌대를 증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오늘 16일 경성을 출발해 이를 추격할 것이므로 전에 세 길로 분진하는 각 중대를 중지시켜 해당 수비대를 기다리도록 해야 할 것이라는 협의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동로에 있는 중대는 충주로, 중로에 있는 중대는 죽산(竹山) 부근으로, 서로에 있는 중대는 천안 부근에서 다시 하루 동안 더 체재하게 하고 또 파견된 수비중대는 길을 서둘러 오는 18일 안에는 충주에 도달하게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인천 이토 중좌 가와카미 병참총감 상석 해군 참모관 전보 [11월 24일 오후 0시 20분발같은 날 오후 4시 50분 착] 진주 지방에 파견된 스즈키(鈴木) 대위로부터 보고가 도착했습니다. ○ 17일과 19일 양일 하동부(河東府)의 남방에서 동학당과 전투해 이를 격퇴하였습니다. 우리 군은 군부(軍夫) 1명이 익사, 기타 사상자는 없습니다. 적의 사망자는 일본군과 조선군에 의해 살육된 자를 합쳐 30명, 포로 7명입니다. ○ 우리 군은 전날 후진명령을 내렸지만 아직 완전히 진정되지 않았으므로 귀도(帰途)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부산 이마바시 병참사령관 가와카미 병참총감 상석 해군 참모관 전보 [11월 24일 오후 6시 25분 어은동(漁隠洞)발같은 날 오후 8시 35분 부산발같은 날 오후 10시 5분 착] 제1군에서 정미(精米) 매입을 위해 파견한 이리에(入江) 소좌 일행은 어제 23일 재령군(載寗(寧)郡)-황주(黄州)의 남쪽 약 8리-에서 동학당 약 2천 명의 공격을 받아 오늘 아침 황주로 철수했다는 내용으로 황주사령관 모리도(森戸) 소좌로부터 보고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봉산(鳳山), 검수(剣水) 수비병의 일부를 재령, 안악(安岳) 방향으로 파견해 적을 진압할 것을 명했습니다. 단, 진짜 동학당인지 폭민인지 조사 중이며 자세한 것은 나중에 보고하겠습니다. 어은동 후쿠바라(福原) 병참감 가와카미 병참총감 상석 해군 참모관 전보 [11월 27일 오전 10시 5분 어은동(漁隠洞)발같은 날 오후 1시 30분 부산발같은 날 오후 3시 착] 지난 24일 보고한 황해도 재령(載寧) 지방의 적을 진압하기 위해 황주(黄州)로부터 반(半) 소대, 봉산(鳳山), 검수(剣水)로부터 반 소대의 파견을 명했습니다. 모두 25일 출발했습니다. 또 추가로 해주로부터 평산(平山) 방향으로 적이 공격해 왔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총유(葱莠), 금천(金川)수비병으로부터 별도로 한 부대를 파견했습니다. 아직 어느 쪽도 확실한 정보를 얻지 못했지만 적은 동학당의 한 무리로 인정됩니다. 따라서 용산수비병 가운데 1개 소대를 북부 병참선로로 내보내 적절히 소재지의 적을 토벌할 것을 어젯밤 명령했습니다. 또 어젯밤 오가와(小川) 제1군 참모장 및 평양의 가토(加藤) 참모장으로부터 응원군으로 보병 약 100명을 파견하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이 부대는 오늘 아침 재령 방향으로 출발할 예정입니다. 어은동 후쿠바라 병참감 가와카미 병참총감 상석 해군 참모관 전보 [11월 27일 오후 8시 55분 인천발같은 날 오후 9시 24분 부산발같은 날 오후 10시 15분 착] 동학당을 진압하는 조선군을 응원하기 위해 10월 17일 충청도에 파견된 2소대 및 이번 달 4일 별도로 파견된 이모리(飯森) 소좌 및 그 배하의 1소대는 후비보병 제19대대와 교대해 지난 26일까지 모두 용산으로 돌아왔습니다. ○ 재령(載寧) 부근의 폭민이 평산(平山) 방면에 나타났다는 소식에 따라 후쿠바라 소장으로부터 용산수비대 1소대를 병참로 황주(黄州) 방향으로 파견하라는 명령이 있어 오늘 출발했습니다. 인천 이토 병참사령관 가와카미 병참총감 상석 해군 참모관 전보 [11월 27일 오후 3시 35분발같은 날 오후 6시 착] 하동부(河東府) 지방에 파견된 중대는 오늘 부산으로 돌아갔습니다. ○ 해당 지방의 동학당은 전라도 순천부 방향으로 퇴각했습니다. ○ 조선군은 진주에 백 명, 하동에 백 명을 두고 수비하게 했습니다. ○ 현재 폭도의 상태는 우리 군을 보면 서둘러 도주합니다. 부산 이마바시 병참사령관 가와카미 병참총감 상석 해군 참모관 전보 [11월 28일 오전 11시 30분발같은 날 오후 0시 10분 착] 진주 지방에 있던 동학당의 수령 ‘김상규’는 조선 관리의 손에 살육되었습니다. 우리 군이 생포할 수 없었던 것은 유감입니다. 부산 이마바시(今橋) 병참사령관 가와카미(川上) 병참총감 상석 해군 참모관 전보 [11월 28일 오후 7시 인천발같은 날 오후 7시 40분 부산발같은 날 오후 11시 착] 삼로분진대(三路分進隊)로부터 오늘까지 도달한 정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 11월 23일 청풍(清風)에서 보낸 동로(東路)분진대장의 보고에 따르면, 적은 영천(栄川)에 집합해 있다는 확실한 정보를 접하였으므로 경성으로부터 파견된 1중대와 함께 이 적을 공격하려고 하는데 적은 강원도 영월 지방으로 도주했다는 소식을 접하였으므로 이 중대와 협의하여 일에 대처하려고 합니다. 그 뒤의 소식은 없습니다. ○ 11월 24일발 청주주재 미나미(南) 소좌의 보고에 따르면, 적은 청산(青山), 문의(文義) 노상의 각지에 있다고 합니다. 또 이 부대는 2개 소대로 이루어진 지대(枝隊)를 양천(楊川), 김산(金山), 진산(鎮山)을 거쳐 청주에 도달하게 해 본부와 잔여 부대는 서로(西路)분진대와 합류할 전망이라고 하는 보고가 있습니다. 또 문의에서 보낸 미나미 소좌의 보고에 따르면, 23일 문의의 적을 격퇴하고 적의 근거지 지명루(至明樓)를 공격해 적 7명을 죽이고 7명을 포로로 삼았습니다. 적은 서남 방향으로 퇴각했습니다. 지명루의 적은 1만여 명이라고 합니다. 공주 부근에는 2~3만이 집결해 있는데, 그 가운데 중국 병사 40~50명이 있다고 합니다. 이 부대는 25일 연기(燕岐), 26일 공주에서 서로분진대에 합류할 예정이라는 보고가 있습니다. 인천 이토 병참사령관 가와카미 병참총감 상석 해군 참모관 비(秘) : 신문에 게재하는 것을 금함 전보 [11월 29일 오전 10시 5분 인천발같은 날 오전 11시 30분 부산발같은 날 오후 0시 40분 착] 아카마쓰(赤松) 소위의 필기 보고에 따르면, 동 지대(枝隊)가 있는 곳은 예산(禮山)의 서쪽인 홍주(洪州)이므로 본대와는 격리되어 고립해 있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응원대는 오늘 저녁 인천을 출발하려고 합니다. 인천 이토 병참사령관 가와카미 병참총감 상석 해군 참모관 전보 [11월 29일 오후 9시 어은동(漁隠洞)발12월 1일 오후 8시 부산발같은 날 오후 10시 착] 황주(黄州)로부터 재령(載寧) 지방으로 파견된 반(半) 소대는 지난 27일 그곳 부근에서 적을 격파하여 15명을 죽이고 5명을 생포했으며 많은 무기와 탄약을 노획하고 재령을 점령했습니다. 약 6백 명의 적이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우리 군은 사상자가 없습니다. 28일 다시 안악(安岳) 방면으로 향하려 합니다. 금천(金川)으로부터 파견된 수비병은 평산(平山) 부근에서 오로지 해주에서 온 적을 경계하였는데, 오늘까지 무사하므로 일단 철수하겠다는 내용의 보고가 있었습니다. 후쿠바라 병참감 가와카미 병참총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