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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폭민동학당 暴民東學黨
일러두기

상석 해군 참모관 경상도 서남부 폭도 격양(擊攘) 보고 1. 하동부(河東府) 부근의 동학당 격퇴를 위해 엔다(遠田) 중위에게 제3중대의 2개 소대를, 후지사카(藤坂) 소위에게 제4중대의 1개 소대를 인솔하게 해 10월 22일 부산항을 출발해 같은 날 마산포로부터 2구대(區隊)가 되어 두 길로 하동을 향해 전진했습니다. 2. 후지사카 소위의 소대는 27일 하동 부근으로 나아가 동학도 약 7백 명을 광평동(廣坪洞)에서 공격했습니다. 적은 패주하여 섬호강(蟾湖江)을 건너 배를 모두 건너편 강가에 묶어 놓고 물러났습니다. 우쓰미(內海) 군조(軍曹)는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 헤엄을 쳐 강을 건너 건너편의 작은 배를 빼앗아 돌아왔습니다. 따라서 전 소대가 잇달아 강을 건너 도망가는 적을 추적하였으나 강을 건너는 데 시간이 지체되었기 때문에 적은 이미 멀리 퇴주(退走)하여 종적을 잃어 적이 유기한 무기와 식량 약간을 노획하였습니다. 3. 이날 엔다 중위가 하동부에 도착해 후지사카 소위의 부대와 합류해 그곳에서 숙영했습니다. 4. 28일, 동학도 약 7백 명이 섬거역(蟾居駅)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2분대를 파견하여 수색하게 했습니다. 적은 우리 군의 전진을 미리 알고 소수의 인원만 남기고 대부분은 퇴각 중이었습니다. 따라서 즉각 이를 추격하였으나, 적은 모두 좌우의 산 정상을 넘어 퇴주했습니다. 이날 그들의 무기 등 약간을 거두었습니다. 5. 이쪽 방면의 적은 이미 퇴각했지만 아직 하동 부근의 여러 곳에 수백 명의 폭도가 모여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이들을 격파하기 위해 한때 곤양(昆陽)으로 나아갔습니다. 6. 11월 2일, 위의 두 부대의 지휘를 맡기 위해 제4중대장 스즈키 야스타미(鈴木安民)로 하여금 부산을 출발해 곤양군으로 가게 했습니다. 스즈키 대위는 4일 곤양에 도착했습니다. 7. 11월 7일, 스즈키(鈴木) 대위는 2개 소대를 이끌고 안심동(安心洞)의 남쪽 금오산(金鰲山)으로 나아가 동학도 약 4백 명이 모여 있는 것을 알고 1개 소대를 본도로부터, 1개 소대를 산의 남쪽으로부터 협격해 이를 격파했습니다. 적의 사체 6명, 포로 27명, 무기 약간을 거두었습니다. 나중에 토민(土民)의 말에 따르면, 적의 사체 70명 정도를 산간에 모아 두었다고 합니다. 8. 같은 달 10일, 단성현(丹城縣) 지방에 군집한 동학도가 곤양을 공격하려 한다는 상황을 정탐하여, 다음 날인 11일 우리가 먼저 역습하기 위해 스즈키(鈴木) 대위는 전 부대를 이끌고 진주의 서쪽 수곡촌(水谷村)에 이르렀습니다. 과연 동학도 약 5천 명이 산야(山野)에 충만함을 보았습니다. 그때가 오전 8시 5분 적은 먼저 총을 발사하며 우리를 습격하려고 하였습니다. 우리 군은 이에 대응해 점차 적을 압박했습니다. 적은 2구대로 되어 하나는 산 위에, 다른 하나는 산의 북방으로 퇴보(退保)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 군은 산 위의 적을 향해 공격했습니다. 적은 산 정상에 쌓아 둔 석벽[石壘]에 의지해 굳게 방어전을 하며 움직일 기색이 없었습니다. 이때 산 북쪽의 적병이 다시 전진해 와 우리 군의 우측을 공격했습니다. 이와 같은 동작은 종래 동학도의 행동과 비슷하지 않아 매우 뜻밖이었습니다. 10시 15분 후지사카(藤坂) 소위의 1소대는 함성을 지르며 산 위의 석벽 안으로 돌입해 마침내 적을 격퇴했습니다. 이때 상등병 다카하시 센지(高橋淺次), 일등졸(一等卒) 오노야마 우시마쓰(小野山丑松)와 후지모토 겐사에몬(藤本源左衛門) 등의 세 명이 부상했습니다. 모두 총상(銃創)이었습니다. 또 요시카와(吉川) 조장(曹長)이 이끄는 1소대는 우리 우측을 공격해 오는 적을 상대했습니다. 또 엔다(遠田) 중위가 이끄는 1소대는 우회하여 적의 좌측을 향하였고, 산 정상의 적이 패주(退走)하자 마침내 모두 무찔러 흩어져 서북쪽의 덕산(德山) 지방을 향해 후퇴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 군을 수습해 모았는데 그때가 오전 11시였습니다. 적의 사체는 전장에 유기된 것이 186명, 부상자의 수는 자세하지 않습니다. 토인(土人)의 말에 따르면, 패주하던 도중에 쓰러진 자가 수십 명 있었다고 합니다. 포로는 2명이고 적은 많은 무기와 탄약, 양식품 등을 버리고 도주했습니다. 9. 같은 달 16일, 수많은 적병이 응치(鷹峙) 및 삼봉산(三峯山)에 모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따라서 이를 공격하려 하였지만 강에 배가 없어 건널 수 없었습니다. 군부(軍夫) 5명이 헤엄을 쳐 건너편 강가에 이르러 작은 배 한 척을 구해서 돌아왔습니다. 이때 군부 한 명이 익사했습니다. 그때가 간조 때여서 배가 갯벌에 붙어 움직이지 않은 데다가 일몰 시간이 되어 공격할 수 없었습니다. 10. 같은 달 17일 오전 7시, 광평동(廣坪洞)에서 강을 건너 2개 소대를 응치로, 1개 소대를 삼봉산으로 향해 나아가게 했으나 적은 이미 응치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전 중대가 삼봉산을 향해 세 방향으로 나아가 격퇴했습니다. 또 1개 소대는 섬거역(蟾居驛)으로 나아가 잔적을 물리치고 오후 5시 하동부(河東府)로 귀환했습니다. 11. 같은 달 19일 오전 7시 하동을 출발해 응치에 이르렀습니다. 적병 수백 명이 지랑동(旨郞洞) 부근에 모여 있는 것이 보이자 사방에서 포위할 목적으로 공격했습니다. 적은 낭패하여 사방으로 흩어졌고 그 대부분은 섬거(蟾居)의 서쪽을 향해 달아났습니다. 그 뒤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이 적병은 지난날의 패전 소식을 듣고 전라도 순천부 방면에서 추가로 응원을 온 것이라고 합니다. 이날 적의 사망자 7명, 포로 5명이고, 적이 유기(遺棄)한 무기 외에 잡품이 도로를 덮었습니다. 12. 이날은 특별히 수많은 적병이 우리 배후에서 나와 하동부(河東府)로 밀려왔습니다. 우리 잔류 병졸 8명이 이를 막고 먼저 적의 깃발을 가진 자 1명을 쏘아 죽였습니다. 나머지 적이 이를 보고 황급히 물러나 흩어졌다고 합니다. 13. 이후 적병은 모두 전라도 순천 방면으로 도망쳐 달아났습니다. 근방에 그림자 하나 남기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스즈키(鈴木) 대위 이하는 21일 하동을 출발해 27일 부산항으로 귀환했습니다. 14. 우리 군이 돌아가는 길에 오르려 하자 하동, 곤양(昆陽) 등의 토민(土民)들이 많이 몰려와 진정서를 내거나 혹은 구두(口頭)로 재삼 우리 군이 더 잔류할 것을 청했습니다. 이것은 토민들이 흉도(兇徒)가 다시 침입할 것을 두려워하고 조선군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간절히 우리 군의 잔류를 애원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병사들은 병참지 수비 임무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므로 스즈키 대위는 간절히 토민을 위로하고 귀환 길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경비를 위해 지방관에게 충고하고 진주에 백 명, 하동에 백 명의 조선군을 주둔해 수비하게 하였습니다.   1894년 12월 1일 부산항 병참사령부에서 병참 겸 정박장 사령관 이마바시(今橋) 소좌 대본영(大本營) 병참총감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 귀하 一 추신. 조선 관리의 손으로 처분한 폭도는 다음과 같습니다.토포사(討捕使) 대구부(大邱府) 판관(判官) 지석영(池錫永)으로부터 통보 사본(번역문) 一 진주(晉州) 구(舊) 해창(海倉)에서 붙잡은 동학도 21명 가운데 괴수 임석준(林碩俊)은 8일 효수(梟首)하고, 나머지 20명은 엄히 처벌한 다음 12명은 풀어 주고 8명은 엄히 가두었습니다. 一 곤양(昆陽) 금오산(金鰲山)의 전투에서 붙잡은 동학도 21명 가운데 괴수 최학원(崔學元)은 13일 총살하고, 나머지 20명은 엄히 처벌한 뒤 석방했습니다. 一 진주에서 붙잡은 동학도 58명 가운데 괴수 김상규(金商奎)는 13일 효수하고 동몽(童蒙) 김권순(金卷順)은 같은 날 총살하고, 나머지 56명은 엄히 처벌한 뒤 27명은 투옥하고 29명은 풀어 주었습니다. 一 하동(河東) 갈록치(渴鹿峙)에서 접전했을 때 11명을 총살하고, 그때 생포한 17명은 엄히 처벌한 뒤 석방했습니다. 一 일본군이 붙잡은 34명의 대장 김재희(金在僖)는 여러 번 석방되었는데 다시 동학도에 들어가 포박되었고, 또 김달득(金達得)은 동학도가 진주로 들어갈 때 앞잡이를 하였으므로 장괴(倀鬼)[조장[組長]의 의미] 김성대(金性大)와 함께 10월 24일(음력) 하동 주교장(舟橋場)에서 총살했습니다. 12월 1일 이마바시(今橋) 소좌 상석 해군 참모관 전보 [12월 1일 오후 8시 15분 인천발같은 달 2일 오전 6시 50분 부산발같은 달 같은 날 오전 9시 40분 착] 11월 28일 문의(文義)에 있는 후비보병 제19대대장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보고가 도착했습니다. ○ 27일 중로분진대(中路分進隊)는 서로(西路)분진대와 합류해 공주 전면의 적을 포위하기 위해 연기(燕岐)에 도착하려고 할 때 주안(周安) 부근에 적도가 있었습니다. 좌측 지대는 문의(文義) 쪽으로 퇴각하려고 한다는 보고가 있었기 때문에 다시 문의로 돌아왔습니다. ○ 옥천(沃川) 지방의 적도를 초멸(剿滅)한 뒤 공주(公州) 지방의 적을 상대하려고 합니다. ○ 서로분진대의 보고에 따르면, 공주 지방 및 홍주 지방은 수만 명의 적도가 있어 기세가 매우 창궐하다고 합니다. ○ ‘보쿠세이쿄, ‘사이주자이’ 외 7명을 공사관으로 보냈습니다. 인천 이토 병참사령관 가와카미 병참총감 상석 해군 참모관 전보 [12월 2일 오후 5시 10분 인천발같은 날 오후 7시 20분 부산발같은 날 오후 9시 25분 착] 동학당 토벌대의 응원을 위해 인천으로부터 파견된 중대는 1일 오전 7시 아산 부근 공호(貢湖)-20만분의 1-에 상륙해 곧바로 공주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아산현의 관리 및 토민으로부터 얻은 다음의 상황을 보고해 왔습니다. 11월 28~29일 동학당 수만 명이 공주를 습격해 우리 군 및 조선군 대략 천여 명이 이를 격퇴하고 수천 명을 죽였습니다. 그 거괴(巨魁) 이창구(李昌求) 및 ‘리쿤시’ 두 명을 죽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현재 이쪽 방면의 적은 해산하였고 아산으로부터 공주 및 홍주 사이에는 적의 집합체는 없고 도로 또한 전혀 지장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 현재 적이 경성으로 올라가는 상황은 더 이상 없습니다. 인천 이토 병참사령관 가와카미 병참총감 상석 해군 참모관 전보 [12월 3일 오후 2시 5분 인천발같은 날 오후 2시 40분 부산발같은 날 오후 5시 30분 착] 11월 27일자 공주주재 모리오(森尾) 대위의 필기보고에 따르면, 서로분진(西路分進) 중대는 11월 21일 공주에 도착하여 그 동남쪽에 있던 수만 명의 적도와 교전하여 이를 격퇴시켰습니다. 다음 날인 22일 새벽부터 그들이 재차 공격해 와 우리 군이 이를 막고 오후 1시경 마침내 이를 물리쳤습니다. 적 6명을 죽이고 포 1, 소총 탄약 2천 발을 노획했습니다. 같은 날 일몰이 되어 적도는 경천(敬天), 정산(定山) 방면으로 퇴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가운데에는 중국병이 대략 40명 정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대대본부는 27일 공주에 도달할 예정이므로 그 도착을 기다려 그 지휘에 따라 다시 공격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 인천에서 파견된 중대의 정보와 위의 보고에 의해 살피면 적은 점차 전라도로 퇴거할 것 같습니다. 인천 이토 병참사령관 가와카미 병참총감 상석 해군 참모관 지난 30일 오후 3시 평산(平山)의 북쪽 1리에서 오카도(大角) 기수(技手)가 공사하던 중 동학당 3백여 명의 공격을 받아 금품과 기타 소지한 물품을 모두 약탈당했습니다. 다음 날인 1일 아침 기수 이하 황주(黃州)로부터 도착한 수비병 8명과 합류해 평산에서 농성 중인 적도를 공격해 마침내 12명을 참살(斬殺)하고 수많은 무기, 도검을 나포하였으며 공부(工夫) 한 명이 부상당했다는 내용의 경성 쓰치야(土屋) 중위로부터 보고가 있었습니다. 이상 보고드립니다. 1894년 12월 3일 운수통신장관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병참총감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 귀하 상석 해군 참모관 1894년 12월 15일 육참(陸參) 제106호 이전에 당 부대로부터 파견된 이시모리(石森) 대위가 12월 2일 강원도 평창으로부터 보낸 보고를 12월 8일 수령하였는데 그 골자는 다음과 같습니다. 12월 1일 평창에 모인 약 3천 명의 동학당을 공격하였습니다. 동학도는 사격하며 2시간 동안 격전을 벌이다가 점차 퇴각할 기색을 보였고, 결국 오후 1시 평창을 완전히 점령했습니다. 동학도 대부분은 정선(旌善) 방향으로 퇴각했습니다. 동학도의 사상자 및 포로  즉사 70명  부상  미상  포로[나중에 저항했으므로 총살] 10명 우리 군 사상자 없음. 이날은 이곳 부근을 수색하여 모두 제거하고 내일은 정선 및 영월(寧越)로 향할 예정입니다. 이상 보고드립니다. 1894년 12월 8일 경성수비대 대장 마야바라(馬屋原) 소좌 대본영(大本營) 상석 해군 참모관 전보 [12월 8일 오후 5시 55분 인천발같은 날 오후 6시 55분 부산발같은 날 오후 9시 5분 착] 인천으로부터 파견된 응원중대는 3일 오후 홍주(洪州)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 있었던 아카마쓰(赤松) 소위가 이끄는 지대(枝隊)는 4일 공주에 있는 본대와 합류하기 위해 그곳을 출발했습니다. 공주에 있는 중대는 이 지대의 합류를 기다려 노성(魯城), 경천(敬天) 부근의 적을 토벌하려고 합니다. 응원중대는 잠시 홍주에 체재한다는 내용의 4일 홍주발 보고가 방금 도착했습니다. 인천 이토 병참사령관 가와카미 병참총감 상석 해군 참모관 전보 [12월 11일 오후 7시 15분 인천발같은 날 오후 7시 40분 부산발같은 달 12일 오전 2시 착] 동로분진(東路分進) 중대는 가흥(可興)으로부터 영춘(永春) 부근으로 진입한 뒤 아직 남진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 중로(中路) 및 서로(西路) 부대도 아직 공주 부근에서 전진을 주저하고 있는 것 같으며 기민하고 활발한 운동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재차 이노우에(井上) 공사와 협의한 다음 다시 3종대(縱隊)에게 다음 명령을 내렸습니다. 제천(堤川)-위치는 지도에 없다. 단 청풍(清風)의 북쪽일 것이다.- 부근의 적을 공격하는 것은 경성에서 파견된 중대에게 맡기고, 동로분진대는 개령(開寧), 김산(金山), 지례(知禮), 거창(居昌)을 거쳐 함양(咸陽), 남원(南原)을 향해 전진해야 할 것입니다. 중로 및 서로분진대는 전주(全州), 무주(茂朱), 지례(知禮)의 선까지 전진하여, 동로분진대가 거창으로 전진하는 것을 기다려 함께 적을 전라도의 서남부로 몰아 토벌할 것을 꾀해야 할 것입니다. 인천 이토 병참사령관 가와카미 병참총감 비(秘) : 신문에 게재하는 것을 금함 전보 [12월 13일 오후 1시 55분 부산발같은 날 오후 4시 40분 착] 경상도에서는 ‘사이분조’라는 자가 현재 폭도를 불러 모으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습니다. 이자는 오랫동안 대원군 아래에 있었고 이번에 군사를 일으킨 것도 역시 대원군의 밀명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번 일은 대구부에 있는 개화당의 한 사람인 ‘조쇼료쿠’라는 자는 재산가로 원래 대원군의 총애를 받은 자였지만, 그 뒤 의견을 달리해 현재 대원군과는 전혀 반대로 대원군이 대구부 감사에게 내명(内命)을 내려 ‘조쇼료쿠’를 죽이고 재산을 거두어들이려 하고 있습니다. 대구감사는 대원군의 친족입니다. ‘조쇼료쿠’는 도망쳐 어제 저녁 부산에 와 있습니다. ○ ‘사이분조’는 ‘조쇼료쿠’가 대원군과 반대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같은 당파의 사람이라고 생각해 군자금의 일을 상담하면서부터 드러난 것입니다. 이 일은 영사가 이노우에(井上) 공사에게 보고할 것입니다. ○ ‘사이분조’가 폭도를 모은 지역의 이름은 상주(尙州)라고 합니다. 아직 조사 중입니다. 부산 이마바시(今橋) 병참사령관 가와카미 병참총감 상석 해군 참모관 전보 [12월 17일 오전 1시 인천발같은 날 오후 2시 20분 부산발같은 날 오후 5시 10분 착] 군로조사대의 일행 및 호위를 위해 파견된 구와바라(桑原) 소위의 소대는 1일 낙동(洛東)을 출발해 경성을 향해 돌아가던 길에, 6일 청산(青山)에 도달했는데 부근에 약간의 폭도가 있어 이를 격퇴하고 8일 문의(文義)를 출발해 청주(淸州)에 도착했습니다. 10일 그곳에서 보낸 필기보고에 따르면, 8일 밤중에 문의 방향으로부터 수만 명의 적이 청주를 향해 전진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응전 준비를 하여 9일 오전 마침내 적의 전진 소식을 듣고 청주 부근의 요지를 지키고 있다가 이를 격파하였습니다. 적의 사망자는 20여 명, 부상자는 무수하며 우리 군의 사상자는 없습니다. 또 대포 2문, 화승총 40여 정, 기타 탄약과 창 등을 노획했습니다. 적은 남쪽을 향해 퇴각했습니다. 이 보고에 따라 생각하면 중로(中路)에 있던 미나미(南) 소좌 및 그 부하는 공주(公州) 방향으로 나아가 서로(西路) 부대와 합류한 것으로 보입니다. 인천 이토 병참사령관 가와카미 병참총감 상석 해군 참모관 전보 [12월 17일 오후 7시 15분 인천발같은 날 오후 8시 10분 부산발같은 날 오후 9시 15분 착] 인천으로부터 응원군으로 파견된 중대는 공주-홍주인가.-에 있습니다. 해미(海美) 방면에 숨어 있는 적이 재기를 꾀한다는 것을 알고 지난 5일 지대를 보내 적 수백 명을 붙잡아 50여 명을 죽였습니다. 이 지대는 9일 공주-홍주인가.-로 돌아와 잠시 이곳에 체재하여 부근의 급한 일에 대응하게 했습니다. ○ 중대는 10일 공주-홍주인가.-를 출발해 해미, 서산(瑞山)을 거쳐 태안(泰安)에 이르러 그 지방의 의용병을 사용해 적을 반도로 몰아넣어 수백 명을 붙잡아 30여 명을 죽였습니다. 수괴는 모두 포박하거나 죽였기 때문에 장래 이 방면의 적은 다시 재흥할 우려가 없을 것입니다. ○ 태안으로부터 해미에 이르는 지방은 관민이 함께 우리 군대를 위해 애를 써 천막을 펴거나 작은 집을 설치하고 술과 안주를 제공했습니다. 서민은 스스로 화물의 운반에 종사하고 이를 명예로 삼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군의 위덕(威德)에 크게 감화했습니다. 이상은 14일 덕산(德山)발 야마무라(山村) 중대장의 보고로 방금 도착했습니다. 인천 이토 병참사령관 가와카미 병참총감 상석 해군 참모관 전보 [12월 17일 오후 2시 5분 어은동(漁隠洞)발같은 달 18일 오후 8시 25분 부산발같은 달 같은 날 오후 9시 45분 착] 황해도 지방의 동학당 진압을 위해 파견된 각 부대는 평양에서 파견된 제1군 수비대와 연락을 취해 재령(載寗(寧)), 안악(安岳), 신천(信川), 해주(海州) 부근을 수색했는데 적은 이미 해산하여 특이한 상황이 없으므로 모두 병참지로 철수했습니다. 또 용산(龍山)에서 파견된 1소대는 지난 10일 ‘코우레이’현(불명) 부근에 모인 적을 격퇴하고 현재 개성(開城)에서 적의 상황을 탐정 중입니다. 어은동 후쿠바라 병참감 가와카미 병참총감 상석 해군 참모관 전보 [12월 21일 오후 6시 15분 부산발같은 날 오후 7시 40분 착] 전라도 좌수영으로부터 이곳 관리아문으로 보낸 보고에 따르면, 지난 17일 동학도 약 천 명이 좌수영을 공격해 와 영병(營兵)과 전투했습니다. 영병은 3백 명 정도로 방어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곳 민가는 모두 불태워졌고 인민은 도주했습니다. 또 순천부는 동학도의 폭행이 심해 부사(府使)가 살해당했습니다. 순천에 있는 동학도의 수령은 ‘긴진바이, 테이우코’ 두 명으로, 전라도는 현재 도처에 동학도의 폭행이 심하다고 합니다. 19대대의 현재 소재지는 이곳에서는 알 수 없지만, 추측에 따르면 1중대는 경상도의 서부에 도달했을 것입니다. 지난 19일 이곳으로부터 진주, 하동 및 순천 방향으로 탐정을 파견해 두었습니다. 향후의 상황에 따라 이곳에 다시 토벌대를 파견할 것입니다. 확인을 위해 상신드립니다. 부산 이마바시 병참사령관 가와카미 병참총감 상석 해군 참모관 전보 [12월 23일 오후 6시 어은동(漁隠洞)발같은 날 오후 6시 55분 부산발같은 날 오후 11시 착] 해주 방면으로 파견된 스즈키(鈴木) 소위로부터 다음의 보고가 있었습니다. 오늘 11일 새벽 해주의 서쪽 취야장(翠野場)에서 동학당 약 2천 명과 격전을 벌여 이를 격퇴했습니다. 적의 즉사는 12명, 포로 9명, 말 33두, 소 4두, 화약 3상자, 무기 및 서류를 노획하였습니다. 우리 군은 무사합니다. 연안(延安), 평산(平山) 외에도 적이 있다는 서류를 얻었습니다. 병참부가 위험하므로 본관은 내일 연안(延安) 방면을 향해 갈 것입니다. 어은동 후쿠바라 병참감 가와카미 병참총감 상석 해군 참모관 전보 [12월 24일 오후 3시 15분 어은동(漁穏洞)발같은 날 오후 4시 15분 부산발같은 날 오후 5시 25분 착] 스즈키(鈴木) 소위로부터 다음의 보고가 있었습니다. 연안 부근의 적은 부사(府使)가 설유(説諭)하여 해산시켰습니다. 평산(平山) 부근의 적은 평산으로 모인다는 소문이 있어 당 부대는 해주로 철수했습니다. 어은동 후쿠바라 병참감 가와카미 병참총감 상석 해군 참모관 전보 [12월 25일 오후 1시 인천발같은 날 오후 2시 10분 부산발같은 날 오후 7시 10분 착] 토벌 응원차 인천으로부터 홍주(洪州) 지방에 파견된 중대 가운데 홍주에 남겨 둔 1소대는 오늘 용산으로 귀환했습니다. 이 소대장 사이토(齊藤) 소위의 필기보고에 따르면, 이 지방에는 적이 재기할 우려가 없고 또 서로(西路)분진대는 전라도로 진입해 공주 부근은 더 이상 고려할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 인천 이토 병참사령관 가와카미 병참총감 상석 해군 참모관 전보 [12월 25일 오후 2시 55분 어은동(漁隠洞)발같은 날 오후 5시 55분 부산발같은 날 오후 9시 20분 착] 해주의 스즈키(鈴木) 소위의 보고는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 23일 해주의 서쪽 끝에서 동학당 약 6~7천 명과 4시간 동안 격전을 벌인 끝에 이를 격퇴했습니다. 적의 즉사자는 15명, 포로 2명, 노획품 말 2두입니다. 우리는 무사합니다. 어은동 후쿠바라 병참감 가와카미 병참총감 상석 해군 참모관 비(秘) : 신문에 게재하는 것을 금함 전보 [12월 27일 오후 6시 인천발같은 날 오후 7시 50분 부산발같은 날 오후 10시 30분 착] 동학당 토벌대는 전라도에 진입하였으나 아직 진정되었다는 소식을 받지 못했습니다. 계절은 이미 엄한(嚴寒)을 향하고 있어 앞길이 더욱 곤란해질 것을 우려해 이마바시(今橋) 소좌와 협의한 다음 부산으로부터 다시 1중대를 순천을 향해 전진시켜 함께 협력해 신속히 토벌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이 부대는 오는 30일 부산을 출발하려 합니다. 인천 이토 병참사령관 가와카미 병참총감 상석 해군 참모관 비게시(非掲示) 전보 [12월 30일 오전 9시 20분발같은 날 오전 11시 30분 착] 군함 쓰쿠바(筑波)는 어제 저녁 이곳으로 돌아왔습니다. 함장으로부터 들은 바에 따르면, 전라도의 동학도 본영은 현재 순천에 있습니다. 좌수영의 조선병은 오로지 방어[防戰] 중입니다. 또 전라도 가운데 나주(羅州), 운봉(雲峯), 좌수영의 세 곳은 모두 고립되어 동학도를 방어하고 다른 곳은 관민이 모두 동학도에 속한다고 합니다. ○ 오늘 이곳에서 파견한 중대는 다음 달 6일 순천을 공격할 예정입니다. 부산 이마바시 병참사령관 가와카미 병참총감 상석 해군 참모관 해보(海報) 제41호 지난 12월 31일 오후 부산을 출항해 다음날 1월 1일 오전 좌수영에 입항했습니다. 좌수군절도사 김철규(金澈圭)가 본함에 내방했으므로 지난 30일 부산으로부터 우리 육군 1중대가 순천을 향해 발진한 사건을 통첩하고 또 순천 공격과 동학도 진압 방법 등을 협의했습니다. 그 결과에 따라 오늘 2일 오전 좌수영으로부터 중군(中軍) 신홍(申) 및 중영장(中領將) 곽경환(郭景煥)이 조선군 백 명을 지휘해 바닷길로 하동을 향해 출발해 우리 육군 부대를 마중했습니다. 또 내일 3일 중에 영관(領官) 이주회(李周會)-이풍영(李豊榮) 또는 남주(南洲)라고도 칭한다.-가 조선군 600명을 지휘하여 육로로 순천가도 신성포(新城浦)를 향해 출발하여 오는 6일까지 우리 육군과 결합하여 순천성을 공격할 예정입니다. 현재 동도 수령은 오로지 순천성에 모여 있고 12개 읍의 동도를 모으고 있는 중이므로 아직 순천성으로부터 좌수영 등으로 진격하는 상황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一. 종래 전라도 안의 53관(管) 가운데 50관은 동도가 점유하는 바이고 나머지 3관 좌수영, 나주(羅州) 및 운봉(雲峯)은 동도에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현재 동도의 명부에 이름을 올린 자는 백만여 명에 이를 것이므로 동도의 수령들은 각별하게 기타 하등(下等)의 우민(愚民)에 대해 가능한 한 귀순반정(歸順反正)의 방법을 만들어야 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문명국의 사례에 따라 지난 1월 1일 좌수영 절도사는 감옥에 있던 동도 20명 가운데 3명의 부인(婦人)에게 선서하게 한 다음 풀어 주고 참죄(斬罪)를 면해 주었습니다. 특히 일본의 조선에 대한 후의(厚意)와 동학도에 대한 우리 쓰쿠바함의 인애(仁愛)의 주지(主旨)를 설명한 뒤 동도 가운데로 쫓아 보냈습니다. 一. 본함은 다가오는 6일경 순천 공격의 결과를 확인하고 죽림포(竹林浦)를 거쳐 부산으로 회항할 전망입니다. 무엇보다 죽림포에는 측량원 외에 대위 한 명, 소위 두 명, 하사 이하 20여 명을 남겨 두겠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보고드립니다. 1895년 1월 2일 좌수영항 선임관 쓰쿠바(筑波) 함장 구로오카 다테와키(黑岡帶刀) 대본영(大本營) 상석 해군 참모관 [괄호 안 신문 게재를 금함] 해전(海電) 제43호 전보 [1월 7일 오전 8시 35분 부산발같은 날 오전 8시 45분 착] 이번 달 초 순천부, 광양현에서 마을의 관리 및 인민이 동학당의 거괴(巨魁) 김(金)진바이, 유(柳)카토쿠, 정우형(鄭虞炯) 이하를 죽이고 좌수영에 항복 사죄를 청했습니다. 쓰쿠바의 분견대(分遣隊)는 5일 광양에 상륙하여 김(金)진바이, 유(柳)카토쿠의 수급(首級)을 실검(実檢)하였습니다. 좌수영의 조선군 5백 명이 순천부로 향했습니다. 현재 동학당은 수령을 잃고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1월 7일 (부산) 쓰쿠바(筑波) 함장 상석 해군 참모관 비게시(非掲示) 전보 [1월 7일 오전 11시 부산발같은 날 오전 11시 50분 착] 군함 쓰쿠바(筑波)는 오늘 아침 당항(當港)으로 돌아왔습니다. ○ 쓰쿠바 함장의 통지에 따르면, 전라도 순천부 및 광양현에서 이전에 동학도에 가담하였던 관리 및 인민 가운데 귀순의 뜻이 있는 자가 모여서 지난 1일 동학도를 공격해 수령 이하 수 명을 살육하였습니다. 따라서 그곳의 동학도는 사방으로 해산했다고 합니다. ○ 이곳에서 파견한 중대 및 제19대대의 정황은 알지 못합니다. 부산 이마바시 병참사령관 가와카미 병참총감 비게시 전보 [1월 8일 오후 2시 10분 인천발같은 날 오후 3시 35분 부산발같은 날 오후 6시 20분 착] 충청도 황간(黄澗), 영동(永同) 부근에 적도가 다시 집결해 매우 창궐한 것 같습니다. 그 때문에 군로조사대는 측량을 중지하였습니다. 호위병 대장 구와바라(桑原) 소위는 김산(金山)으로부터 진군해 이를 토벌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급히 낙동으로부터 수비병 2개 분대를 파견하여 이를 응원하게 하였습니다. 인천 이토 병참사령관 가와카미 병참총감 비게시 전보 [1월 8일 오후 5시 30분 부산발같은 날 오후 10시 10분 착] 대구의 이즈노(伊津野) 소좌로부터 다음과 같은 내용의 보고가 있었습니다. 상주목사(尚州牧使)로부터 대구감사(大邱監司)에게 보낸 보고에 따르면, 무주(茂朱) 부근의 동학당은 충청도의 황간(黄澗), 영동(永同), 청산(青山)으로 가 민가를 약탈하고 무기를 빼앗고 폭행하였습니다. 따라서 대구(大邱)로부터 조선군 2백 명이 김산을 향해 출발하였다고 합니다. ○ 위는 이미 제19대대가 지나간 지역으로 추측되지만 다시 폭민이 봉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탐정한 다음 보고하겠습니다. 부산 이마바시 병참사령관 가와카미 병참총감 비게시(非掲示) 전보 [1월 9일 오전 8시 55분 부산발같은 날 오전 11시 착] 대구, 낙동의 수비병 1분대씩을 김산(金山) 방면으로 파견하여 군로 측량의 호위대와 협력해 충청도의 영동, 청산 부근에 있는 폭도를 공격한다는 내용의 보고가 낙동, 대구로부터 있었습니다. 부산 이마바시 병참사령관 가와카미 병참총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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