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1. 어제 8일 일본 군인 약 300명이 광양부(光陽府)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척후를 파견해 보냈으나, 경성에서 보낸 조선군이 도착한 것이 잘못 전해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부대는 제19대대와 전주부에서 헤어진 것-그 부대는 나주에 이르러 주둔할 예정-으로 2~3일 더 경과하지 않으면 순천으로 올 수 없는 상황입니다. 2. 오늘 오후 낙안군(樂安郡)으로부터 순천부(順天府)에 도착한 공문에 따르면, 순천을 퇴각한 동도는 현재 장흥부(長興府)에 침입해 그곳 부사(府使) 부부 및 요속(僚屬) 약간 명을 해치고 매우 횡포한 행동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3. 9일. 어제 8일 낙안군으로부터 도착한 공문과 기타 정황에 따라 오늘 순천부를 출발해 오후에 낙안군에 도착했는데 이곳은 조용합니다. 도착 후 나주부를 향해 제19대대에게 우리 부대의 진군을 통보했습니다. 1895년 1월 9일 전라도 낙안군에서 육군 보병 대위 스즈키 야스타미(鈴木安民) 육군 보병 소좌 이마바시 도모카쓰(今橋知勝) 귀하 상석 해군 참모관 전보 [1월 16일 오전 11시 40분 부산발같은 날 오후 1시 17분 착] 충청도 청산, 보은 부근에 있는 동도는 낙동, 대구의 수비병으로부터 1개 분대씩을 파견하여 미야케(三宅) 대위의 지휘를 받아 측량호위대와 협력해 그들을 공격하여 3백여 명을 살육하고 해산시켰다는 내용의 보고가 있었습니다. 부산 이마바시 병참사령관 가와카미 병참총감 상석 해군 참모관 전보 [1월 17일 오전 11시 10분 부산발같은 날 오후 0시 30분 착] 충청도 보은 쪽의 동학도를 공격하기 위해 파견한 낙동(洛東), 대구(大邱)의 수비병은 지난 12일 밤 그리고 13일 아침 동학도를 공격해 그들을 무찔러 북쪽으로 흩어지게 했습니다. 측량호위대의 구와바라(桑原) 소위는 부상을 입었고, 동학도의 사상자는 수백 명이라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부산 이마바시 병참사령관 가와카미 병참총감 상석 해군 참모관 전보 [1월 17일 오전 10시 20분 인천발같은 날 오전 11시 부산발같은 날 오후 1시 40분 착] 낙동(洛東) 지역에 주둔한 아스카이(飛鳥井) 소좌의 보고에 따르면, 이 지방으로부터 보은(報恩) 부근 지역으로 향한 우리 부대는 12일 오후 10시에 적을 야습하여 격파하고, 그 다음 날 아침 7시에 다시 진격하였는데 9시가 되었을 때 그 적들은 패배하여 북쪽으로 도주하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우리 구와바라(桑原) 소위는 가벼운 상처를 입었고 동도의 사상자는 수백 명이 되었으며, 소와 말 수십 두와 무기도 매우 많이 노획하였습니다. 인천 이토 병참사령관 가와카미 병참총감 상석 해군 참모관 전보 [1월 17일 오후 6시 30분 인천발같은 날 오후 7시 20분 부산발같은 날 오후 8시 30분 착] 토벌대장 미나미(南) 소좌로부터 다음의 보고가 있었습니다. 각 분진대로 하여금 적을 남서 구석으로 추격하였습니다. 그리고 장흥, 강진, 해남에도 잔적이 있어 토멸에 착수하였습니다. 김개남, 전봉준, 손화중, 송문수 등의 거괴(巨魁)는 이미 포박되었습니다. 또 인민을 장려하여 이들 괴적(魁賊)을 포박하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연도의 각 촌락의 인민은 우리 군대의 위덕(威德)에 크게 감동하는 것 같습니다. 인천 이토 병참사령관 가와카미 병참총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