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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메이지 27년 일청교전 종군일지 明治二十七年日淸交戰從軍日誌
일러두기

1894년(메이지27), 일청교전 종군일지(日清交戦従軍日誌) 1894년 7월 23일 오후 10시 30분 경보가 울렸다. 후비군 소집의 영장, 가키시마(柿島)촌 사무소에서 사역자 한 명과 순사 한 명이 함께 자택으로 송달했다. 따라서 곧바로 수령하고 준비한 뒤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이날 밤 어제의 호우로 요시노강(吉野川)에 큰 홍수가 나 강을 건널 수 없었다. 7월 24일 오전 6시 가족과 친척과 이별을 하고 곧바로 출발해 기타스가(北須賀)의 마쓰카와 데이헤이(松川程平) 집으로 갔다. 동행해 요시노강이 큰 홍수가 났으므로 겐다천[源太渡]을 건너 이치카무라(市香村)의 군사무소에 도착한 것은 오전 12시. 이곳에서 여비를 받고 도우스(藤洲)의 본가로 가서 몇 시간 동안 양친 및 형, 근처 친구들에게 작별의 말을 하고 같은 촌의 스기노 도라기치(杦野虎吉) 군에게 동행할 것을 재촉하였지만 약간 사정이 있어 같이 갈 수 없었다. 따라서 이곳을 출발해 요슈(豫州) 마쓰야마(松山)를 향해 떠났다. 미마군(美馬郡) 소에야마(曽江山)를 넘었다. 밤이 되었고 큰비가 내렸다. 도중에 숙소가 없었다. 산길이 험악했고 천둥소리가 대지를 진동했고 번개가 산림을 투명하게 비췄다. 빗물이 거세어 도로와 계곡을 구별하지 못했고, 계곡물이 굉음을 내며 나무 기둥을 울렸고, 몸과 옷은 물속에 던져진 것 같았다. 간신히 산슈(讃州) 가니와무라(鹿庭村)에 도착했다. ■■■■■■분(分)이었다. 이 마을 주재 순사의 안내를 받아 숙사에 투숙했다. 의복을 숯불에 말리고 앞 ■■■잠자리에 들었다. 7월 25일 맑음. 오전 6시 30분 가니와무라를 출발해 다카마쓰시(高松市)에 도착, 시각은 5시 25분. ■니시하마 기선회사(■西濱汽船会社)에 도착해 선편을 기다리다 오후 8시 30분 기선 우지가와마루(宇治川丸)가 항구에 도착해 서둘러 배에 승선했다. 배 안의 승조원(乗組員)은 모두 병사였다. 매우 더워 견디기가 너무 힘들었다. 11시 30분 배가 출발해 다도쓰(多度津)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병사 80여 명을 태우고 서쪽을 향해 출발, 요슈(豫州) 이마지(今治)에 도착한 것은 26일 오후 1시였다. 여기에서 또 40여 명의 병사를 태웠다. 배 안에 사람이 꽉 차서 선장 ■■■과 승조원이 크게 걱정했다. 그렇지만 전시의 비상사건이므로 평민 승조원을 이 해변에 상륙시키고 병사만 탑승해 급히 출발, 와케군(和気郡) 미쓰케하마(三ツヶ濱)에 도착했다. 그때 시간은 오후 6시, 곧바로 미쓰하마 여관에서 1박 했다. 같은 달 27일 미쓰하마의 정거장에서 기차를 타고 마쓰야마 연병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시내를 산책하였다. 오후 4시 여단본부에 도착해 후비군 사령관에게 영장을 제출했다. 이어서 후비독립 제19대대 제1중대에 편입되어 제2소대 제2분대원이 되었다. 마쓰야마시 마나토마치(港町) 산쵸메(三丁目) 쇼안지(正安寺)에 좁은 숙소를 잡았다. ■■■■ 식사는 중대 편입 중이어서 취사시설이 없고 따라서 나가마치(長町) 미요시테이(三好亭)에서 저녁을 먹었다. 쇼안지 안은 모기가 매우 많았고, 특히 무더위 속에 열기가 강해 매우 힘들었다. 모기장도 없이 이곳 절에서 11일 동안 머물렀다. 그 사이 풍도(豊嶋), 아산(牙山) 또는 성환(成歓) 전투에서 우리 군대의 대승리를 신문 호외를 통해 보았다. 이때의 분위기는 소란스럽고 또는 ■■하여 실제와 허구의 이야기가 분분해 그 사실을 믿기 어려운 일이 자주 있었다. 같은 달 29일 비가 조금 내린다고 해도 큰 가뭄이 들어 ■ 이곳 마쓰야마 근방의 땅에서는 경작물을 심기가 어렵고 모내기는 모 하나도 심는 것을 보지 못했다. 매우 불쌍하기 그지없다. 성안의 ■■장은 상비군이 출발하는데 사람들이 연병장에 산을 이루었다. 기병, 차량 소리가 대지를 진동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같은 해 8월 7일 우리 부대에 출발 명령이 내려 오전 6시 30분 쇼안지를 출발해 오전 11시 와케군 다카하마(高濱)에 도착했다. 오후 3시 어용선 셋슈마루(摂州丸)에 승선해 야마구치현(山口縣) 바칸(馬関)을 향해 출발했다. 해상의 바람과 파도가 온화하여 8일 오전 3시 40분 후쿠오카현(福岡縣) 부젠노쿠니(豊前国) 모지항(門司港)에 도착했다. 날이 밝기를 기다려 6시 우리 대대 제1중대, 제2중대 등은 아카마가세키(赤間関)에 상륙하였고 명에 따라 제3중대만 모지에 상륙했다. 이어서 작은 도선[小渡船]을 타고 우리 중대 및 제2중대는 바칸 이리에마치(入江町) 항구에 도착했다. 제1중대는 니시호소에쵸(西細江町) 고묘지(光明寺)를 숙소로 삼았다. 이 사원은 약간 산허리에 있기 때문에 해협 건너 규슈의 모지가 한눈에 보이고 눈 아래에 시내가 보여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 이 사원에서 6일 동안 머물렀다. 10일 이곳 오이노야마(老ノ山) 포대를 호위하기 위해 도요우라군(豊浦郡) 히코지마(彦嶋)로 건너가 12시 위병 교대, 즉 후비보병 제12연대(이는 규슈인)와 교대하였다가 11일 고묘지로 돌아왔다. 8월 13일 도요우라군 히코지마로 숙소를 옮겼다. 오후 4시 그곳 혼무라(本村)에 있는 오카노 이쿠타로(岡野幾太郎)의 집에 사영(舍營)했다. 즉, 그곳에는 포대가 많은데(구조가 훌륭하지만 생략한다) 오이노야마 및 다노쿠비(田ノ首)의 호위를 맡았다. 우리 부대는 매일 교대병을 보내고 선박의 출입을 감시했다. 이 마을에는 70여 일 동안 체재했다. 그리고 여러 곳에 보루를 설치하여 적을 막는 데 충당했다. 다노쿠비는 해협이 좁아 부젠(豊前)의 다이리(大里)와 불과 1리의 거리이다. 서남쪽으로 고쿠라(小倉)의 둔영(屯営)을 바라보고 동남쪽은 모지의 고성(古城) 포대와 마주 보고 있다. 그 중간에 간류지마(眼流島)가 자리 잡고 있다. 시노야마(篠山)의 포대와 마주 보며 해협 가운데에 수뢰(水雷)를 장치했다. 스지노야마(筋ノ山) 포대는 다노쿠비의 서쪽에 있으며 해협을 바라보고 있다. 오이노야마 포대는 서쪽으로는 치쿠젠(筑前) 와카마쓰시(若松市)를 향하고 북쪽으로는 현해(玄海)를 바라보고 무쓰레(六連)의 등대를 내려다보고 있다. 곤피라(金毘羅)산의 히노야마마루(火ノ山丸)■와 포대가 서로 마주 보고 있다. 다케노코섬(筍嶋, 竹ノ子島의 오기) 덴진모리(天神森)의 서남쪽에 있어 모두 유용한 땅이다. 마쓰야마를 출발한 뒤로는 아직 한 방울의 비가 내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 따라서 바칸(馬関)은 물론 히코지마(彦嶋)도 마실 물로 매우 곤란하고 경작물은 다 말라 매우 걱정스러웠다. 9월 8일에 이르러 비가 내렸다. 구름이 동북쪽에서 일어나 갑자기 폭풍으로 변해 여러 채의 민가가 쓰러졌다. 큰 한발 뒤에 큰 폭풍이었으므로 더욱이 인민의 곤란과 괴로움이 실로 더했다. 이와 같은 기후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안은 이질[赤痢] 등 역병이 유행했는데 도쿠시마현(徳嶋縣) 등이 가장 심했다. 그렇지만 다행히 우리들이 머무는 히코지마 부근은 적은 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역(牛疫)은 매우 심해서 죽는 소가 많았다. 이곳에 체재 중 평양 및 각지에서 큰 승리를 했다는 소식은 자주 들려왔다. 또 평양전투에서 우리 고향 치에지마(知惠島)출신의 포병 나나쵸 에사부로(七條重三郎) 씨가 충사(忠死)했다는 것을 신문에서 보았다. 아! 이십여 년을 한결같이 기약하며 이역의 귀신이 되었지만 국가를 위해서이지 않은가? 10월 13일에 이르러 후비독립 제3중대는 모지에서 히코지마로 이동하여 다노쿠비 포대 및 해협 수뢰 호위의 임무를 맡았다. 히코지마는 외국 선박이 출입하는 길목에 해당하는 곳이기 때문에 청국과 개전한 이후 매일 우리나라 선박의 출입 수가 수십 척에 이른다. 또 서양 각국의 기선도 평상적으로 매일 7~8척이 왔다. 10월 28일 제19대대는 조선 동학당이 재봉기하였으므로 토벌대로 도한(渡韓)할 것이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때가 오후 12시 30분이었다. 우리들은 풍기(風紀) 위병 근무 중이었는데 이튿날 29일 오후 3시 숙사의 사람들과 작별을 고하고 바로 출발, 각 병사의 용기가 왕성하여 바칸으로 나아갔다. 송영하는 사람들이 산을 이루었다. 이날 밤 아카마가세키(赤間関) 간논사키(観音崎) 에이후쿠지(永福寺)에서 숙박했다. 이 절 주지의 대응이 난폭했기 때문에 30일 오후 3시 같은 마을의 에노모토 기사부로(榎本喜三郎) 집으로 이전해 숙박했다. 저 에이후쿠지의 주지는 실로 국가에 대해 중죄인이라고 해야 할 자이다. 11월 3일 간논사키를 출발할 때 주인인 에노모토를 비롯해 사환에 이르기까지 헤어짐을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며 배웅했다. 같은 곳의 가메야마신사(亀山神社) 경내에 정렬해 신주(神主)가 무운장구(武運長久)를 기도했고 각 병사에게 신주(神酒)를 나누어 주었다. 8시가 되어 기선 아지가와마루(安治川丸)에 탑승했다. 배웅객이 해안을 메웠다. 10시 30분, 기선이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기계가 소리를 내며 동작하자 선체로 건너갔다. 한마디 신호음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해 푸른 바다의 파도를 가르며 해협을 지나 히코지마와 무쓰레지마(六連島)를 뒤로하고 현해를 향해 나아갔다. 배웅하는 군중의 고성이 굉장했다. 현해는 푸른 바다로 하늘과 붙어 있는 것 같았다. 바람이 없고 맑은 때였지만 파도가 산을 이루었다. 선체가 매우 심하게 동요했다. 반일 동안은 보통의 작은 섬도 보지 못했다. 4일 오전 2시 쓰시마[對州島]를 옆으로 보면서 조선 제주도를 왼쪽에 두고 서쪽을 향해 나아갔다. 그때 맞바람이 강했고 기선의 기기(器機) 상태가 나빠져 조선국 전라도 창안도(昌安嶋)에 들어가 정박했다. 배멀미를 하는 승선자가 많았는데 우리들은 별 이상이 없었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외지(外地)를 보았다. 산 위에 나무가 적고 단지 풍경은 문인화 같았다. 먼 산이 기립하고 산 아래에 초가집이 기울어져 있었다. 인민은 에비스 사부로(蛭子三郎)처럼 하얀 옷을 입고 긴 담뱃대는 그 길이가 3척이 되는 것도 있다. 이것을 손에 들고 짐을 등에 지고 발에는 짚신을 신고 보행한다. 보는 사람들이 웃었다. 이곳 산슈(讃州) 쓰다(津多)의 어부가 어선에 물고기를 싣고 우리 기선에 팔았다. 가격이 매우 싸서 1척(尺) 이상이 되는 큰 도미가 불과 ■■10전이다. 선원이 많이 샀다. 5일 오전 8시 15분 출발해 청국 황해의 동쪽을 통과했다. 이때 바람과 파도가 다시 강해져 작은 산과 같은 파도가 기선의 갑판 위를 덮쳤다. 바닷물이 모두 진흙 같았고 선체는 심하게 흔들려 뱃멀미하는 사람이 많았다. 6일 오전 5시 30분에 이르러 기선은 진로를 잃고 잠시 퇴각했다. 이때 한 마리의 비둘기가 날아와 돛대 위에 앉았다. 오전 6시 50분이 되어 새로운 방향으로 진로를 열어 항해를 시작했다. 오후 3시 15분 인천항에 도착해 정박했다. 항구 안에는 프랑스 군함 2척, 영국 군함 3척, 미국 군함 1척, 러시아 군함 1척, 일본 운송선 3척이 정박해 있었다. 각국 군함 모두 예포를 발사했다. 오후 7시 30분 인천에 상륙해 일본 거류지 혼마치(本町) 57호 이와모토 기요마(岩本喜代馬) 집에 숙박했다. 각서(却書). 이상의 항해 중 풍도(豊島) 앞바다에서 우리 군이 격침시킨 청국 수송선 고승호(高陞号)의 돛대가 바다에 돌출해 있는 것을 보았다. 인천으로부터 서쪽으로 1리 반 정도에 일본 상선회사의 모가미가와마루(最上川丸)가 암초를 올라타 중앙 부분에서 반으로 부러진 것을 보았다. 7일 인천에 체재. 이리저리 산책하다가 한인 마을에 이르렀는데 그 불결함에 경악했다. 초가집이 기울어진 데다 파리가 많고 분뇨는 가옥과 도로의 구별 없이 모두 흘려보낸다. 부추를 먹기 때문에 그 냄새가 정말 토할 것 같다. 때가 묻은 손으로 떡, 감, 탁주, 소고기, 말고기, 돼지고기, 개고기, 엿 등을 취식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소나 말 가축만도 못하다. 그 남쪽에 남부병참병원이 있다. 거기로 가 환자가 있는 곳을 둘러보았다. 이날 압록강에서 온 부상자 및 사망자가 도착했다. 조금 동쪽에 묘지가 있어 아산, 성환전투 이후의 전사, 병사자의 많은 표적이 되게 세운 나무 기둥을 보았다. 정말로 한탄스러운 바이다. 같은 달 8일 오전 6시 30분 인천을 출발해 용산을 향해 나아갔다. 가는 길에 인분이 많아 쉬더라도 길옆에 앉을 수가 없다. 또 인천에서 용산 사이 9리의 행정이지만 병사들이 모두 크게 피로했다. 이는 도로가 모래진흙이고 쉬기가 곤란한 데 따른 것이다. 한강을 건널 때는 오후 6시 30분. 용산병참부를 북쪽에 두고 지나 작은 마을 민가를 통과해 만리창(万里倉)에 이르렀다. 이곳은 이전 오시마(大島) 혼성 여단의 본진으로 곳곳에 천막사 수십 개가 자리를 잡고 있다. 이 산은 남쪽으로 한강의 큰 물줄기가 있고, 동쪽은 한성(漢城)의 석루(石壘)와 접해 있고, 남쪽 기슭 아래로 큰 도로가 있어 경성으로 통한다. 또 인천으로부터의 전신선이 통과한다. 남쪽에 평탄한 민가가 밀집한 것은 마치 해안의 돌에 굴이 붙은 것 같다. 서쪽에 큰 창고가 있다. 동(棟) 수는 9개소로 이름하여 만리창이라고 하며 즉, 그곳의 지명이 되었다. 이 창고는 옛날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조선 정벌 때부터 건축한 것이라 하니 가장 오래된 창고이다. 북쪽을 통과하는 큰길은 평양․의주로 통하는 본도로 평양까지는 50리의 거리이다. 곳곳의 골짜기에 2칸(間)을 간격으로 우물을 팠다. 또 일본 과자점 및 군(軍) 매점이 있다. 천정의 뒷면에 파리가 붙은 것은 마치 검은콩이 끈적하게 붙은 것 같다. 피로하고 공복이기 때문에 군 매점에서 한 잔을 마셨다. 가격은 1홉에 5전. 그날 밤 천막사에서 잠을 청했다. 추워서 잠들 수 없었다. 9일 피로해서 머묾. 같은 달 10일 이날은 각지를 산책했다. 만리창에 갔다. 전에 평양전투에 분포(分捕)한 연발포는 12연발, 18문, 대포 10문, 야전솥, 야전냄비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고 단지 산과 같이 들에 쌓여 있다. 야전냄비는 우리 부대용으로 제공했다. 남쪽의 창고에는 제5사단 오시마 여단의 배낭, 교체용 군화[替靴] 등이 보관되어 있었다. 둘러본 뒤 다시 동쪽으로 가 경성에 도달했다. 하나의 대문은 돌로 만들어졌고 문은 철판을 붙였다. 숭례문(崇禮門)이라고 크게 쓴 편액이 걸려 있었다. 우리 18대대의 후비병이 지키는 곳이다. 문 위로 올라가면 한눈에 시가지를 내려다볼 수 있다. 북한산 아래에 왕실이 있다. 문밖은 둘레가 8리 정도이고 30여 척의 돌담은 높은 부분에 여러 개의 총구를 뚫고 사대문을 밝힌다. 그 외에 작은 문이 일곱 군데 있다. 그 내부에도 마찬가지로 30여 척의 높은 돌담은 출입구 모두 돌을 뚫은 것 같고 3개의 문이 있다. 남만(南蛮)의 철판 문은 한눈에 국왕의 거성(居城)임을 알 수 있다. 문 안에 폭 5척, 높이 7척의 큰 돌기둥 수십 개가 세워져 있다. 위는 기와지붕으로 사원과 같은 고루(高楼)는 집회소로 보인다. 왕실은 그 동북쪽에 있는 파란색 칠을 한 집으로 생각된다. 북한산 주위에 돌담을 쌓고 사대문을 설치했는데 한 별장에는 조선 군인을 배치했다. 남 니현산(南泥峴山)은 일본인 거류지로 영사관과 공사관이 있다. 외문(外門) 안쪽은 시가지로 상가와 가로가 종횡으로 있다. 모든 관택(官宅)은 우리나라 사원의 모습으로 지어졌다. 숭례대문을 내려와 시가지를 산책했다. 그 불결함이 놀랄 만하다. 가로의 옆에는 사람과 가축의 분뇨가 많고 겨울 날씨임에도 파리가 집 안에 충만하여 악취가 심하였다. 도로에 오물을 흘려 버리고 집에서 도로로 분뇨를 던져 버린다. 그러므로 비가 오는 날에는 마치 변소의 항아리를 건너는 것 같다. 남 니현산의 중턱에는 일본 상인의 집 180~190채가 있는데 이곳은 청결했다. 북쪽으로 가서 왕문(王門)에 이르렀다. 문의 동쪽 바깥 거리에 큰 종이 있다. 경이문(経弐門)에 높이가 3칸 남짓으로 이름하여 종도(鐘道)라 한다. 왕문(王門)의 동남쪽으로 7~8정(町) 떨어진 곳에 흰 돌의 13층 탑이 있었다. 위의 2층은 밑으로 내려놓았다. 옛날에 가토(加藤)가 이것을 내려놓았다고 전한다. 이 탑 방면으로 불상을 조각했다. 외문, 사대문 및 외삼문 등은 저녁 6시에 닫고 다음 날 6시에 문을 연다. 그러므로 인민은 돌아갈 길이 없어 다음 날 문을 열 때까지 시내에 머무는 일이 종종 있다. 이 성채 안의 인가는 모두 8만여 호라고 한다. 항상 파리가 실내에 충만한 것은 냄새가 매우 심하기 때문이다. 불결한 데 경악하고 용산으로 돌아왔다. 이곳 용산 복로사(覆露舎)는 여름을 나기에 적합한 구조이기 때문에 매우 춥고 이곳에서 처음으로 얼음이 동결하는 것을 보았다. 11월 11일 독립 제3중대가 이곳에 왔다. 친구인 스기노 도라키치(杦野虎吉) 군을 면회했다. 같은 날 밤 명령이 있었다. 이번에 동학당 토벌대의 행진로를 동로, 서로, 중로의 세 길로 분진(分進)할 것, 즉 제1중대 마쓰키(松木) 대위는 동로 병참선으로 나아가고, 제2중대 니시모리(西森) 대위는 서로로 나아가고, 제3중대 이시구로(石黒) 대위는 중로로 분진한다. 각 부대 모두 충청, 전라에 있는 동도(東徒)를 진멸(鎭滅)하고 경상도 낙동병참부로 가서 명령을 기다리라고 했다. 따라서 각 부대는 준비를 하였다. 우리 제1중대는 통역 2명, 길안내 2명 모두 한인(韓人)이었다. 통역 중 한 명은 대마도인 이토 조타로(伊藤長太郎)로 이를 데리고 12일 오전 7시 30분 용산을 출발했다. 이때 제1중대 소속 구와바라(桑原) 소위는 전신 호위 겸 철도 측량의 수위(守衛)로 중로선을 행진했다. 경성을 거쳐 한강에 이르러 점심 식사를 하고 송파진(松坡鎮)에 이르렀는데 이곳에는 병참부가 있다. 이곳을 지나 1리(里) 반의 거리에 작은 촌락이 있었는데 1천여 명의 한민(韓民)이 모여 있었다. 우리 부대를 한번 보자 경계하였고 그 촌락에 다가가 심문했더니 동도는 전혀 아니고 올해 가뭄에 관해 탄원을 상담한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그대로 그 촌락으로 진입했다. 그때가 오후 6시. 한민들은 우리 부대가 도착하자 바로 사방으로 찾아와 구경하려고 했다. 행진에 장애가 됐기 때문에 총에 검을 장착하고 일렬로 자세를 취했다. 그때 이를 보고 당황하고 낭패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또 토민의 수장에게 설유(說諭)해 해산을 명했다. 그로부터 광주(廣州)로 향했다. 해가 떨어진 뒤 험준한 산길을 걷기가 매우 힘들었다. 도중에 곳곳에 한인이 횃불을 비추며 모였다. 이것은 동도의 징후일 것이므로 점차 경계를 엄중히 하고 오후 8시에 겨우 광주에 도착했다. 청량산(清涼山) 개원사(開元寺)에 투숙했다. 추위가 심해 잠을 잘 수 없었다. 이날의 행군은 8리였지만 병졸의 피로가 심했다. 도로가 험했기 때문으로 병졸이 길가에서 피로로 엎어지는 자가 있었다. 광주는 3리 정도 방면의 산 위에 30여 척의 돌담을 쌓았고 4대문을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돌터널을 만들어 개폐하는 것 역시 경성의 문을 모방했다. 같은 달 13일 오전 8시 광주를 출발했다. 도로가 험했지만 쉬지 않고 행진했다. 그때 병졸 하세 야하치(長谷彌八)가 각기(脚気) 증세를 보여 용산으로 후송했다. 12시 15분에 조현(鳥峴)병참부 송파(松坡)지부에 이르러 점심 식사를 하고 오후 6시 곤지암(混池岩)병참부에 도착했다. 이천(利川)병참지부이다. 천막사에 투숙했다. 이날 새벽부터 큰 서리가 내렸는데 눈이 쌓인 것 같았다. 추위가 살을 에인다. 각 병사가 짚을 깔고 혹은 위에 덮고 잠을 청했지만, 심한 추위로 잠을 잘 수 없었다. 따라서 각 병사의 피로가 더욱 심했다. 행정(行程) 5리. 같은 달 14일 오전 7시 30분 출발. 대략 2리 정도 되는 곳에 작은 촌락이 있었다. 그곳을 통과하려고 할 때 어린 한인이 달려와 우리 부대에 서한을 바쳤다. 펼쳐 보니 그 마을에 동당(東党)에 가입한 사람을 찾아 보고하는 서면이었다. 급히 서둘러 가서 그 집에 도착해 한 명을 포박하였는데, 이름은 김기룡(金基龍)으로 심문하니 아버지는 동당(東黨)의 접주(接主)로서 이전에 전라도 방면으로 가 각 수괴와 모였다고 대답했다. 오후 3시 이천병참부(利川兵站部)에 이르러 바로 포로를 데려와 그곳의 옥에 집어넣었다. 오후 7시 30분 이 김기룡이 우리 보초에게 저항하려 하였으므로 감옥에서 끌어내어 총살했다. 이날 행정은 3리로 우리 부대가 이천에 도착하자 여기에서 1리 반 거리에 동당이 있다고 알려 왔다. 따라서 제2소대 구스노(楠野) 소위를 선발대장으로 수행하여 이 촌락에 이르렀다. 엄하게 탐색하여 읍민을 붙잡아 국문(鞫問)했더니 동당이 많이 있었지만 전에 전라도로 집합했다고 답했다. 또 10여 호의 인가를 에워싸고 집집마다 수색해 달아나는 자가 있으면 총살했다. 이때 촌민들이 놀라 여러 곳에 숨었다. 또 부인들 13명이 함께 달아나는 것을 손짓해 잡아 세운 뒤 마을 대표에게 넘겨주었다. 해가 진 뒤 이천으로 돌아와 숙박했다. 11월 15일 오전 7시 30분 이천을 출발했는데 우리들이 척후대(斥候隊)가 되어 섬배(蟾背; 손바이)에 도착했다. 음죽촌(陰竹村)에 동학 접주가 있다고 듣고 우리 2분대는 분행(分行)하여 음죽에 도착했다. 마을 사무소에서 탐문하였더니 이 마을에 동당이 있었지만 우리 군대가 온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고 도주해 없다고 한다. 이어서 이동(梨洞)을 거쳐 장호원(長湖院)에 있는 본대로 향하는 진로를 취해 오후 8시 17분 장호원에 도착했다. 이곳의 병참부는 가흥(可興)의 지부이다. 오늘 행정은 8리 남짓으로 밤길이어서 병졸의 피로가 심했다. 한인 집에서 숙박. 같은 달 16일 오전 7시 30분 장호원을 출발할 때 권련초(巻烟草) 50개가 병참부로부터 지급되었다. 제2소대 제1분대는 우측 척후로 고마쓰 히토시(小松齊) 1등 군조(軍曹)가 병졸 15명을 이끌고 음무극(陰無極, 성과 무극을 말함), 괴산(槐山)을 거쳐 충주병참부에 집결하라는 명에 따라 이곳에서 나누어 파견했다. 우리들은 본대와 합쳐 함께 병참선을 남행해 오후 4시 가흥병참부에 도착했다. 이곳에 전신통신소가 있었다. 천막사에 숙박했다. 이정(里程)은 5리 반. 같은 달 17일 가흥의 북방으로 3리 거리에 동학당이 있다는 것을 탐지하고 같은 날 오전 3시 출발해 어두운 밤을 이용해 강을 건너 동막읍(同幕邑)으로 향했다. 그때 추운 바람이 강해 몸을 파고들었다. 6시 동막읍에 도착했다. 적은 수의 적을 만나 방화를 시작하여 잠깐 사이에 격퇴했고 마을의 집을 태웠다. 적 사망자 18명이다. 노획품은 활, 창, 칼, 화약, 미곡, 목면(木棉)류였다. 오후 3시 15분 이 마을에 접주 이경원(李敬原)이 있어 즉시 총살했다. 이날이 최초의 전투로 인천에 상륙한 이래 적을 마주친 것이 처음으로 각 병사는 용감히 전진했다. 가흥으로 돌아왔다. 왕복 6리, 도로 상태가 매우 나빠 차량은 지날 수 없는 좁은 길이었다. 가흥 북쪽의 강은 한강의 상류이다. 같은 달 18일 오전 8시 가흥을 출발해 정찰을 위해 제천(堤川) 지방에 제3소대 모리타 지카미치(森田近通) 군조 이하 18명이 파견되었다. 본대는 12시 한강 상류를 건너 점심식사를 하고 오후 2시 충주성에 도착했다. 병참부가 있다. 이 성은 지성(地城)으로 돌담 2장(丈) 5~6척을 쌓아 올렸고 주위는 1여 리이다. 4대문이 있고 문 안은 시장(市場)으로 삼았다. 목사(牧使)가 이 성의 사령관이며, 또 병참사령은 후쿠토미(福富) 대위이다. 19일 체재. 같은 날 오전 12시 모리타 군조가 돌아와 보고하며 말하기를 “소관은 명령에 따라 탐정하며 제천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한국 토민(土民)이 알리기를 죽산(竹山)이라는 촌락에 동학당 수천 명이 집합해 있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곧바로 시찰을 위해 그 촌락에 도달하자 과연 많은 적이 마을 안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속하게 응전했으나 적은 물러설 기색이 없고 더욱 맹렬히 총을 쏘며 우리 쪽으로 근접했습니다. 따라서 각 병사가 흩어져 맹렬하게 사격을 했습니다. 적은 좋은 지형지물에 의지했지만 우리 부대는 강변에 있어 탄환을 막을 장애물이 없었습니다. 잠시 응전하는 가운데 적은 우회해 우리 배후로 돌아가려는 동정이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해가 저물어 지리가 불분명함에 따라 퇴각해 야간에 이동해 오전 3시 가흥에 도착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날 후비보병 독립 제18대대 제1중대 이시모리(石森) 대위를 지휘하는 대대본부에서 명령이 와서 말하기를 “귀 부대는 이시모리 대위와 협의한 다음 적이 함경도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격퇴할 것”이라고 했다. 같은 날 밤 6시 가흥으로부터 이시모리 대위가 말을 타고 와서 말하기를 “적은 제천에 있으므로 귀 부대와 연합해 공격할 것을 약속했다. 따라서 우리 제1중대는 진로를 북쪽으로 잡고 청풍현(清風縣)을 거쳐 제천에 이를 것이다.”고 했다. 이시모리 대위의 중대는 원서동(院西洞)을 거쳐 제천으로 가겠다고 약속하고 각기 오는 21일을 출발 시기로 정했다. 20일 오전 7시 30분 이시모리 대위는 가흥으로 돌아가고, 우리 부대는 체재했다. 같은 달 21일 오전 7시 충주를 출발해 2리 넘게 지난 곳의 촌락에 동학당의 접주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 가옥에 이르렀는데 도주하고 없었으므로 가옥을 불태웠다. 또 더 나아가 4리를 지난 곳에 한 촌락이 있는데 성내동(城内洞)이라고 하였다. 민가가 모두 소실되었다. 이보다 앞서 후비 제10연대가 동학이 이곳에 집결한 것을 격퇴할 때 불태운 것이라고 한다. 우리 부대가 도착하자 촌민이 두려워하여 도주했다. 오후 5시 청풍에 도착해 숙박했다. 행정은 8리였다. 22일 오전 8시 청풍을 출발. 이날 접주 한 명을 체포해 총살했다. 오후 3시 제천에 도착했다. 전에 이미 약속한 이시모리 대위는 제천에 있었으므로 적의 상황을 물어보았더니 “적은 강원도 방향으로 퇴각하였다. 그래서 우리 부대는 배후로 돌아 적을 이쪽으로 유인할 것이다. 그러므로 귀 부대는 충주로 돌아가 다시 가흥 방면으로부터 오면 양 부대가 협격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우리 부대는 다시 충주로 퇴각하기로 결정했다. 이날 행정은 4리. 23일 오전 8시 제천을 출발해 청풍현으로 돌아와 숙박했다. 이날 우리 소대는 적의 빈집 수십 호를 불태웠다. 24일 오전 7시 30분 출발, 오후 5시 충주로 돌아와 숙박하였다. 같은 달 25일 및 26일 병졸이 크게 피로했기 때문에 그곳에 체재했다. 같은 달 27일 큰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전 8시 출발, 오후 2시 가흥에 도착했다. 행로가 힘들었다. 같은 달 28일 똑같이 날씨가 좋지 않았다. 우리 2분대는 금궤(金櫃)를 호위해 충청도 공주에 있는 우리 대대본부 제3중대 소재지까지 송부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므로 바로 3천 원을 수령해 한인 인부 및 태마(駄馬)를 붙여 합계 인원수 26명이 되었다. 이것은 한전(韓銭)에 의해 이 숫자에 이르렀다. 이를 감독해 다시 충주 방향으로 나아갔다. 중대본부는 전에 기약한 원서동(院西洞)으로 가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우리 2분대는 오후 3시 충주에 도착해 숙박했다. 야간에는 추운 바람이 강해 탄화(炭火)로 실내를 데웠기 때문에 탄산가스에 취하는 자가 많았고 병사들의 두통이 매우 심했다. 같은 달 29일 충주병참부에서 한인 통역을 배치하고 오후 5시가 되자 음성현(陰城縣)에 도착해 숙박했다. 이정은 6리. 군수의 대접이 매우 정중했다. 같은 달 30일 오전 8시 출발, 오후 4시 30분 청안(清安)에 도착했다. 부사의 대접이 또한 정중했다. 행정은 5리. 1894년 12월 1일 오전 8시 15분 청안을 출발해 오후 5시 청주에 도착했다. 이전에 용산에서 따로 출발한 제1소대 철도측량호위대의 미키(三木) 군조 이하 십여 명과 만났다. 이곳에 진남병영(鎮南兵営)이라는 조선의 진대(鎭臺)가 있었다. 병사는 1천여 명 있었다. 또 청주성은 목사를 사령으로 하였는데 이 관리는 매우 박정한 자였다. 성채는 석벽(石壁)이었으나 많이 무너지고 파괴되었다. 사방이 개활하여 불요해(不要害)의 땅이라 할 것이다. 같은 달 2일 오전 7시 30분 청주를 출발했다. 여기로부터 옥천(沃川)에 이르는 사이는 동학의 소속원이 많다고 한다. 미키 군조의 보고에 따라 더욱 경계를 엄중히 하였다. 또 전날 제3중대가 통과할 때 다수의 동학당을 격퇴하였다고 하였다. 오후 4시에 이르러 문의군(文義郡)에 도착했다. 그날 특히 야간 경비를 엄중히 하여 여러 곳을 시찰했다. 그날 밤 옥천으로 향했고 한인 인부로 하여금 대대에 통보하게 했는데 곧 대대본부로부터 가가와(香川) 군조 이하 병졸 10명을 인솔해 12시 30분 이곳 문의까지 금궤를 맞이하러 왔다. 청주와 문의 사이는 행정이 4리 반이다. 같은 달 3일 8시 출발해 가가와 군조 이하 병졸과 함께 옥천을 향해 행진했다. 문의로부터 옥천에 이르는 사이의 촌락은 모두 동학당에 속해 지난 11월 29일 제3중대에 의해 격퇴되었기 때문에 6리 사이의 민가에 사람이 없었다. 다시 수백 호를 불태웠다. 또한 길옆에 시체가 많이 쓰러져 개와 새의 먹이가 되었다. 이날까지 모두 7일간의 행군 중 금궤를 진 한인이 29명, 태마(駄馬)가 3두였는데 우마(牛馬)는 잘 걸어갔지만 한인 인부는 동학당을 두려워해 행진을 거부하는 자가 많았다. 따라서 호송 중 감수(監守)의 힘이 드는 것은 글로 다 하기 어렵다. 그리하여 옥천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 대대에 금궤를 인도하고 관사에 숙박했다. 그날 밤 친구 스기노 도라키치를 면회하여 여러 가지 전투 이야기와 지금까지의 괴로움에 대해 여러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대본부로부터 조선 술과 소고기를 많이 지급받았다. 같은 12월 4일 오전 8시 옥천을 출발. 대대본부와 제3중대는 공주 및 청산(靑山)에 있는 동학을 격퇴할 목적이라고 한다. 오후 6시 문의로 돌아와 숙박했다. 5일 문의를 출발해 청안(淸安)으로 돌아왔다. 행정은 8리 30정(丁). 같은 달 6일 8시 청안을 출발해 오후 4시 음성으로 돌아와 숙박했다. 같은 달 7일 오전 7시 음성현을 출발해 오후 6시 충주로 가서 숙박했다. 그곳에서 11일까지 체재하며 중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으나 아직 오지 않았다. 같은 달 11일 중대는 강원도 웅사(熊伺) 및 양연(揚渕) 부근에 있다는 소식이 있어 오전 8시 충주를 출발해 청풍(清風)으로 갔다. 오후 6시 도착해 숙박했다. 밤 8시 30분 충주로부터 명령장을 지닌 한인 인부가 도착했다. 부대는 야간행군해 급하게 충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로부터 서둘러 준비를 해 바로 야간행군해 충주를 향해 돌아갔다. 도중에 중대본부는 단양으로부터 충주 방면으로 돌아왔다. 따라서 도중에 본대의 숙소에서 만났는데 그때가 밤 3시였다. 산길이 험한 데다가 야간행군을 했기 때문에 매우 피로했다. 같은 달 12일 오전 4시 30분 출발, 철야로 행군을 해 충주로 돌아온 것은 오전 9시였다. 같은 달 13일 충주를 출발해 오후 3시 안보(安保)병참부에 도착했다. 행정은 5리. 이 병참부는 민가로 산 중턱에 천막사가 있었다. 이 천막사는 지난 10월 26일 동학 때문에 소실되었다. 이곳 병참부의 가주(家主)가 동학의 접사(接司)라는 것을 우리 중대가 탐지하여 바로 가주를 붙잡아 포박하여 총살했다. 그리고 또 마을 안을 모두 엄중히 수색하고 그날 밤 민가에서 숙박했다. 이 마을 서쪽 끝에 온천이 있었다. 같은 달 14일 7시 출발해 동남쪽으로 나아갔더니 조령산(鳥嶺山)이 있었다. 수목이 무성하고 산봉우리가 구름 사이에 솟아 있었다. 고개에 큰 문이 있어 그곳 2층에 올라 둘러보니 경상도, 태봉(台封), 낙동, 대구 등 각 곳이 내려다보인다. 서쪽을 보면 충주 부근이 한눈에 들어온다. 즉, 충청과 경상 양도의 경계이다. 오후 4시가 되어 문경(聞慶)병참부에 도착했다. 행정은 4리. 이곳에서 배낭과 기타 사용하지 않는 물품을 맡겨 두고 각 병사는 타환대(打換袋)만 지녔다. 이날 밤 추위가 심해 세수할 때 머리카락이 얼었다. 같은 달 15일 오전 6시 30분 출발, 오후 4시 태봉의 병참부에 도착했다. 낙동병참부이다. 이정은 6리. 이날 북풍이 강해 추운 기운이 몸을 관통했고 점심식사가 얼어붙었다. 이것을 불에 데워서 먹었다. 밤에 숙사에 도착해 연탄불로 온기를 취하려 했기 때문에 각 병사 가운데 탄산가스에 취한 자가 8명 있었다. 그 가운데 상등병 마가이 에이키치(真貝榮吉), 일등졸 나카시로 우시노스케(中城丑之助)가 가장 심했으나 생명에는 이상이 없었다. 같은 달 16일 오전 8시 출발, 오후 3시 30분 상주에 도착했다. 경상도 상주목사의 서기관 성은 박(朴), 이름은 용래(龍來)가 동학당에 가입했음을 탐지하고 급히 포박하여 매우 고문을 했다. 마침내 자백하며 말하기를, 우리 동학당에 가입하지 않으면 가택을 불태우고 가족을 죽이겠다는 협박을 받아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그것이 사실이었으므로 그 관직을 박탈하고 추방하였다. 이날 밤은 우리들이 위병사령의 근무를 했다. 이날 행정은 5리. 같은 달 17일 오전 7시 출발. 이날 큰 눈이 내렸다. 행정은 4리. 곡송동(谷松洞)에 도착해 숙박했다. 이 마을은 동학당이기 때문에 촌민이 도주하고 없었다. 같은 달 18일 오전 8시 30분 출발, 오후 3시 개령(開寧)에 도착했다. 행정은 3리. 이곳의 관리 김광한(金光漢), 이준서(李俊瑞) 외 수십 명이 동학당 소속원이었기 때문에 모두 총살했다. 같은 달 19일 오전 8시 30분 출발, 오후 3시 30분 김천(金泉)에 도착했다. 이곳에 동학당이 주둔하고 있었다. 작은 무리가 깃발들을 들고 총소리를 냈다. 우리 부대는 대응사격을 하면서 바로 소굴을 무너뜨렸다. 이때 적의 사망자 10명이다. 그리고 우리 부대는 이상 없이 2리를 더 나아갔다. 같은 달 20일 오전 8시 출발, 오후 2시 지례부(知禮府)에 도착했다. 행정 4리. 이곳에 병영이 있다. 같은 달 21일 오전 8시 30분 출발, 오후 3시 신창(新昌)에 숙박. 행정 4리. 같은 달 22일 오전 8시 30분 출발, 오후 3시 30분 거창현(居昌縣)에 도착해 숙박했다. 행정 3리 반. 같은 달 23일 오전 8시 30분 출발, 오후 1시 30분 안의(安義)에 도착해 숙박했다. 행정 3리. 이날 안의 촌락을 수색해 동학 잔당 8명을 체포해 총살했다. 같은 달 24일 오전 8시 출발, 오후 1시 40분 함양현(咸陽縣)에 도착해 숙박했다. 5리의 행정이었다. 같은 달 25일 오전 7시 출발, 오후 3시 운봉부(雲峰府)에 도착했다. 성안은 지형이 평탄했다. 이곳은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이다. 행정 5리. 이곳으로부터 전라도로 향했다. 따라서 경계를 더욱 엄중히 했다. 같은 달 26일 오전 7시 출발 남원(南原) 지방을 향해 진로를 취해 1리 반 나아가자 도달한 곳에 큰 산이 있었다. 산 이름은 운봉산(雲峰山)이라고 한다. 산세가 방추형(方錐形)으로 암석이 돌출되어 푸른 하늘에 솟아 있고 바위 사이에 통로가 있었다. 봉우리 위에서 내려다보면 전라, 경상 양도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이 산 위에 토민들이 많이 모여 총기를 휴대하고 요소에 보초를 세워 동학당의 진입을 방어했다. 오후 3시 50분 남원성에 도착했다. 이 성은 옛날 신라라고 칭했다. 지성(地城)으로 2장(丈) 남짓의 석벽으로 사방을 둘러싸고 위에 총구멍을 뚫었다. 성 밖 2리 방면은 평탄했다. 북쪽으로 1리 반 떨어진 곳에 용성(龍城)이라 칭하는 곳이 있는데, 둘레 2리 남짓으로 마을은 석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부사(府使)의 별장으로 보인다. 적을 방어하기 좋은 요충지의 지세이지만 지난 20일 동학당에 성이 함락되어 부사는 살해당하고 시내의 민가는 모두 불에 타고 쫓겨났다. 운봉 지방의 토민들이 무기를 들고 남원성의 동학당을 격퇴하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동학당은 북쪽 용성고산(龍城古山)에서 농성했는데, 우리 군대가 도착하자 급히 세 방향으로부터 공격을 시작했다. 동학은 일본군이 도착한 것을 보자 도주하면서 총성을 내며 대응했다. 이때 우리 군은 급히 나아가 산 위로 올라갔고 석벽을 넘어 가택을 수색했다. 그러나 적은 이미 도망하여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인가에 불을 지르고 남원으로 돌아왔다. 밤이 깊었으나 연기와 불이 아직 하늘을 비췄다. 이날 저녁에 돌아오자 숙사는 동학당으로 인해 재가 되었기 때문에 각 병사는 불결한 2~3개의 집에서 좁게 잤다. 같은 달 27일 남원에 체재했다. 같은 달 28일 같은 곳에 체재. 이는 동학당을 수색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각 지역에 척후병을 나누어 보내어 엄밀하게 탐정을 하였다. 이날 오후 3시 대대본부 및 제3중대는 한국병 교도중대 및 통영병 각 1중대를 데려왔다. 그때 제3중대병으로부터 전해 듣기를, 공주 및 연산현(連山縣)에 동학당 수천 명이 모여 있어 우리 군이 급히 공격을 실시하여 모두 물리친 바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우리 중대에 소속된 스기노 상등병이 지난 10일 연산전투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는 것을 듣고 경악하여 눈물을 흘렸다. 절친한 친구를 잃어 매우 슬펐다. 같은 달 29일 계속 체재. 오늘 한인이 소식을 전하기를 동학의 대장이 순창현(淳昌縣)에 있다고 하였다. 이를 접하고 조장 1명, 병졸 2분대 외에 도쿄경시청의 순사가 포획에 착수하여 출발했다. 같은 달 30일 체재. 오전 8시부터 지난번 불을 질렀던 용성산에 도착했다. 타고 남은 사원 및 기타 가옥을 불태워 동학당이 사용할 수 없도록 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므로 바로 제1중대는 다시 고성산(古城山)으로 가 사원과 민가를 불태웠다. 같은 달 31일 오전 8시 남원을 출발해 오후 2시 곡성현(谷城縣)에 도착해 숙박했다. 행정은 4리 반이었다. 이날 도중에 동도의 가옥 수십 호를 불태웠다. 소대장 구스노(楠野) 소위는 몇 명의 병졸을 데리고 척후로 나가 동도의 가택 수십 호를 태워 버렸다. 전라도의 각 곳 도처에 동도가 배회하였으므로 농민들은 작물, 벼들을 베어 들에 쌓아 놓았다. 이 미곡을 집 안에 둘 때는 동도에게 약탈당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날 우리 제1소대 측량호위병이 낙동으로부터 방한 외투를 호송하여 왔다. 이날 밤 동학 10명을 붙잡아 돌아왔다. 한인에게 명령해 태워 죽였다.(소살(燒殺)) 곡성 근방에는 중국인이 설치한 전선이 있었다. 해가 바뀌어 1895년 1월 1일 이곳(곡성)에 체재하며 신년 축하식을 행했다. 같은 달 2일 오전 8시 35분 출발, 행정 4리(里) 30정(丁)으로 오후 2시 40분 옥과현(玉果縣)에 도착해 숙박했다. 밤이 되자 한인이 동학도 5명을 붙잡아왔다. 고문한 뒤에 총살하고 사체는 불태웠다. 같은 달 3일 오전 7시 출발, 6리의 행정으로 동복현(洞福縣)에 도착했다. 이곳 현감은 적의 습격을 우려해 민병 5백여 명을 모아 죽창 또는 총을 들고 동학도의 습격을 방어했다. 바로 동학도 무리 12명을 붙잡았다. 같은 날 밤 능주목사(綾洲牧使)로부터 적의 습격 징후가 있으므로 우리 군대에 응원을 청해 왔다. 같은 달 4일 오전 4시 우리 군은 동복을 출발해 오후 11시 능주에 도착했다. 행정은 6리 반. 능주에 도착하자 목사는 적의 습격을 우려해 수백 명의 인민을 모아 경계하고 있었다. 우리 군은 근처의 마을을 수색해 동학도 70~80명을 잡아왔다. 고문하였더니 각자 자백하였으므로 가벼운 자는 민병에게 넘겨 풀어 주게 하고 무거운 자 20명 정도를 총살했다. 5일 수색을 위해 체재. 목사는 각 병사들의 숙소에 와서 한 사람마다 명함을 주고 지금까지의 위문을 하였다. 같은 날 우리 군은 계책을 세워 민병에게 명해 부근 촌락으로 보내 “우리들은 동학인데 지금 일본군이 공격해 왔으므로 동학도 무리는 우리들과 함께 빨리 이곳을 퇴거해야 한다.”라고 큰 소리를 지르며 도로를 달리게 했다. 그때 동학도에 들어간 자 수백 명이 낭패하여 총기와 죽창을 들고 도주했다. 이때 민병이 도망가는 동학도를 모두 붙잡아 우리 부대로 보냈다. 노획한 총기 75정과 죽창, 활 등은 태워 버렸다. 포로는 논의하여 가벼운 자는 추방에 처하고 무거운 자는 사형했다. 노획한 총기는 목사의 창고에 맡겨 두었는데, 원래 이 무기는 목사가 비치한 무기라고 한다. 같은 달 6일 오전 8시 출발. 동남쪽으로 2리 지난 곳의 산 위에 수백 명의 한인이 집합해 동학 적을 방어하느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 군은 해산을 명하고 그로부터 오후 4시에 이양원동(李陽院洞)에 도착했다. 행정은 4리. 이때 한인이 달려와 행군로 1리 앞에 웅치(熊峙)라고 하는 비탈길이 있는데, 이 비탈을 넘어 동학당 수천 명이 다가오고 있다고 알렸다. 따라서 근방에 척후를 보내 경계하도록 하고 충분히 수색하였더니 완전히 허위 정보였다. 날이 저물어 이양원촌에 도착해 사영(舍營)했다. 우리 2분대는 하사초(下士哨)의 임무를 띠고 통행로에 나누어 파견했다. 그날 밤 대대에서 명령이 내려와 “귀 부대는 능주로 돌아가고 제1소대는 구스노 소위를 수행해 지대로 장흥 부근으로 향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중대장은 제3소대를 이끌고 능주로 돌아갔다. 이로부터 제2소대는 장흥 부근을 수색할 방편을 강구했다. 같은 달 7일 오전 7시 10분 이양원을 출발해 제3소대는 능주로 돌아가고, 제2소대는 구스노 소위가 인솔하여 장흥 방향으로 나아가 웅치에 이르렀다. 도로가 매우 험하고 고개를 넘어 약 2리를 지나 추치(枢峙)라는 곳에 이르렀다. 다섯 곳의 돌출지를 돌았을 때 우리 부대를 이끌던 한인 오학수(呉鶴秀)라는 자가 동적(東敵)을 만나 물품과 말을 약탈당하려 하는 것을 우리 첨병 부대가 보았다. 곧바로 달려가 상황을 시찰하였더니 적 70~80명이 모여 우리 부대를 향해 발포하였다. 우리 소대는 바로 산개하여 전진해 산 위를 점령했다. 이때 적은 방화하면서 퇴각하여 약 6백 야드를 달렸다. 우리 부대는 약 8백 미터 정도를 전진해 촌락을 점령했다. 이미 적은 싸우지 못하고 도주했다. 따라서 읍내를 수색하여 동학당의 가옥 40~50호를 불태웠다. 이 촌락에는 접주인 박지준(朴之駿)의 빈집이 있었다. 그때가 오전 11시로 병사를 정돈해 다시 행진해 장흥 방면으로 향했다. 석치(石峙)에 도달했을 때 첨병이 알려오기를 적 약 3백 명 정도가 나팔을 불며 온다고 하였다. 따라서 우리 부대는 석치의 산중턱에서 정상에 올라 적과 5백 야드 떨어진 곳으로 갔다. 적은 평탄한 땅을 행진하여 왔다. 우리 부대는 잠복해 눈 아래로 적의 무리를 내려다보며 일제히 맹렬히 사격했다. 적은 낭패하여 도주하기 시작했다. 우리 부대는 일제히 고성을 지르며 적군을 상대했다. 이때 적의 사망자는 불과 10명으로 인가 여러 채를 불 지르고 전진해 장흥부 가도로 나아갔다. 약 1리 반을 지난 곳에 적의 무리가 군기를 몇 개 흩날리며 하나의 구릉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를 건산(乾山)이라고 하며 남쪽에 하천이 흐르고 있고 서북쪽은 큰 산이 이어지며 동남쪽 반 리 떨어진 곳에 장흥부가 있다. 그 세력은 약 2천여 명으로 보이며 산 위에 흰 눈이 쌓인 듯했다. 우리 부대를 발견하자 때때로 발포하며 굉음을 질러 장흥에 있는 동학 무리와 연락을 취했다. 우리 소대는 바로 산의 응달로 잠복해 숨었다. 제1, 제2분대로 하여금 적의 우익(右翼)을 치게 하고 제3, 제4, 제5의 3개 분대는 본도(本道)에서 적의 전면을 공격하게 하였다. 따라서 우회병이 도달할 때까지는 앞의 3분대 및 소대장은 산 응달에 숨어 전투 준비를 갖추고 제1, 제2분대는 좌측 산허리의 계곡에 잠행하였다. 그때가 5시였다. 산 사이를 통과하자 산 위에 5~6명의 한인이 나타나 우리를 향해 사격했다. 우리 부대는 응전하지 않고 나아가 적의 우익 1천 미터 지점으로 갔다. 이때 발포한 5~6명의 동학도는 우리가 급히 행진하는 것을 보고 도주하였다. 제1, 제2분대는 최대의 가늠자[照尺]를 걸고 일제히 3회 사격을 했다. 그렇지만 적은 세력이 컸고 또 원거리였기 때문에 움직일 기색이 없었다. 우리 병사들은 성이나 약 6백 미터의 밭을 신속히 지나 촌락에 도달해 적으로부터 4백 미터 떨어진 곳으로 나갔다. 이때 적이 우리를 향해 발포했다. 우리 부대는 촌락의 은폐물에 의지하며 일직선으로 늘어서 4백, 5백의 가늠쇠를 걸고 고마쓰(小松) 일등 군조의 호령에 따라 일제히 사격했다. 탄환이 명중하자 적은 도망치려 하였다. 따라서 급히 사격하여 총을 발사하니 적은 마침내 낭패하여 크게 무너지고 폄성(貶声)이 대지를 진동했다. 따라서 우리 부대는 총에 검을 장착하고 고성을 지르며 적진에 돌입했다. 이때 본대는 일찌감치 본 길로부터 나아가 적의 정면에서 급히 사격했다. 제1, 제2분대가 적진에 진입하는 소리와 함께 본 길에서 나아간 본대는 사격을 그치고 착검해 돌진해 나갔다. 우리 부대가 적진에 도달했을 때 일찌감치 적은 동쪽 산속으로 도망쳐 달아났고 방화하면서 어지러이 흩어졌다. 이 근방의 촌민은 동학 때문에 고생을 했기 때문에 일본군이 도착하자 남녀 아이의 구별 없이 덩실거리며 기뻐하였다. 이때 이미 6시 반이 되었다. 오늘 행군은 곳곳에서 적과 마주쳤기 때문에 우리 부대는 종일 식사를 못해 심한 공복 상태였다. 촌민들이 서둘러 동학도의 저녁식사를 가져와 우리 군에게 제공했다. 각 병사는 매우 기뻐하며 식사를 했다. 이 전투로 적의 사망자는 수십 명이고 우리 부대는 이상이 없었다. 노획품은 대포 3문, 오래된 소총 수백 정, 화약 약간, 칼 수백 개, 창 수백 본, 그 가운데 죽창이 많다. 기타 활, 큰북, 우마(牛馬), 목면(木棉), 염분(染粉) 즉 인도제 유황, 타는 용도의 바구니[乘物籠], 군기(軍旗) 등이었다. 일몰 시간이 되어 노획품을 정돈하고 그곳에서 노영(露營)했다. 다음 날 장흥에 있는 적을 타격할 계책을 세웠다. 또 장흥에 있는 동학의 적(敵)은 밤새도록 횃불을 밝히고 때때로 대포를 발사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밤을 새웠다. 같은 1월 8일 장흥에 있는 적을 공격할 작전이 정해졌다. 오전 2시 건산(乾山)을 출발해 이 마을의 토민을 안내역으로 삼아 장흥에 이르렀다. 성 북쪽에 강이 흐르고 있는데, 흙으로 만든 다리는 동학이 파괴하여 물속을 걸어 성문에 진입하였다. 석벽(石壁)의 하단으로 내려가 봉명대(鳳鳴台)에 있는 적의 우익으로 나왔는데 적은 이를 알지 못했다. 단지 추위를 이기기 위해 횃불을 활활 태우고 있었다. 우리 부대는 2백 미터 지점까지 은밀히 전진해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그때 동쪽에 구름이 끼자 1개 분대는 오른쪽에 있는 산 위의 적에, 다른 분대는 횃불 가까이에 있는 적을 발견하고 급하게 2~3회 일제사격을 하고 이어서 착검하고 돌진했다. 적은 불의의 공격을 받아 낭패하여 같은 편까지 공격을 하며 도망치려고 했다. 우리 군이 급히 사격하고 또 돌격하자 적은 크게 무너졌다. 도망갈 길을 잃고 산 위에서 추락하여 죽는 자도 있었다. 패잔병의 소리가 소나기 구름 사이에 울리는 듯했다. 우리 부대는 반 리 이상을 추격했다. 이때 ‘대일본 만세’라는 큰 소리가 세 번 울렸다. 이날의 노획품은 깃발 15개, 낡은 대포 10문, 화약 약간, 소총 및 탄환, 그 숫자는 헤아리기 어렵다. 그 밖에 일본도(日本刀) 약간, 활, 목면류, 다량의 종이, 한전(韓錢) 8백 관목(貫目) 정도, 쌀 60석, 소 5두, 말 30두였다. 이러한 노획품을 정리하고 사영(舍營)에 들어간 것은 바로 오후 1시였다. 오후 4시에 이르러 한인이 알려 오기를 동학당이 이곳으로 습격해 온다고 하였다. 따라서 우리 부대는 곧바로 방어에 나섰다. 강진부(康津府)로부터 오는 동도 천여 명이 장흥으로 오려고 하였는데 일본군이 와 있다는 것을 듣고 서쪽 산속에 숨어들었다. 우리 군이 1리 남짓을 전진해 수색하였더니 마침내 퇴각하였으므로 일몰이 되어 장흥의 숙소로 돌아왔다. 이날의 전투로 적의 사망자 수가 10명에 이르렀고 부상자는 그 수를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다행히 우리 군은 한 명의 부상자, 사망자도 없었다. 저 장흥에 있는 동학당은 원래 순천부에 있었는데 보병 제10연대의 후비군에게 격퇴당해 이곳 장흥으로 도망쳐 왔다. 이곳의 부사와 양민을 죽이고 또 민가를 태우는 등 난폭해져 인민 가운데 죽은 자는 50~60명으로 어떤 사체는 개와 새의 먹이가 되었다. 소실된 재 속에서 수십 명의 시체가 끊임없이 나왔다. 또 한인의 슬퍼하는 소리가 매우 가련하였다. 같은 달 9일 그곳에 체재. 같은 날 후비독립 제18대대 시라키(白木) 중위가 이끄는 소대 및 교도중대의 한병(韓兵)이 10시에 이곳에 도착했다. 오후 1시 봉황대에 있는 전방 병사가 수만 명의 적군이 덮쳐 온다고 알렸다. 곧바로 우리 소대장과 시라키 중위의 부속병 및 통영병이 함께 정렬하였다. 시라키 중위의 부대는 밭에서 다가오는 적을 막기 위해 봉황대 하단의 요소로 갔고 우리 소대는 장흥부 남문에서 서쪽 산 위를 점령했다. 그런데 이미 적군은 산허리를 올라 우리를 향해 맹렬하게 발포하였다. 또 산 아래 동쪽의 전포(田圃)를 내려다보니 흰옷을 입은 적군이 마치 눈이 쌓인 것 같았고 함성이 대지를 진동했다. 잠시 총소리가 매우 커지자 시라키 중위 부대는 좋은 기회를 틈타 급하게 일제사격을 했다. 적이 도망치려 하였으므로 곧바로 밭에 산개(散開)하여 도주하는 동도를 급하게 추적하였다. 또 구스노 소위의 소대는 석벽을 넘었고, 효도(兵頭) 군조의 분대는 오른쪽으로 나와 적의 퇴로를 공격할 계획이었다. 또 제1, 제2분대는 산허리 및 바위 위에 의지하고 있는 적을 맡았다. 다른 분대는 남문 및 석벽에 기대어 사격하였다. 이때 바위 위에 있는 적은 자리를 고수하고 물러서지 않고 몇 분 동안 시간을 보냈다. 따라서 소대장이 화가 나 돌진을 명했다. 제1, 제2분대는 총에 착검을 하고 150미터까지 근접해 크게 소리를 지르며 일제히 적진으로 돌입했다. 적은 총기를 버리고 달아났다. 바로 추격해 생포 8명, 타살(打殺)한 자 3명, 그로부터 밭으로 나와 급하게 추격하여 2리 남짓의 곳까지 도달했다. 시라키 중위는 남쪽의 산간까지 적을 추격해 타살한 자가 많았다. 적은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다. 일부는 말을 버리고 작은 종잇조각에 초 자(草字)를 적은 승두권(縄頭巻)은 산같이 버려졌다. 우리 부대는 서남쪽으로 적을 추격하여 타살한 자가 48명, 생포한 부상자는 10명이었다. 이어서 일몰 시간이 되어 양 부대 모두 개선하여 숙소로 돌아온 뒤 생포한 자를 고문한 뒤에 불태워 죽였다. 이날은 노획품이 적어 소총은 십여 정, 창 52자루, 배낭 32개로 어제 노획품과 함께 모아 두었다. 같은 달 10일 체재. 이날 노획한 무기는 모두 부숴 버리거나 태워 버렸고 쌀과 동전 등은 이곳 빈민에게 주었다. 11시 30분 이시모리(石森) 대위가 병졸과 한병(韓兵) 약간 명을 데리고 도착하여 말하기를, 적은 남면 지방으로 퇴각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각 위관은 회담을 하여 내일을 기해 각각 출발 준비를 했다. 그 방법의 대략은 제1중대는 좌측 지대가 되고, 제3중대는 별동대가 되어 강진으로부터 남면 지방으로 전진할 것. 또 시라키 중위는 우익 지대가 되고 제18대대 미야모토(宮本) 소위가 이끄는 부대는 중로분진대(中路分進隊)가 되었는데 이 부대에 우리 제3분대를 합대(合隊)하게 하였다. 각 부대의 집합지는 대흥면(大興面)으로 정했다. 같은 달 11일 오전 7시 30분 장흥부를 출발해 동쪽 해안을 따라 행진했다. 이날은 적을 엄중히 수색하여 통행하는 남자는 모두 체포하여 국문했다. 그 가운데 한 명의 한인이 있어 통영병이 이를 붙잡았는데 저항했으므로 한병(韓兵)이 화가 나 짚에 불을 붙여 그 남자를 붙잡아 그 속에 던졌다. 옷에 불이 붙자 낭패하여 3정(丁) 정도 달리다 쓰러진 것을 총을 쏴 죽였다. 보고 있던 사람들 중에 웃지 않는 자가 없었다. 죽청동(竹青洞)에서 1리 떨어진 촌락 입구에 40~50명의 한민이 깃발을 날리며 우리 군대를 맞이한다며 길 아래 밭에 일렬로 정렬해 머리를 수그리고 있었다. 그래서 대장이 의심하여 이 안에 동도에 가입한 자가 없는지를 물었더니 동도는 한 명도 없다고 대답했다. 그 말에 매우 수상한 점이 있었기 때문에 꾀를 내어 옆에 있던 열 살 정도의 어린아이를 불렀다. “이 안에 동학도가 있으면 빨리 알려 주어야 한다. 그럴 경우에는 너에게 많은 돈을 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린아이는 기뻐하며 대답했다. 즉, “이 안에 동도가 있습니다.”고 가리키며 그 사람을 알려 주었다. 바로 그 사람을 포박해 숙소까지 연행했다. 그런데 위의 어린아이를 그대로 둘 경우에는 남은 동도가 그 어린아이를 죽일 것임은 물론이므로 부모를 불러 그 아이를 달라고 권했다. 모친이 울면서 승낙하여 곧바로 아이에게도 이러한 사정을 들려주고 준비를 갖춰 우리 부대를 따라왔다. 이 모자의 이별은 아무리 무신경한 조선인이라도 부모 자식의 애정은 다르지 않아 1리 정도를 울면서 전송하였다. 이 가련한 일을 보고 일본혼(日本魂)을 지닌 군인들이더라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천포(四千浦)를 거쳐 오후 5시 죽청동에 도착했다. 특히 이날은 큰 눈이 내려 추운 바람이 살을 파고들었다. 이 마을에 도착하자 이전의 동도 16명을 끌어내 고문하고 그 가운데 8명은 방면하고 나머지 8명은 총살해 사체를 태워 버렸다. 또 시라키 중위는 이날 오후 4시경 죽천시(竹川市)에서 적 3백여 명과 마주쳐 바로 공격해 수 분 만에 적은 흩어져 도주했다. 이때 적의 지휘관 최동(崔童)이라는 자가 말 위에서 지휘하였다. 곧 저격하게 해 총탄이 다리를 관통해 낙마했다. 옆에 있던 동도가 이를 도와 도망했다. 추격하였지만 일몰 시간이 되었고 특히 예상치 못한 큰 눈이었기 때문에 마침내 행방을 잃어 포획하지 못하고 헛되이 돌아왔다고 한다. 이 최동은 나이가 17세이지만 지혜로운 자로 동학도 대군의 지휘관이 되었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적의 사망은 18명, 부상 11명, 그 밖에 말 5두를 노획했다. 같은 달 12일 8시 30분 제2분대는 월림동(月林洞)에 있는 대접사(大接司) 이법헌(李法軒)의 가옥을 수색하기 위해 따로 파견되었다. 눈이 조금 쌓였다. 도중의 도로에서 호랑이의 큰 발자국을 보았다. 길 안내자인 오학수(呉鶴首)는 이것을 보고 크게 경악했다. 월림동에 도달하여 이법헌의 가택에 도착했다. 살펴보니 당사자는 허둥지둥 도망치고 없었기 때문에 약간의 비밀 서류를 습득하고 가옥에 불을 질렀고 버려진 우마(牛馬) 6두를 노획했다. 죽천시를 거쳐 대흥면에서 본대와 합류했다. 그리고 본대는 해안을 따라 전진해 잔적 11명을 체포해 죽였다. 이 밖에 3명은 몸과 옷에 불이 붙은 상태로 도주하였는데 3~4정(丁)의 거리에서 마침내 바다에 뛰어들어 죽었다. 이날은 도중에 가옥이 많이 있었지만 인민이 모두 도망가고 한 명도 없었다. 4시 30분 대흥면에 도착했다. 분견지대 및 별동대가 이곳에 모두 모였다. 이 대흥면은 인구가 680여 호가 있었지만, 인민이 도주하여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양미를 구하기 어려워 현미를 징발했다. 이것을 각자에게 분배해 병졸이 스스로 갈아서 백미로 만들었다. 혹은 물을 길어 와 저녁식사 준비를 하였다. 이날 눈이 내리고 강풍이 살을 파고들어 매우 힘들었다. 저녁식사가 만들어지자 뜨거운 물과 소금으로 식사를 마치고 약간의 휴식을 취한 뒤 숙박했다. 같은 달 13일 오전 8시 출발했다. 이날의 행군은 산길이어서 도로 상태가 나빴고 게다가 엄중히 수색 정찰을 하였기 때문에 매우 곤란하였다. 산속에서 잠복해 있던 남은 적도 수십 명을 죽였다. 또 양민들은 일본군의 높은 은혜에 감사하여 탁주와 떡 등을 가져와 군대를 대접했다. 행진로의 각 촌락은 동도로 인해 많은 가옥이 잿더미가 되었다. 장흥부에서 1리 반 떨어진 곳에 높은 산이 있는데 이곳이 대흥면으로부터 장흥부로 통하는 본도로 폭이 조금 넓었다. 지난 9일의 전투에서 많은 동도가 이 길을 통해 도망쳤으므로 길옆에 죽창과 승두권(縄頭巻) 등을 버린 것이 산과 같았다. 또 길이 피에 물들었고 사체를 길옆 또는 도랑에 버린 것이 수십 명이 되었다. 오후 4시 장흥에 도착해 숙박했다. 이때 능주(綾州)에 있는 중대본부로부터 탄약을 보내왔다. 송위(送衛)로 즈노(津野) 군조 이하 17명이 왔다. 작년 12월 29일 남원에서 나누어 파견한 조장 및 경시, 순사는 한인을 통해 순창읍(淳昌邑) 주막 안에서 동학당의 대괴수(大魁首) 전녹두(全彔豆)를 포획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 전녹두는 수재로 박학하고 다른 사람보다 힘이 센 자라고 한다. 곧바로 경성공사관으로 보냈다고 한다. 같은 달 14일 장흥에 체재. 이날 체포한 17명은 모두 죽였다. 또 한인 한 명이 와서 말하기를, 죽천(竹川) 가까운 마을인 학송(鶴松)이라는 곳에 동도의 대장이 숨어 있다고 하므로 포박하라고 요청했다. 따라서 그곳에 5명의 병사를 보냈다. 그 가운데 한 명은 니시오(西尾) 상등병으로 이를 감독하여 학송으로 가게 했다. 오후 5시 포박해 왔는데, 이자는 바로 다리에 관통상을 입은 최동(崔童)이었다. 나이는 17세. 이를 대대본부로 보내게 되었다. 이날 밤 나주에 있는 대대본부로부터 명령이 내려와 적은 해남 지방에 있으므로 귀관은 해당 지방으로 전진하라고 하였다. 바로 그 준비를 하였다. 같은 달 15일 오전 8시 장흥을 출발해 오후 1시 강진현에 도착해 점심식사를 했다. 1시 30분 출발, 오후 4시 40분 해남에 도착했다. 이동 거리는 7리. 강진현은 이전에 동도로 인해 민가가 소실되었다. 이보다 앞서 제18대대 및 제3중대의 분지대(分枝隊)가 와서 동도를 물리쳤으나 인민이 도망가고 없었기 때문에 숙사가 곤란했다. 이곳은 동도 때문에 타 죽은 인민이 백여 명 있었다. 같은 달 16일 체재. 같은 달 17일 오전 8시 출발해 다시 강진에 이르러 오후 3시에 도착했다. 행정은 4리. 이곳에 도착하자 전에 포획한 최동을 져 나르던 한인이 3명 있었는데 마을 사람이 바로 다가와 한 명의 한인 인부를 아무런 형편을 보지 않고 가차없이 구타하고 솔잎에 불을 붙여 태워 죽였다. 이때 우리 군대의 고용된 자를 죽였으므로 이곳 인민을 붙잡아 국문하였더니 답하기를, 그 인부는 원래 장흥 부근의 자로서 지난번에 이 읍에 동도의 일원으로 와서 이같이 많은 민가를 불태운 자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 인민을 구조했다. 이 읍의 한민 사체가 논밭에 수십 구가 쓰러져 있어 개와 새의 먹이가 되었다. 같은 달 18일 체재. 지난날 우리 군이 장흥 및 봉명대를 함락한 이래 동도가 점차 돌아오는 것을 붙잡아 모두 죽였는데 3백 명에 달했다. 오후 3시 제18대대 분견중대가 도착했다. 또 능주에 체재하고 있던 중대본부는 해남으로 와 우리 2소대 역시 해남으로 오라는 명령이 왔다. 같은 달 19일 오전 8시 출발, 오후 3시 10분 해남에 도착했다. 행진 거리는 4리. 동학도 접주 이동식(李東植), 김춘래(金春来) 형제 모두 3명을 붙잡았다. 같은 달 20일 체재. 오후 3시부터 큰 눈이 내렸다. 같은 달 21일 체재. 지난번에 붙잡은 최동 및 이동식, 김춘래와 함께 노획한 깃발과 여러 물품을 나주에 있는 대대본부에 송달했다. 호위병으로 제2소대 제3분대 하사 이하 18명을 파견했다. 같은 달 22일 체재. 이날 다시 잡아온 적병(敵兵) 16명을 성 밖에서 총살했다. 같은 달 23일 체재. 이날 오후 3시 나주로 간 제3분대가 돌아왔다. 같은 달 24일 체재. 이날 제2소대 제1분대 및 제3소대 제1분대 2개 분대는 한병인 통영병을 이끌고 진도(珍島)를 수색하고 우수영으로 가는 정찰대로 명을 받아 구스노 소위가 이를 지휘해 오전 8시 이곳을 출발했다. 같은 달 25일 오전 7시 30분 이곳을 출발해 오후 4시 우수영에 도착했다. 행정은 7리. 우수영은 전라도의 서남단으로 동남쪽을 면하고 후방에 작은 산이 있고 전면에 진도가 있다. 작은 섬이 이곳저곳에 산재한다. 이 성의 하단은 하나의 만(灣)을 이루어 해저가 깊어 선박이 정박하기에 적합하다. 음력 그믐날 민가에서 비좁게 사영(舎営)을 하였다. 이때는 다다미 한 장에 5명씩이어서 매우 힘들었다. 같은 달 26일 체재. 이날은 음력 정월 초하루였으므로 이곳에서 구춘(旧春), 신년을 맞이했다. 외출 산책의 허락을 받아 총을 메고 산책했다. 이곳은 특히 학과 기러기가 가장 많이 모였다. 동도도 조금 평정되었으므로 지방 인민도 신년을 축하했다. 좋은 옷을 입고 선박은 깃발을 세워 올려 떠들썩했다. 오후 2시 반부터 눈이 내려 3척 이상 쌓였다. 같은 달 27일 오전 7시 30분 출발, 오후 4시 30분 해남부에 도착했다. 또한 나누어 파견한 2개 분대는 진도에서 돌아왔다. 당일의 행군은 같은 길을 통해 해남으로 돌아왔다. 행정은 7리. 같은 달 28일 현지 체재. 같은 달 29일 우리 제2분대에는 동도 포박의 명령이 내려졌다. 따라서 오전 7시 30분 출발, 3리 정도 지난 곳의 도로에 한 동네가 있었다. 즉 해당하는 곳이었으므로 바로 동도 접사(接司)의 집으로 갔으나 일찌감치 도망가고 없었으므로 가택에 불을 지르고 서류 및 큰 북 등을 우리 중대까지 가지고 돌아왔다. 같은 달 30일 해남에서 체재. 같은 달 31일 같은 곳에 체재. 단, 이날 동도의 잔당 7명을 붙잡아왔다. 이를 성 밖의 밭에 일렬로 세워 놓고 총에 착검하여 모리타 지카미치(森田近通) 일등 군조의 호령에 맞춰 일제 동작으로 찔러 죽였다. 구경을 하던 한인과 통영병 등이 매우 심하게 경악했다. 1895년(메이지 28년) 2월 1일 체재. 당일 나주에 있는 대대로부터 부대가 신속히 나주부로 집합하라는 명령이 있었다. 같은 달 2일 오전 9시 해남을 출발, 오후 1시 별진역(別津駅)에 도착해 숙박했다. 행정은 3리. 이날 태마(駄馬) 한 마리가 쓰러졌다. 큰 눈이 내렸다. 추운 바람이 강해 점심식사를 먹을 수 없었다. 같은 달 3일 오전 9시 출발, 오후 4시 영암부(霊巌府)에 도착해 숙박했다. 밤에 한기가 심했다. 행정은 4리. 같은 달 4일 오전 8시 30분 출발, 오후 5시 나주부에 도착했다. 행정은 7리. 나주부는 옛날 임나(任那)라고 칭하던 곳이다. 지성(地城)으로 서남쪽은 산이 둘러싸고 있다. 30여 척의 석벽을 주위에 쌓았고 4대문에는 돌로 터널을 만들어 요해(要害) 견고한 곳이다. 성채 안에는 민가 4만 호가 있었다. 이곳에 도착하자 남문으로부터 4정(丁) 정도의 거리에 작은 산이 있었는데, 사람 시체가 겹겹이 쌓여 실로 산을 이루었다. 이것은 지난번 장흥부의 전투 후 엄하게 수색하였으므로 동도가 거처가 곤란해져 연일 자기 집으로 돌아가려는 것을 민병 또는 우리 부대 병사가 포획하여 심문한 다음 중죄인은 죽였다. 날마다 12명 이상 103명에 이르렀다. 따라서 이곳에 시체로 버려진 자는 680명에 달했다. 근방에는 냄새가 심했고 토지는 백은(白銀)과 같았고 사람 기름이 얼어붙었다. 이와 같은 사체를 본 것은 전쟁 중에도 없었던 바이다. 이 동학당의 시체는 개와 새의 먹잇감이 되었다. 같은 달 5일 체재. 이날 병참감으로부터 명령이 내려왔다. 즉, 독립 제19대대는 경상도 대구로 가서 집합하고 명령을 기다리라고 하였다. 이어서 우리 제2소대는 전공(戦功)에 대한 감사가 있었다. 오후 3시 아소(阿蘇) 군조가 병졸 3명을 이끌고 돌아왔다. 큰 암호랑이, 개[狗] 한 마리와 그 새끼를 데리고 돌아왔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이 호랑이는 해남 지방의 산악에 살면서 밤마다 민가로 내려와 돼지와 개, 닭 등을 잡아먹었다. 따라서 토민은 그 맹호 퇴치를 바랐으므로 바로 병사를 이끌고 그곳으로 향해 바위동굴에 이르러 때려잡았는데 신장이 6척 이상, 높이가 3척이었다. 같은 달 6일 체제. 이날은 완전히 동도가 진정이 되었으므로 장교, 각 병사 및 한병(韓兵) 등이 나주목사와 송별회를 하였다. 술과 안주, 그리고 한인 경예자(軽芸者) 등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또 인천병참감부로부터 명령이 왔는데 귀 부대는 동, 중, 서의 세 길로 나누어 가능한 한 남은 무리의 적을 수색하여 동학이 재기하지 못하도록 하고 서둘러 행군해 용산으로 집합하라고 하였다. 같은 달 7일 체재하였다. 이날 각 부대는 출발 준비를 하였다. 2월 8일 오전 8시 나주를 출발했다. 성의 북문을 나와 행진하여 오후 3시 30분 광주에 도착해 숙박했다. 행정은 6리. 같은 달 9일 오전 8시 광주를 출발, 오후 2시 30분 담양에 도착해 숙박했다. 행정은 5리. 같은 달 10일 오전 8시 30분 출발, 오후 1시 35분 순창에 도착해 숙박했다. 행정은 4리. 이날은 큰비가 내려 몸과 옷이 물에 빠진 것 같았다. 신탄(薪炭) 불로 말렸다. 같은 달 11일 오전 7시 30분 출발, 오후 2시 15분 남원에 도착해 숙박했다. 이날 남원으로부터 반 리 떨어진 곳에서 낙동(洛東)으로부터 금궤(金櫃) 및 여러 물품을 호송하여 오는 제2중대 히사카타(久方) 군조의 분대를 만났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일본 제국 육군대장 아리스가와노미야(有栖川宮)의 서거 소식을 들었다. 또 북청군(北淸軍)이 크게 승리하여 웨이하이웨이(威海衛)를 함락하고 우리의 점령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남원부의 목사는 지난달 동학에 의해 살해되었는데 경성으로부터 신임 목사가 도착하여 우리 군이 도달하자 도중까지 환영하러 나왔다. 행정은 4리 반. 같은 달 12일 오전 8시 30분 남원 출발, 오후 1시 35분 하번암동(下番巖洞)에 도착해 숙박했다. 행정은 5리. 같은 달 13일 오전 7시에 출발, 오후 1시 30분 장수에 도착해 숙박했다. 행정은 5리. 같은 달 14일 오전 7시 출발, 오후 1시 30분 안성장(安城場)에 도착해 숙박했다. 이정은 8리. 같은 달 15일 오전 7시 30분 출발, 오후 5시 10분 무주에 도착했다. 행정은 5리. 이날 큰비가 내려 행군하기가 곤란했다. 강물이 불었고 비가 온몸을 적셨다. 같은 달 16일 오전 8시 출발, 오후 4시 10분 유점(鍮店)에 도착했다. 행정은 4리. 이 마을은 충청도로 즉, 영동군의 영지이다. 이 마을은 가난하여 식염조차 적었다. 또 성냥도 집집마다 없어 화로에 습당(摺糖)을 넣어 불을 보관하고 있었다. 같은 달 17일 오전 8시 출발, 같은 날 10시에 영동군에 도착했다. 행정은 3리. 같은 달 18일 전날과 같은 시간 출발, 오후 3시 30분 청산(靑山)에 도착해 숙박했다. 행정은 5리. 이날의 행군은 영동을 2리 지난 곳에 하나의 강이 있었다. 폭이 좁은 작은 강이지만 전날부터 내린 비로 홍수가 났다. 교량이 파괴되어 각 병사는 걸어서 강을 건넜다. 강우 전에는 길이 결빙되었지만 비가 내렸기 때문에 얼음이 녹아 두께 1척 이상의 파편이 흘러 내려왔다. 걸어서 건너기에 매우 위험했다. 청산현은 동학당이 크게 날뛴 적이 있어 많은 민가가 소실되었다. 2월 19일 오전 8시 출발, 오후 4시 보은에 도착했다. 행정은 5리. 이날 오후 5시 20분경부터 큰 눈이 내렸다. 추운 기운이 강해 몸을 파고들었다. 2척 이상 눈이 쌓여 밤에 잠을 잘 수 없었다. 같은 달 20일 오전 7시 출발, 30분이 지날 무렵부터 큰 눈이 내렸다. 2~3일 전부터 추위가 심했고 날마다 비 또는 눈이 내려 매우 추웠다. 가장 심하게 언 곳은 눈썹과 수염으로 얼어서 백은색 침과 같았다. 다리는 마비되어 걷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군의(軍醫)가 소지한 온도계는 7도로 떨어졌다. 그래서 많은 병사들이 다리에 동상을 입었다. 오후 4시 청천(青川)에 도착해 숙박했다. 행정은 5리. 같은 달 21일 오전 8시 출발, 오후 3시 10분 괴산군(槐山郡)에 도착해 숙박했다. 행정은 5리. 괴산군은 인가가 1,300여 호 있었는데, 그 가운데 820여 호는 지난해 겨울 동학으로 인해 소실되어 불쌍하게 생각하고 걱정했다. 같은 달 22일 오전 8시 출발, 오후 3시 30분 음성현(陰城縣)에 도착해 숙박했다. 행정은 4리. 이날 밤 12시 30분부터 큰 눈이 내렸다. 이때 우리들은 위병사령이었는데 추운 바람이 살갗을 뚫고 지나갔다. 같은 달 23일 오전 8시 출발, 오후 3시 30분 곤지암(昆池巖)에 도착해 숙박했다. 행정은 3리 반. 이날은 큰 눈이 쌓여 깊은 곳은 4척이 넘었다. 보행이 곤란하고 도로가 분명하지 않아 논밭으로 떨어지거나 도랑에 빠지거나 또는 도로에서 벗어나는 등 통상 평균 3척의 쌓인 눈을 헤치고 겨우 곤지암의 촌락에 도착했다. 야간에 추위가 격렬했다. 같은 달 24일 오전 7시 30분 출발. 이날은 전날부터 눈이 계속 내렸고 결빙이 심했다. 2척에서 3척 4~5촌 눈이 쌓여 도로가 분명하지 않아 통로를 벗어나고 도랑에 빠지고 혹은 구릉을 뛰어 올라가는 등 매우 힘들었다. 그렇지만 한편의 은세계이기 때문에 학과 기러기 등은 먹이 찾기가 곤란해 많게는 5~6천 마리가 모여 있었다. 우리 2분대는 이날 전위(前衛)였으므로 앞서 나가 그 새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일제히 사격해 큰 학 두 마리를 포획했다. 그것을 총에 걸고 행로를 취해 보행해 겨우 장호원(長湖院)으로 나왔다. 그 시각이 12시 30분으로 행정은 3리였다. 이곳에 이천(利川)지부 병참부가 있었다. 경상도 태봉병참부를 출발한 이후 이곳에 오기까지 총 70일간으로 그 사이는 날마다 소금에 절인 무나 절인 소고기, 닭고기를 먹었다. 일본제 간장, 된장 등은 결코 먹을 수 없었다. 수염은 3촌(寸) 이상 자라 그 모습이 마치 산적과도 같았다. 실로 전쟁 중의 군인은 이와 같은 모습이 아닐까? 같은 달 25일 오전 7시 30분 출발. 이날은 특히 추위가 심해 온도계가 0도로 떨어져 손발이 얼고 몸의 감각이 없었다. 오후 4시 이천에 도착했다. 행정은 6리. 같은 달 26일 오전 7시에 출발해 오후 4시 조현(鳥峴)에 도착했다. 행정은 6리. 이날 12시 곤지암병참부에 도착했다. 점심식사 때 방한을 위해 일본 술을 지급했다. 추위 때문에 술통 속의 술은 모두 얼어 있었다. 찬술은 단지 얼음을 씹는 것 같았다. 또 계란을 지급했는데 이것 또한 마찬가지로 얼어서 삶은 계란같이 노른자와 흰자가 모두 굳어 있었다. 한국 땅의 얼음은 대단했다. 밤에는 잠을 잘 수 없어서 괴로웠다. 같은 2월 27일 오전 8시 출발, 오후 4시 30분 송파(松坡)병참부에 도착해 숙박했다. 행정은 4리 반. 조현부터는 도로의 폭이 넓어졌지만 눈과 얼음 때문에 통행이 매우 곤란했다. 같은 달 28일 오전 7시 출발, 당시 송파병참부의 북쪽 아래는 한강으로 두 군데로 흐르는데 물이 매우 깊다. 그런데 현재 추위가 심해 흐르는 물이 결빙해 두께가 4척 이상의 하얀 얼음이 되었다. 태마(駄馬), 우차(牛車) 등은 얼음 위를 통행했다. 이것을 걸어서 건너 11시에 경성에 도착했다. 그때부터 3시까지 용변을 보고 산책이 허락되어 거류지에서 오랜만에 목욕을 했다. 80여 일의 때를 한 번에 닦아냈다. 5시 용산에 도착했다. 이정은 4리. 5시 반이 되어 각 중대 모두 용산에 돌아와 모였다. 즉, 독립 제19대대 및 한병(韓兵), 교도중대, 통영병이었다. 제3소대는 나주로부터 이곳으로 돌아오는 도중 중국군의 잔당 16명을 포박해 왔다. 이들을 다음 날 공사관으로 보냈다. 호송을 위해 순사 두 명을 따라가게 했다. 6시 30분이 되어 조선 국왕 폐하로부터 토벌대 위로를 위해 칙사로 육군대신 조의현(趙義玄)이 찾아왔다. 칙어(낭독)가 끝난 뒤 각 부대는 ‘조선 국왕 폐하 만세’, ‘대일본 천황 폐하 만만세’를 삼창하고 각 부대는 해산했다. 오늘은 큰 눈이 내렸다. 특히 눈 속에서 몇 시간 동안 서 있었기 때문에 심한 추위를 몸에 느꼈다. 밤에는 잠을 잘 수 없었다. 날이 밝아 3월 1일. 용산에 체재했다. 명령을 기다리는 상태였다. 같은 달 2일 체재. 같은 달 3일 체재. 이날 중대에서 방한(防寒) 및 위로를 위해 술과 안주를 지급하였다. 같은 달 4일 체재. 이날 경성 유람[遊歩]을 허락받았다. 그러나 한성의 경황은 전술한 것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 이는 청결법과 한인 순사를 배치한 것뿐이다. 저녁에 용산 숙소로 돌아왔다. 같은 달 5일 체재. 아직 명령이 없었다. 같은 달 6일 체재. 이날은 조선 국왕 폐하로부터 하사 이하에게 술과 안주가 지급되었다. 같은 날 이곳 제19대대는 남부병참수비대로 명을 받았다. 즉, 제1중대는 송파(松坡)로부터 이천(利川)까지, 제3중대는 장호원(長湖院)에서 안보(安保) 사이를 맡았다. 제2중대는 용산에 체재하며 유동대(遊動隊)가 되었다. 따라서 각 부대는 그 준비를 하였다. 용산 체재 중 추위가 심해 밤에는 수면할 수 없을 때가 여러 번 있었다. 1895년 3월 7일 오전 10시 용산을 출발, 남진해 한강에 이르렀다. 강물이 결빙했기 때문에 걸어서 강을 건넜다. 이때 햇빛으로 얼음이 녹아 두꺼운 얼음에서 파삭파삭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고 발밑에는 파란 물이 그 깊이를 알 수 없었다. 실로 기분이 나빴다. 점차 강을 건너 샛길로 우회해 겨우 오후 4시에 송파진(松坡鎮)에 이르렀다. 행정은 4리. 험한 길을 행진하였기 때문에 병졸들의 피로가 심했다. 같은 달 8일 제3소대 및 중대장은 바로 송파병참부를 교대하였고, 다른 소대는 오전 9시 송파진을 출발해 조현(鳥峴)지부에 도착했다. 12시에 우오즈미(魚住) 군조가 지부를 교대했다. 오후 1시 출발하여 주리촌(酒里村)에 도착한 것이 오후 2시였다. 행정은 5리. 이 마을에서 숙박했다. 같은 달 9일 오전 8시 출발. 5리를 간 곳에 곤지암천의 하류가 있었는데 해빙으로 인해 물이 흘렀다. 많은 한인이 우리 병사를 업고 건넜다. 12시 곤지암병참부 이천지부에 도착했다. 제1분대 고마쓰 히토시(小松齋) 군조가 이곳에서 수비 교대를 했다. 5시 30분 이천에 도착했다. 이동 행정은 6리 반이었다. 같은 달 10일 이곳의 민가에서 체재. 같은 달 11일 병참 수비를 교대했다. 즉, 사령관은 구스노 도시나리(楠野俊成) 소위였다. 우리 제2분대는 관리의 집, 김광한(金光漢)의 집에서 사영했다. 같은 달 24일 일본 바칸(馬関)에 청국의 강화사로 이홍장(李鴻章)이 도착했다는 전보를 들었다. 1895년 4월 14일 명령이 내려졌다. 제2분대는 장호원병참부 수비를 명받았다. 같은 달 15일 우리 2분대는 오전 9시 이천을 출발해 오후 4시 30분 장호원에 도착했다. 행정은 6리. 같은 달 16일 병참부를 교대해 장호원의 수비가 되었다. 지부 사령은 군조 쓰노 다메키치(津野為吉)였다. 같은 날 같은 시각부터 급양 담당을 명받아 본부 조수가 되어 시라하마(白濱) 통역, 니시오 한지로(西尾半次郎)와 함께 본부에서 근무했다. 1895년 4월 27일 척후(斥候)로 무극장(無極場)의 가도를 행진해 청견선(青見線)의 동쪽 연못 속에서 스나이더총, 검 1자루를 주었다. 단, 10호이다. 따라서 관계 부서에 보고하고 중대본부에 송달했다. 이것은 바로 동학당이 우리 후비 8연대의 병사를 죽이고 약탈한 물건으로 생각되었다. 같은 날 귀대. 5월 15일 전신 호위로 안평읍(安平邑)을 거쳐 여주부(驪洲府)에 도착했다. 이곳에 전신공부(工夫) 집합소가 있었다. 한강의 상류 남측에 있었다. 행정은 6리. 다음 날 16일 숙소로 돌아왔다. 6월 15일 다시 여주를 출발해 다음 날인 16일 병참부로 돌아왔다. 거슬러 보면 5월 9일 오전 5시 전보가 와서 어젯밤 체푸(芝罘)에서 강화조약이 정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25일 출전한 군대에 화족(華族) 일동으로부터 위로품으로 대표 후작 도쿠가와 아쓰타카(徳川篤敬), 자작 나가오카 모리요시(長岡護美), 정3위 고다이고 다다타카(後醍醐忠敬) 세 명이 권련초(巻煙草) 2백 갑과 술과 안주료(주효료; 酒肴料)로 금 30전을 하사했다. 같은 11월 5일 지부장 쓰노 다메키치가 한인 적(賊)에 의해 왼쪽 얼굴의 눈 부분부터 코와 입 부분까지 칼에 베였다. 이곳은 병참부에서 1리 이상 서북쪽에 해당하는 산속으로 음죽현(陰竹縣)으로 가는 통로이었다. 그때 우리들은 적을 정벌하기 위해 출장했으므로 곧바로 쓰노는 붕대를 감고 병참부로 데려가 서둘러 이천의 군의(軍医)에게 보냈다. 7일 미키 슈에쓰(三木周逸) 군조가 와서 대신 지부장을 맡았다. 같은 11월 10일 병참부 교대 명령이 전보로 내려왔다. 이어서 23일 가흥(可興)으로부터 후비보병 제10연대 제1대대 제2중대 이세가와(伊勢川) 군조 이하 인부 9명이 와서 같은 날 교대했다. 같은 달 24일 장호원을 출발했다. 이날 한인이 전송하러 많이 와서 도로에 충만했다. 백암(伯巖)에서 배를 타고 여주로 가서 1박 했다. 같은 달 25일 오전 6시 여주를 배로 출발해 주막동(酒幕洞)에서 숙박했다. 이날 밤이 되어 3리 정도의 강을 내려갔다. 그런데 강바닥이 낮았고 바위와 돌이 있어 힘든 곳이 많았다. 또 배 안이 매우 추워 배에서 육지로 나와 민가에서 숙박했다. 26일 오전 6시 30분 배가 출발. 하안(河岸)의 모래사장에 기러기와 오리들이 많이 있었다. 배에서 총을 쏴 기러기 1마리, 오리 3마리를 잡았다. 송파진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5시 반이어서 병참부에 폐를 끼쳤다. 그곳에서 1박. 27일 송파진을 출발해 경성 및 만리창을 거쳐 용산병참부에 도착해 숙박했다. 같은 달 28일 용산을 출발했다. 이때 중대본부와 합류해 용성동(龍城洞)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이어서 인천에 도착했다. 천막사에서 숙박했다. 이날 독립 제19대대 제2중대 구와바라(桑原) 중위 이하 52명이 돌아왔다. 29일 인천 시내를 산책했는데 임시명령이 내렸다. 부대는 오늘 오후 5시 기선 쓰루가마루(敦賀丸)를 타고 귀국할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4시 30분 출발해 쓰루가마루에 승선했다. 이 배는 740톤으로 1시간에 10해리의 속력이었다. 배 안에서 숙박했다. 11월 30일 인천항을 뒤로하고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기적과 함께 운전을 시작했다. 각 기계가 움직이는 소리가 선체로 퍼졌다. 서쪽 황해 방향으로 진행했다. 해상의 바람과 파도가 거세지 않았다. 12월 2일 12시 바칸(馬関) 히코지마(彦嶋)에 입항하여 검역을 받고 오후 1시 30분 출항하여 오후 8시 30분 이요쿠니(伊豫国) 미쓰하마(三ツ濱)에 도착하여 정박했다. 이때 환영을 나온 사람들은 마쓰야마(松山) 여단장, 즉 다치미(立見) 소장을 비롯해 연대 및 대대장, 그리고 현령, 경찰, 사범학교 생도, 중소학교 학생, 시내의 시민 각 호마다 1명씩이었다. 미쓰하마 경찰학교 및 각 호의 인민, 악대 등이 해안 도로에 충만했다. 불꽃을 쏘아 올리고 개선군 만세라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이어서 작은 배로 상륙하여 구보다기선(久保田気船) 중개사무소에서 휴식한 뒤 기차를 타고 마쓰야마에 도착했다. 시내의 각 집마다 국기를 걸고 등불을 밝혀 매우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우리 부대는 마쓰야마시 가야마치(葭町) 다이린지(大林寺)에서 숙박했다. 같은 12월 4일 에히메현(愛媛縣), 고치현(高知県) 등의 군사세화역(軍事世話役) 유지자로부터 나무잔과 부채 등의 선물을 받았다. 같은 달 9일 후비독립 제19대대 제1중대를 해산했다. 그렇지만 화물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마쓰야마시 가야마치 도쿠나가 여관(徳永旅宿)에서 계속 숙박했다. 19일 수화물이 도착함에 따라 당일 미쓰하마로 나왔다. 이날 제2, 제3중대도 귀국했다. 오후 3시 상행선 기선 제2 우와지마마루(宇和嶋丸)에 승선해 다도쓰(多度津)에 도착한 것은 오후 12시 10분이었다. 하나비시기선(花菱気船) 중개사무소로 가서 1박 했다. 같은 달 20일 오전 8시 기차를 타고 고토비라(琴平)로 가서 참예(参詣)를 하고 하시구라(箸蔵)를 넘어 히루마(昼間)에 도착해 1박 했다. 같은 달 21일 요시노카와(吉野川)행 배를 빌려 시키지무라(敷地村) 스미토모 마스자부로(住友益三郎) 및 우시노시마(牛ノ島) 구로베 구마하치(黒部熊八)와 함께 가와시마(川嶋) 요키노하나(岩ノ鼻)에 도착했다. 그때가 오후 4시 30분이었다. 환영의 형편에 따라 진고 시마테이(陣後嶌禎) 집에서 1박 했다. 같은 12월 22일 가키지마(柿嶋), 가사이(笠井) 촌장을 비롯해 병사세화역(兵事世話役), 학교 생도, 촌내 각 호에서 나온 사람들, 귀향 군인이 추운 바람을 무릅쓰고 진고(陣後)까지 마중을 나와 국기 및 빨간색과 흰색으로 된 천, 금기(錦旗)에 우리들의 이름을 적어 넣고 개선만세라고 찍어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그로부터 말을 타고 가모지마(鴨嶋)로 돌아갔다. 북쪽으로 돌면 마을 경계에 막문(幕門)이 있었다. 우리 집 문 앞에도 마찬가지로 막문을 설치했다. 불꽃을 쏘아 올리고 혹은 정청(征清)의 전황(戦況)을 표현한 인형을 설치하였다. 또 개선 군인의 자리를 마련하고 기타 유지자, 각 자리의 순서가 있었다. 축문을 낭독하고 자리를 파할 때 ‘제국 만세, 개선 군인 만세’의 삼창을 하였다. 같은 달 27일 인천병참감으로부터 마쓰야마에 있는 대대본부를 거쳐 하사적임(下士適任) 증서를 송부해 왔다. 1896년 5월 10일 가키사마(柿嶌) 촌장의 주선으로 전쟁에서 귀향한 군인 일동에게 위로로 술과 술안주 대금으로 5원을 하사하였다. 같은 날 학교에서 연회, 불꽃 발사, 출석자 57명의 매우 성대한 향응이었다. 이것은 촌장 및 우리 촌민 유지자들의 분발에 의한 것이다. 같은 달 20일 아와쿠니(阿波国) 구 지사(知事) 후작 하치스가 시게아키(蜂須賀茂昭) 공이 보낸 액자의 글을 받았다. 그 글귀는 풍공일월소(豊功日月昭)라고 되어 있다. 같은 해 6월 8일 정청(征清)의 전공(戦功)에 의해 훈8등에 서훈되었고 서보장(瑞宝章) 및 금 50엔을 하사받았다. 같은 날 육군 보병 2등 군조에 추서되었고 같은 해 같은 날 종군기장(従軍記章)을 받았다. 1897년 4월 1일 1894~95년 전쟁에 이어 다시 조선 지역 방면에서 군무에 복무하였으므로 금10엔을 하사받았다.

주석
요슈(豫州) 이요노쿠니(伊予国), 지금의 에히메현(愛媛県)이다.
산슈(讃州) 사누키노쿠니(讃岐国), 지금의 가가와현(香川県)이다.
아산(牙山) 원문에는 ‘아산(芽山)’으로 되어 있다.
1리 이 종군일지에서 언급한 ‘리’는 모두 일본 리로, 당시의 일본 리 1리는 조선 리 10리 정도에 해당한다.
간류지마(眼流島) 암류도(巖流島)의 오기이다.
치에지마(知惠島) 원문에는 ‘혜혜도(恵恵嶋)’로 되어 있는데, 오기로 보인다.
간논사키(観音崎) 원문에 ‘환음기(歓音崎)’로 표기된 것은 오기이다.
창안도(昌安嶋) 당시의 안창도로 현 신안군 안좌도를 말한다.
출발해 원문에는 ‘투묘(投錨)’로 되어 있으나, ‘발묘(拔錨)’의 잘못으로 보인다.
혼성 ‘곤정(昆整)’으로 되어 있는 것은 ‘혼성(混成)’의 오기로 보인다.
곤지암(混池岩) 원문대로 표기.
충주 원문은 ‘중주(中洲)’로 되어 있다.
제3소대 분대일 것이라는 원문 주석이 있다.
충주 원문에는 ‘중주(中洲)’로 되어 있다.
통영병 통위영병을 말한다.
동복현(洞福縣) 동복(同福)의 오기이다.
박지준(朴之駿) 박지준은 동학농민군 중 이 기록을 통해 이름이 처음 확인되는 인물이다.
전녹두(全彔豆) 전봉준(全琫準)을 말함.
조의현(趙義玄) 조희연(趙羲淵)의 오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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