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산 이씨(完山李氏) 세종대왕 제13남 밀성군(宻城君)의 13세손 이헌집(李憲楫)의 아들 이병렬(李秉烈)의 처는, 서산 유씨(瑞山柳氏) 세마공(洗馬公) 유지춘(柳之春)의 5세손 유정렴(柳正濂)의 딸이다. 평소 부인으로서 덕이 있어 일찍부터 규문(閨門)에 명성이 드러났다. 이병렬이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떠나 슬하에는 일점혈육이 없었고, 집안에는 병환이 깊은 칠순의 늙은 시아버지가 홀로 계셨다. 집안이 본디 청한(淸寒)하여 곤궁함이 매우 심하였으나 스스로 자기 분수라 여기고 감내하였다. 부인은 남편이 임종한 날에 즉시 목숨을 끊어 남편을 따르고자 하였으나 다만 의지할 데 없는 늙은 시아버지가 염려되어 억지로 참고 목숨을 지켰다. 직접 길쌈하고 바느질하여 밥을 마련하고 채소를 팔고 죽순을 빌려 찬거리를 올려서 시아버지가 배불리 드시도록 힘썼으며, 가을에는 버려진 명주를 주워 옷을 짓고 겨울에는 마른 솔가지를 주워 아궁이에 불을 때서 시아버지의 몸이 따뜻하도록 힘썼다. 이렇게 10여 년 동안 봉양하여 시아버지가 그 덕에 건강하고 편안하였으니, 마을 사람들이 부인을 칭송하였다. 불행히 갑오년(1894, 고종31)에 일어난 동비(東匪)의 소요를 만나 적도(賊徒) 수십 명이 밤을 틈타 방으로 들어와서 부인의 몸을 겁탈하려고 하였다. 부인이 격렬하게 소리쳐 꾸짖고는 죽기로 맹세하고 자결하여 구덩이로 몸을 던지려 하니 적도들이 놀라고 두려워 감히 포악한 짓을 하지 못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일개 부인의 지조를 삼군(三軍)의 군사라도 뺏을 수 없다는 것이다. 부인의 정렬(貞烈)이 저와 같고 효성이 이와 같으니, 비록 옛날 조영녀(曹嬰女)의 열행(烈行)이라 할지라도 이보다 훌륭하지 않을 것이며, 진 효부(陳孝婦)의 충심을 다한 봉양을 오늘날 다시 본 것이다. 이에 사림(士林)이 부인의 행실을 흠모하여 관정(官庭)에 보고하니 관정에서 가상하다는 제사(題辭)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