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상(今上) 31년 갑오년(1894)은 곧 명(明)나라 숭정(崇禎) 후 319년이고, 청(淸)나라 광서(光緖) 20년이다. 이해에 동학이 치성하여 남쪽 지역이 크게 어지러웠다. 김개남(金開南)ㆍ전봉준(全琫準)의 무리가 최시형(崔時亨)과 서장옥(徐章玉)을 사사(師事)하여 몰래 무리를 모으고 병사를 일으켜 살인과 방화를 자행하며, 참람하게 왕제(王制)를 행하여 마을들을 겁박하고 약탈하더니 마침내 전주성(全州城)을 공격하여 관리의 목을 베고, 조령(詔令)을 어기고서 공세(公稅)를 거두며, 궁전을 불살라 훼손하고 문묘를 때려 부쉈다. 기강이 무너지고 풍교(風敎)가 쇠퇴한 것이 그때처럼 극심한 적이 없었으니, 아! 통탄스럽도다. 금년 6월에 함열(咸悅) 영소전(靈昭殿)에서 공자의 영정을 모사하여 회문산(廻文山) 아래 궁현동(弓峴洞)의 가숙(家塾)에 사적으로 봉안하고 마침내 너덧 명의 관동(冠童)과 경전을 강론하였고, 인근 동민들과 약속하여 밭 갈고 나무하는 본업에 힘쓰게 하여 아무리 어리석은 지아비나 어리석은 아낙이라도 거짓된 도에 물들지 않게 하였으니, 이것이 하나의 큰 다행이다. 조정에서도 외구(外寇)의 내정 침탈 때문에 소탕할 겨를이 없다가 비로소 겨울 사이에 순찰사 겸 위무사(巡察使兼慰撫使) 이공 도재(李公道宰)와 심영 중군(沁營中軍) 황후 헌주(黃侯憲周)가 명을 받들고서 남쪽으로 내려왔다. 원평(院坪)과 태인(泰仁)에서의 전투에 동비(東匪) 무리가 연패하고 섣달 초하루에 김개남(金開南)이 제일 먼저 본동(本洞)에서 사로잡히니, 이는 실로 국운이 무궁한 것이고 성령(聖靈)의 도움이 미친 것이다. 이듬해 정월 완영(完營)의 전령(傳令)에 이르기를 “지금 듣건대, 태인의 종송리(種松里)에 문선왕(文宣王)의 영정을 봉안하여 선비들이 아직도 현송(絃誦)하는 풍조를 가지고 있다 하니 지극히 가상하다. 경군(京軍)과 일병(日兵)은 물론이고 영속(營屬)이나 읍속(邑屬)도 이 고을을 침해하지 말라. 그리고 이번에 동비의 수괴 김개남을 사로잡은 것은 본 동민이 의리를 떨치고 힘을 바친 결과이니, 성의를 보이는 도리가 없을 수 없다. 그러므로 조사해서 징수한 동비 무리의 결렴전(結斂錢) 200냥으로 특별히 본 고을의 어려움을 구제하고 동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라.” 하였다. 완문(完文)에 이르기를 “태인현 종송리는 민속이 소박하고 순수하며 유학의 풍조가 아직도 보존되어 풍진세상에서도 오히려 현송하는 소리가 들리고, 또 동비의 수괴 김개남을 사로잡은 것은 이 한 고을이 힘을 떨치고 수고를 바친 결과라는 점에서 그 적개심이 어떠한지 가늠할 수 있으니 권장하는 도리가 있어야 합당하다. 그러므로 이에 먼저 해당 마을 각 가호의 부역을 면제하고, 마을의 이름을 종송(種松)에서 종성(宗聖)으로 고칠 것이다. 본읍에서도 또한 이 뜻을 알아서 영원히 침해하지 말라.” 하였다. 현감 박후 희성(朴侯羲成)이 부임한 초기에 부역을 면제하고 절목을 작성하여 보냈는데, 그 내용에 이르기를 “수괴 하나를 죽여 만백성을 살렸으니 그 수고에 권장을 베푸는 것이 합당하다. 또 이 풍진세상에서도 현송이 끊이지 않으니 더욱 지극히 가상하다. 이에 절목을 작성하여 본 고을의 각 가호의 부역을 즉각 감면하니, 영원히 따르고 바꾸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동민들을 불러 모아 내용을 알리자, 마을의 어른인 박규환(朴奎煥) 등이 말하기를 “지금 이렇게 완영과 본읍이 구휼을 베풀고 부역을 면제하는 것은 바로 성인의 교화를 선양하고 백성을 권장하는 은택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만 그것이 영원할 수 있는 방도로는 계를 맺고 규약을 정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자본을 심고 이윤을 불려서 일부는 제향 비용에 보태고 일부는 현송의 풍조를 보전하는 데에 씀으로써 산골 마을 백성들이 향음례(鄕飮禮)를 익히게 하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습니까.” 하니, 모두 “그렇습니다.” 하였다. 마침내 200냥에서 나누어 30냥을 흥학재(興學齋)에 떼어 주어 특별히 하나의 계를 만들게 하고, 나머지 170냥을 등급을 나누어 고르게 나누어 준 뒤에 각각 1민(緡)씩 거두어 벼 15섬[包]을 사서 마을에 주었다. 그 계를 이름하여 ‘동약(洞約)’이라 하고, 약속ㆍ조례ㆍ강신(講信)은 아래에 기록해 놓았다. 돌아보면 졸렬하고 노둔한 이 사람은 오랫동안 허빈(虛牝)에 엎드려 있으면서 초목과 함께 썩어질 생각이었는데 불행히 풍진세상을 만났다. 본래 장수의 자질이 없어서 견마(犬馬)의 수고를 바치지 못하고 오로지 동민에 힘입어 겨우 학업을 지켜 왔는데 외람되이 위무하고 권장하는 은혜를 받게 되었다. 스스로 격려되고 감동스러운 마음이 없지 않아 고루하다는 비판을 무릅쓰고 그 전말을 서술한다. 을미년(1895, 고종32) 2월 하순에 평택(平澤)의 임병찬(林炳瓚)이 서문을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