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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돈헌유고 遯軒遺稿
일러두기

영력(永曆) 5년 경술년(1910) 동지에 평택 임병찬은 삼가 자향(紫香) 한 봉과 황촉(黃燭) 두 자루를 갖추어 동쪽을 향해 곡배(哭拜)한 뒤에 선생의 동생인 황원(黃瑗) 씨에게 드리고, 감히 매천(梅泉) 황 선생의 영전에 다음과 같이 제문을 올립니다. 선생의 덕스러운 용모를 제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일찍이 여러 사람에게 들었고, 선생의 덕스러운 음성을 제가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선생의 글은 보았습니다. 같은 지역에서 태어났으나 사는 곳이 동서로 떨어져 있었기에, 삼성(參星)과 상성(商星)삼성(參星)처럼 서로 만나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평생 풀지 못하고 이제 와서 난초와 혜초 같은 분을 잃은 탄식만 한갓 간절하니, 아! 슬픕니다. 나라의 변고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니, 을사년(1905)에 생겨나 정미년(1907)에 나타났으며 경술년(1910)에 드러나 결국에는 대현(大賢)과 정충(貞忠)과 열사(烈士)와 철유(哲儒)가 차례로 의리를 지켜 자결하였으니, 아! 애통합니다. 짐승들의 발자국이 온 나라에 퍼져 선성(先聖)의 도를 들을 길이 없고 선왕(先王)의 제도를 다시 볼 수가 없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은 도도하게 진흙탕에서 살아가는데, 지금 선생만이 홀로 선(善)을 지키시어 아주 떠나가셨습니다. 아! 저 어두운 거리에 등불을 잡을 사람이 없으니, 아! 안타깝습니다. 병오년(1906, 광무10)의 의거(義擧)에 선생이 격문을 써서 선사(先師)를 도왔으니 그 뜻이 이미 드러났고, 정미년(1907)에 선생이 글을 지어 저를 위로하였으니 그 심정을 이미 알았습니다. 뜻밖에 기유년(1909) 가을에 선생이 신학문에 찬성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저는 삼가 의심스러워 그 진위를 판가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선생의 뜻을 만분의 일이나마 비로소 살필 수 있습니다. 아마도 선생의 뜻은 더러움과 합하여 맑음을 일으키려는 데에 있었을 것으로 삼가 생각합니다. 그런 심원한 계책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대세가 이미 기울어지자 기어이 말하기를 ‘정녕 눈을 감고 죽어서 아무것도 알지 않으리라.’ 하시고 마침내 죽는 것을 마치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하셨습니다. 아! 단호하십니다. 저는 고래등 같은 파도를 두 번이나 건넜음에도 죽지 못하고, 호랑이 굴에 세 번이나 들어갔음에도 죽지 못했으니 이 목숨이 너무나 질깁니다. 구차하게 연명한 것은 그래도 소망하는 것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왔으나, 이제는 더 이상 남은 바람이 없으니 어느 날에나 구차하게 연명한다는 오명을 씻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 비통합니다. 책을 지고 가서 직접 배우지 못했는데 또 상여줄을 잡고 영결하지도 못했습니다. 도중에 병에 걸려 직접 올리지는 못하지만 감히 작은 예물로 조의를 표하니 신령이시여, 흠향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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