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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방려문집 芳旅文集
일러두기

무술년(1838, 헌종4) 6월 18일에 공은 문방리(文房里)의 사저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특별한 일이 있었으니, 이웃에 나이 많은 백성이 상을 당했는데 호상(好喪)이라 하면서 애통해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공이 엄한 목소리로 말하기를 “상을 당하고도 슬퍼하지 않으면 되겠는가?” 하자, 그 백성이 감동하고 깨우쳐 마침내 공을 끌어안고 슬피 울며 말하기를 “늙은 상것이 반가(班家)의 아이만 못합니다.” 하였으니, 이때 공의 나이 여섯이었다. 이 일을 들은 사람들은 공이 장차 원대한 사람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일곱 살 때 족형(族兄)인 고금당(古今堂)에게 《소학》을 배웠는데, 사람이 되는 도리를 이미 깨달아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하루는 새 옷과 신발을 착용하고서 삼종질(三從姪)인 철용(喆容)과 서당에 갔는데, 낙빈서원(洛濱書院)에 있는 깊은 연못에 철용이 떨어져 하마터면 구할 수 없을 뻔하였다. 그런데 공이 옷과 신발을 벗을 새도 없이 바로 물에 뛰어들어 철용을 건져내었다. 경신년(1860, 철종11)에 호포촌(狐浦邨)으로 이사하였는데, 고을의 형편이 열악하여 더는 유지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공이 고을의 일을 주관한 1년 동안 규례대로 환곡을 거두어 자본을 마련하고 취모(取耗)하여 마을의 재용에 보태었다. 고을 사람들이 공의 궁핍함을 생각해서, 요역(徭役)을 분배할 때 공을 아래 순위에 놓자, 공이 말하기를 “내가 아무리 궁핍해도 여러분들 아래에 이름을 올리겠습니까.” 하고는 스스로 맨 위에 이름을 올렸다. 신유년(1861)에 부친상을 당했는데, 슬픔에 빠져 몸을 상하게 한 것이 과도하였다. 홀로 남으신 모친을 봉양하는 데에 한없는 정성을 다했고, 두 동생과 우애를 돈독히 하여 한집에 살면서 분가하지 않았다. 무인년(1878, 고종15)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부친상과 똑같이 슬픔으로 몸이 상하였다. 고을 사람이 통발[石子]을 놓아 물고기를 잡자 공도 통발 두 개를 놓았는데, 고을 사람이 물고기가 가득하다고 하자 공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처음 물고기를 잡을 땐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서였는데 지금은 드릴 데가 없구려.” 하고는 마침내 고을 사람으로 하여금 나누어 먹게 하였다. 공은 용모가 단엄하고 기품이 강직했기에 다가와 말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러나 화평한 기운을 더해 얼굴에 미소를 지으면 친할 만하였다. 일에 임해서 결정하고 처리할 때는 규모가 있고 치밀하였으며 말이 바르고 곧아 사람들이 범접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만년에 아들 하나를 얻었는데, 하인들에게 말하기를 “오늘 이후로 나는 매질을 하지 않을 것이니 너희들도 마땅히 죄를 지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을유년(1885, 고종22)에 장사미헌(張四未軒)선생이 낙빈서원에 훈장으로 왔는데, 공을 한번 보고는 심히 좋아하였다. 용화(龍華)에서 함께 뱃놀이하고 돌아와 공이 사는 곳을 방문하여 “큰 기쁨을 준 아들은 나면서부터 빼어나고, 옛 도를 지키는 삼 형제는 한솥밥을 먹는구나.[大歡一肖生而秀 古道三難㸑亦同]”라는 시를 지어 주며 사돈 맺기를 청하였다. 병술년(1886)에 첫째 동생을 여의고는 슬픔을 감당하지 못하였다. 정해년(1887)에 처음으로 곽면우(郭俛宇)를 만났는데, 공이 준 시에 이르기를 “봄빛이 저물었다고 말하지 말라, 아직도 골짜기엔 소나무가 있으니.[莫說春光晩 猶存澗畔松]”라고 하자, 면우가 화답하기를 “사라(絲蘿)같은 자질로 천길 소나무 같은 그대를 따르고 싶소.[願以絲蘿質 附君千丈松]”라고 하고는 그 후에 마침내 자기 딸을 공의 조카인 정용(正容)에게 시집보냈다. 무자년(1888, 고종25)에 용강(龍岡)에 재사(齋舍)를 건립하여 재계(齋戒)하는 장소로 삼았다. 그해에 식춘정(識春亭)이 또한 완공되었는데 사미헌 선생이 기문을 썼다. 사미헌 선생이 공의 강론을 들을 때면 매양 막힘없이 시원시원하다고 인정해 주었다. 기축년(1889) 봄에 가난한 친구와 친척들을 구휼하였는데 관청에서 표창하자, 공이 말하기를 “육행(六行)으로 모두 내가 할 도리를 다한 것이니, 어찌 남을 위한 일이라고 하겠는가.” 하였다. 그해에 국동(菊洞)으로 이사하였는데 그곳의 숲과 계곡을 좋아하여 스스로 호를 관천(觀泉)이라 하였다. 경인년(1890)에 용강재(龍岡齋)에 거처하였는데, 이만구(李晩求)선생이 방문하여 지어 준 시에 이르기를 “스스로 최(崔)와 석(石)과 같은 무리를 부끄러워하여 공연히 탕음가(蕩陰歌)에 화운하노라.[自慚崔石倫 空和蕩陰歌]”라고 하였다. 신묘년(1891, 고종28)에 식춘정에 거처하였고, 그해에 종6대조 비 상산 김씨(從六代祖妣商山金氏)의 정려각(旌閭閣)을 중건하였다. 임진년(1892)에 아들 장용(莊容)이 관례(冠禮)를 올렸고, 그해에 만구 선생과 경산(京山)의 산수를 유람하였다. 갑오년(1894)에 동비(東匪)들이 횡행하니 공이 현풍(玄風)과 거창(居昌)의 지방관들과 방어할 방책을 세웠으나 일이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종족들을 모아 잔치를 열고 재산을 나누어 주었는데, 일부는 대소 종친에게 주고 일부는 의장(義庄)을 설치하였다. 가볍게 짐을 꾸려 거창의 심방동(尋芳洞)으로 거처를 옮기고 기거하는 집에 관운(管雲)이라 편액하여 세상에 나가지 않으려는 뜻을 나타냈다. 심방동에서 객지생활을 했기 때문에 사우(士友)들이 호를 방려(芳旅)라 하였다. 계묘년(1903)에 종당(宗黨)에서 의장을 마련하고 남은 재물로 공을 위해 이수정(二水亭)을 건립하였는데 공이 스스로 기문을 지었다. 그해에 관운정(管雲亭)도 완공되었다. 갑진년(1904)에 집안일을 아들 장용에게 맡기며 말하기를 “어린 나이에 집안일을 담당하자면 공부에 방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만년까지 부모님을 모실 수 없었기에 항상 지극히 한스러운 마음을 안고 살았다. 내가 지금 늙었으니 너까지 이런 한을 품게 하고 싶지 않구나. 부모를 공양하는 도리에 너는 힘을 다하도록 하라.” 하니, 그때부터 올리는 음식이 아무리 풍성해도 과하게 여기지 않았다. 을사년(1905)에 면우 공과 함께 부근의 마을에 발의하여 약간의 재물을 내게 하고 계를 만들어서 주자(朱子)가 사창(社倉)으로 진휼미를 빌려 준 제도를 본받았다. 병오년(1906, 광무10)에 가조(伽祚) 원천동(源泉洞)으로 거처를 옮겼다. 정미년(1907)에 본 고을로 돌아왔다. 무신년(1908) 정월 28일에 천수를 누리다가 고향인 용강(龍岡)에서 생을 마쳤다. 공은 글을 읽을 때면 힘써 그 의미를 찾았는데 통하지 않으면 종일 책을 놓지 않았다. 사서(四書)를 암송하는 것이 마치 자기의 말을 내는 것 같았는데 《논어》와 《중용》에 더욱 조예가 깊었다. 이치를 논할 때면 반드시 먼저 일의 시행을 우선으로 삼았으니, 이는 《논어》에서 터득한 것이었으나 공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사공(事功)을 가까이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젊어서는 과거 공부를 하였으나 중년 이후로는 영영 버리고 일삼지 않았다. 또한 글 짓는 것도 좋아하지 않아 사람들이 글을 청하면 글재주가 없다고 자처하면서 진실한 마음으로 극구 사양하였다. 제사가 돌아오면 하루 전날 닭이 울 때 일어나 몸을 깨끗이 씻고 의관을 정제하여 방에 조용히 앉아 손님도 만나지 않았으며 제사 음식은 넉넉하고 깨끗하게 마련하려고 노력했다. 만년까지 부모를 모시지 못한 것 때문에 성묘할 때마다 어김없이 통곡하였고 나이가 들수록 더 그리워하였다. 종족들을 보살필 때에는 선조가 다 똑같이 여겼던 그 마음을 몸소 깨달아, 멀고 가까움을 따지지 않고 은혜와 사랑을 주었다. 타인을 대할 때에는 친하든 친하지 않든 하나같이 정성으로 대접하니, 모두가 기쁜 마음을 얻었다. 자기 봉양은 가난한 사람처럼 하고 빈민을 구제할 때에는 조금도 인색한 모습이 없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지금의 학자들은 이(理)를 논하면 기(氣)를 떼어 놓고 기를 논하면 이를 떼어 놓아 판연한 두 가지 물건으로 만든다. 이는 오로지 배움이 성숙하지 못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니 배움이 성숙해지면 저절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행실이 글에 미치지 못하여 글에 행실과 다른 점이 있는 자를 나는 광대나 다름없이 여긴다.” 하였다. 당세의 이름난 석학들과 두루 교유하였으나, 평소 “내가 친히 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한 사람은 모두 빈한한 사람이었다. 평소 언론을 잘하여 모두 의리에 부합하고 전혀 비루하거나 속되지 않았는데, 항상 말하기를 “나의 병은 말이 많은 것에 있다.” 하였다. 아석(我石) 성규호(成圭鎬)공과 친하게 지냈는데, 학문을 하는 데에 서로 보탬이 있었다. 조카들을 자신의 자식처럼 사랑으로 양육하였으니, 한번은 종손(從孫)을 안고 어르다가 아들과 조카에게 말하기를 “선조의 뜻을 따르는 일에 소홀하지 말라.” 하였다. 갑오년(1894, 고종31) 이후에 이학(異學)이 침범하여 우리의 도가 더욱 외로워지자, 공이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 고을의 자제들을 뽑아 명륜당(明倫堂)에서 오륜(五倫)을 강하고 밝혀서 성인(聖人)의 도를 부지하고자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전란의 시대에 오륜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하니, 공이 말하기를 “오륜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 전란이 있는 것이니, 오륜이 있으면 전란이 없다.” 하였다. 아! 내가 이미 고종록(考終錄)을 지었으니, 우리 공께서 천수를 누리다가 임종하실 때의 실상을 사람들에게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 그러나 공의 평상시의 행실과 치적은 용졸한 내가 나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마침내 몇 가지만 기술하여 여러 동지에게 고하니, 들은 것이 있는 대로 바로 보충해 주기를 바란다. 문하생 삼종질(三從姪) 노우용(盧祐容)은 삼가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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