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31년 갑오년(1894)-공의 나이 57세- 이해에 동비(東匪)가 창궐하였다. 그들의 목적은 시천주(侍天主)를 학문으로 삼는 데에 있으니, 옛날에 백련사(白蓮社)가 무리를 결집한 것과 유사했다. 곳곳에서 봉기하여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고, 돈과 곡식을 약탈하고 고을을 어지럽히니 사람들은 마음이 불안하였고 지역 내의 명가들은 그들의 기세를 두려워하였다. 세상의 오염이 지극하였으나 능히 스스로 깨끗이 하였으니, 그 의연함이 마치 거센 물살 가운데에 서 있는 지주(砥柱)와 같았다. 덕으로 진정시키고 위엄으로 통제하니 인근 마을이 덕분에 편안하였다. 고종 32년 을미년(1895)-공의 나이 58세- 이해 2월 2일에 숙부인(淑夫人)의 상을 당했다. 하늘에 울부짖고 땅을 치며 통곡하는 등 초상을 치르는 모든 절차를 일체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를 따라 조금도 유감없이 하였고, 장례 후에는 얼굴빛은 어둡고 말소리는 힘이 없이 마치 모친을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하는 듯이 슬퍼하였다. 본면(本面) 장흥동(長興洞) 백운산(白雲山) 아래 제봉(帝峯) 건좌(乾坐)의 언덕에 묘지를 정하였다. 백형(伯兄)인 만취공(晩翠公)과 흰머리로 나란히 늙어 가며 초하루와 보름에 성묘하였는데 아무리 춥거나 더워도 거르지 않았다. 항상 말하기를 “나중에 대룡산(大龍山)의 부친 묘소로 이장하여 합장합시다.” 하였다. 산중의 나무꾼이나 목동들이 모두 “두 효자[雙孝]”라고 일컬었다. 고종 33년 병신년(1896)-공의 나이 59세-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로 세도가 더욱 험악해지고 인심이 점점 해이해지니, 세상에 뜻이 없어 입으로 시사(時事)를 말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