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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심석재집 心石齋集
일러두기

계사년(1893, 고종30), 선생의 나이 55세. 정월, 아들 증헌(曾憲)에게 과거에 응시하지 말도록 경계하다. 족질(族姪)인 교리(校理) 송규헌(宋奎憲)이 와서 증헌에게 과거에 응시할 것을 권하였다. 선생이 증헌을 불러 다음과 같이 경계하였다. “정자(程子)가 일찍이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 하나의 불행이다.’ 하였다. 하물며 너는 학업이 아직 성취되지 못했는데 과거에 응시하는 것은 매우 옳지 않다. 게다가 우리 송가(宋哥)가 명문가의 훌륭한 집안으로 나라에 이름난 것은 과거 급제를 통해 벼슬을 해서가 아니라 선대의 덕행 때문이었다. 만일 덕행을 닦지 않는다면 비록 과거에 급제한 벼슬아치가 배출되더라도 절대로 우리 집안의 법도는 아니니, 너는 반드시 곤궁한 처지를 굳게 지켜 독서하면서 명성과 행실을 갈고 닦아 선대의 법도를 실추시키지 말라. 이것이 내가 지극히 바라는 것이다.” ○ 이때 사대부 자제들이 대부분 학문에는 힘쓰지 않고 오로지 화려한 것만 숭상하고 방종한 짓만 즐겨서 바른 도로 돌아올 줄을 모르니, 선생의 근심이 깊었다. 이에 글을 지어 자식과 조카들을 다음과 같이 경계하였다. “당(唐)나라 사람 유빈(柳玭)이 말하기를 ‘명문가의 훌륭한 집안은, 다 조상들이 충성하고 효도하며 부지런하고 검소한 덕분에 성립되었고, 자손들이 완악하고 경솔하며 사치하고 오만한 탓에 무너졌다.’ 하였다. 충성하고 효도하고 부지런하고 검소한 것은 온갖 선행의 근원이자 가문을 일으켜 세우는 근본이며, 완악하고 경솔하고 사치하고 오만한 것은 온갖 악행의 우두머리이자 집안이 망하는 원인이다. 이 때문에 선을 행하는 사람은 날마다 높고 밝은 곳으로 나아가 하늘이 반드시 복으로 보답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은 날마다 더럽고 낮은 데로 빠져 하늘이 반드시 화로 갚는다. 그렇다면 사람이 마땅히 힘써야 할 것은 과연 선이 아니며, 마땅히 경계해야 할 것은 과연 악이 아니겠는가. 아! 사람이 되어 배우지 않으면 마음이 꽉 막히고 식견이 어두워져 마땅히 가야 할 길인 인간의 도리를 알지 못할 것이니, 반드시 학문에 힘써 부지런히 노력하여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고 인격을 수양하는 공부를 중단하지 말라. 그래야만 온갖 선행이 반드시 이루어지고 온갖 악행이 반드시 제거될 수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유념하고 경계하라.” 9월, 《사례축식(四禮祝式)》을 편집하다. 선생이 진작부터 근래 사대부 집안이 예학(禮學)에 어두워 축사(祝辭)까지도 어긋나고 잘못된 데가 많은 것을 문제로 여겼다. 이에 이 책을 지었다. 갑오년(1894), 선생의 나이 56세. 6월, 나라의 변고를 듣다. 왜병이 대내(大內)를 침범하여 변고가 일어났는데 대신 이하의 관리로서 달아나 숨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나라의 기강이 땅을 쓸어낸 듯 사라진 꼴이다. 이에 선생이 변고를 듣고 두문불출하여 찾아오는 손님도 사절하였다. 9월, 동비가 크게 일어나다. 당시에 학문의 바른길이 황폐해지고 삿된 학문이 치성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결탁하여 패거리를 이루니, 큰 패거리는 1만여 명이나 되고 작은 패거리는 1천여 명이나 되었다. 나라가 단속하지 못하자 도성과 관청을 함락하고 마을을 약탈하며 선비를 죽이고 욕보이는 등 못하는 짓이 없었다. 선생이 엄한 말로 물리치며 말하기를 “요망한 말과 사악한 술법이 예로부터 어찌 한정이 있었겠는가마는 어찌 이러한 난리가 있었는가.” 하였다. 향리 사람들에게 동비 패거리에 들어가지 말도록 일러 깨우치고, 아무 동요 없이 산당(山堂)에 편안히 지내며 강송(講誦)을 그치지 않았다. 겨울, 석촌(石村)의 제사에 참석하다. 이해 봄에 백씨(伯氏) 선생이 고향으로 이사를 왔다. 이때 난리를 만나 가는 길이 막혀 끊어지고 추위의 기세도 매우 혹독하였으나 이를 무릅쓰고 제사에 참석하였다. 선생이 지나가는 곳에 동비 무리가 떼 지어 있었는데, (이들 무리가) 선생이 아관(峨冠)에 넓은 소매의 두루마기 차림으로 여장을 짚고 걸어가는 모습을 멀리서 보고 모두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길을 양보하였다. 을미년(1895), 선생의 나이 57세. 봄, 옥천에 향약을 창설하다. 선생이 남전여씨(藍田呂氏)의 고사를 본떠서 조목을 세우고 규약을 정하였다. 이에 한 마을의 백성을 이끌어 무너진 풍속을 면려하고 흩어진 인심을 다시 수습함으로써 나쁜 마음을 사라지게 하고 아름다운 자질을 증진하는 교화가 드러나기를 기대하였다. 숙부 선생이 그 일을 서술하여 찬미하였다. 8월, 왜구(倭寇)가 대궐을 침범하여 곤전(坤殿)이 해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다. 역신(逆臣)의 무리가 왜구를 선도해 끌어들여서 대궐을 침범하여 변란을 일으켰는데 그 화가 곤전에게 미쳤다. 선생이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통분하여 말하기를 “이는 신하가 된 사람으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일이다.” 하고 여러 날 식음을 전폐하기까지 하였다. 10월, 비로소 곤전의 승하가 반포되어 군정(郡庭)에 들어가 거애(擧哀)하다. 8월에 곤녕각(坤寧閣)에서 승하하였는데, 적신(賊臣) 김윤식(金允植)이 외부대신으로서 곤전의 폐위(廢位)를 주장했으므로 이때 이르러 복위(復位)하고 비로소 나라 안팎에 승하를 반포하였다. 11월, 상투를 자르고 의복을 변경하라는 조정의 명령이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김경전(金景典, 김학진(金學鎭))에게 편지를 보내다. 편지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온갖 기괴한 자들이 국권을 훔쳐 농단하여 일으키지 않는 변란이 없었는데, 결국 의관을 찢어 훼손하고 머리카락을 잘라 상투를 없애는 일까지 저질러 우리 선왕의 백성을 오랑캐와 금수의 지경에 몰아넣고야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따르지 않는 사람을 순검(巡檢)을 시켜 협박하여 강제로 행하게 하니, 도내의 수령 중에 치욕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여항(閭巷)의 인사들도 모두 그 칼날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어찌 이런 어지러운 세상이 있었습니까. 근심스럽고 두려워 그저 자정(自靖)할 도리를 생각할 뿐입니다. 그렇고 보면 산속으로 들어가거나 바다를 건너 섬으로 숨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의리겠지만 종사(宗社)와 국가를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목이 쉬도록 통곡하게 됩니다. 지금 온 세상이 모두 오랑캐의 손아귀에 들어가 버리고 오직 우리나라 한 구역만이 예의의 풍속을 지키고 있었는데 갑자기 또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큰 과일은 먹히지 않는다[碩果不食]’는 이치는 도리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비록 그렇지만 끝내 빼앗을 수 없는 것은 초야에 있는 필부(匹夫)의 지조입니다. 차라리 몸이 죽어 쓰러질지언정 어찌 차마 육신을 훼손하여 짐승 같은 자들의 무더기에 같이 뒤섞일 수 있겠습니까.” ○ 이보다 앞서 갑신년(1884, 고종21)에 의복을 변경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가 곧바로 취소했었다. 이때 이르러 여러 역적이 권력을 휘둘러 강제로 머리카락을 잘라 상투를 없애게 하고 또 소매가 좁은 두루마기를 입도록 영을 내렸다가 여러 역적이 패한 뒤에 상투를 없애는 단발령은 중지되었다. 그러나 소매가 좁은 두루마기는 결국 완전히 유행되어 사대부 집안이 휩쓸리듯 따라 해 익숙해지고 풍속을 이루었다. 간혹 소매가 좁은 두루마기 차림으로 와서 선생을 뵙는 자가 있으면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중화와 오랑캐를 분별하는 것은 임금과 신하의 분수를 분별하는 것보다 더 엄격하다. 지금의 소매가 좁은 두루마기는 옛날의 왼쪽으로 옷깃을 여미는 오랑캐 복장보다 더 심하니, 선비라면 결코 따라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선생이 천지의 도가 막히고 인륜이 무너진 것을 보고 평상시에도 울적해하고 슬퍼하여 마치 돌아갈 곳이 없는 곤궁한 사람 같았다. 항상 말하기를 “살아 있으면 치욕스럽고 죽으면 영예로운 것이 오늘날과 같은 때가 없지만, 제대로 죽을 곳을 얻지 못한다면 그저 마땅히 문을 닫아걸고 자정하여 선왕의 의관을 제대로 지키고 선조가 남긴 법도를 잃지 않을 뿐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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