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복(五福)과 육극(六極)은 천명(天命)이다. 안연(顔淵)과 염백우(冉伯牛) 같은 분도 육극 가운데 하나에 걸렸으니, 두 사람이 천명에 유감이 있는 것은 오래된 일이다. 능양(綾陽)에 사는 우인(愚忍) 박학중(朴學仲) 군은 덕을 닦고 의(義)를 실천했으나 고질병에 걸려 금상(今上) 을미년(1895, 고종32) 6월 25일에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부음(訃音)을 받고 나는 편지를 붙들고서 애도하며 안타까워하다가 이윽고 말하기를 “천명은 안연과 염백우도 면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군이겠는가. 그러나 두 사람은 귀의할 성인을 만나 명성과 광채를 영원한 후세에 전했지만, 군은 살았을 때 재능을 감추어 드러내지 않았으니 죽은 뒤에 누가 칭송하겠는가. 거듭 군을 위해 슬퍼한다.” 하였다. 장례를 마친 뒤에 정의림(鄭義林)군이 행장(行狀)을 지어 군의 아들에게 주고, 나를 찾아와 묘지명을 청하면서 말하기를 “채백해(蔡伯諧)가 곽유도(郭有道)에 대해서만은 부끄러운 기색이 없었으니, 나도 망우(亡友)에 대해서 또한 그렇다.하였다. 내가 행장을 받아 읽어 보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이 사람을 영원히 잊히지 않게 하는 것은 한 사람의 지기(知己)가 있는 덕택이니 이 또한 천명인가 보다.” 하였다. 스스로 생각건대, 식견이 얕은 내가 감히 성대한 덕에 오점을 남길 수 없으나 군의 아들이 더욱 정성스럽게 청하기에 차마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행장을 살펴 다음과 같이 쓴다. 군의 이름은 인진(麟鎭)이니, 학중(學仲)은 자이고 우인(愚忍)은 호이다. 본관은 밀성(密城, 밀양)이니, 찰방(察訪)을 지낸 위(蔚), 첨정(僉正)을 지낸 맹성(孟誠), 참의(參議)를 지낸 영걸(永傑), 사맹(司猛)을 지낸 억서(億瑞), 감찰(監察)을 지낸 지수(枝樹), 주부(主簿)를 지낸 천주(天柱) 6대가 높은 벼슬을 지냈는데, 감찰이 충(忠)으로 정려(旌閭)되고 좌승지에 증직되었으니 군에게 9대조가 된다. 고조부는 필익(必益), 증조부는 경귀(慶龜), 조부는 만환(萬煥)이며, 아버지는 재덕(在德)이고 어머니는 수원 백씨(水原白氏)로 백계찬(白繼贊)의 딸이며, 본생부(本生父)는 재응(在應)이다. 군은 헌묘(憲廟) 병오년(1846, 헌종12)에 태어났다. 어려서는 효순(孝順)하였고 큰아버지의 양자로 가서는 더욱 부지런하고 삼가서 두 집안의 부모를 모두 기쁘게 하였다. 부모를 여읜 뒤에는 부모를 섬기던 예로 작은아버지를 섬겨 크고 작은 집안일을 오직 작은아버지의 명에 따르고 감히 마음대로 처리하지 않았다. 돌아가신 부모의 유품인 상자에서 돈을 빌려 준 증서를 발견하면 곧바로 없애면서 말하기를 “돈을 빌린 사람이 스스로 말하지 않는데, 내가 어찌 차마 말을 꺼내겠는가.” 하였다. 재물을 모으고 규모를 세워 선영(先塋)에는 1년에 한 번 제사를 지냈으며, 궁핍한 자들을 구휼하는 비용이나 길례(吉禮)와 흉례(凶禮)에 들어가는 비용까지도 모두 구분 지어 계획함이 있었다. 방계 친척의 묘로 후손이 가난하여 제사를 지내지 못하면 모두 그를 위해 제전(祭田)을 마련해 주었으며, 외가 쪽 왕부모의 묘도 이와 같게 하였다. 친족 가운데 가난하고 병든 사람은 살아 있을 때는 도와서 길러 주고, 죽으면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내 주었으며, 이웃에 아이를 낳고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고 있는 부인이 있으면, 회복될 때까지 양식과 반찬을 대 주었다. 병든 나그네가 집으로 들어와 머물고 있으면 몇 개월이고 병이 나을 때까지 치료해 주고, 일어나지 못하고 죽으면 물품을 갖추어 장사를 지내 주었으며, 길 가는 사람이 길에서 죽었는데 그 아들이 갓난아이면 또한 그의 장사를 지내 주었다. 친족 중에 궁핍한 사람이 수십 냥의 돈을 빌려 갔다가 오래 지나서야 비로소 갚았는데, 군이 “나는 잊어버렸다.” 하면서 그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흉년을 만나면 자신이 입고 먹는 것을 검소하게 하여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도왔으니, 그에게 힘입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대대로 부리던 노비를 놓아 주며 말하기를 “노비의 자식이 대를 이어 노비가 되는 것은 법도가 아니다.” 하였다. 일찍이 짐승에게 쫓기던 꿩이 처마 밑으로 숨어든 일이 있었는데 집안 식구가 잡아서 요리하여 올리려고 하자 꿩을 놓아 주게 하면서 말하기를 “궁지에 빠져 사람에게 뛰어든 것을 차마 죽이겠는가.” 하였다. 평소에 말을 성급하게 하거나 기색을 당황스럽게 한 적이 없었다. 일찍이 집에 불이 났는데 하인을 불러 불을 끄라 이르고 손님과 평상시처럼 담소를 나누니, 손님이 그의 너그럽고 깊은 마음씨에 감복하였다. 남이 불손하게 대하면 자기를 반성하고 시비를 따지지 않았으며, 평생토록 부자와 권세가의 집에는 가까이 가지 않았다. 선대의 족보가 고려 시대에 유실되어 전하지 않았는데, 이전 족보에 다른 집안의 계보를 잘못 끌어다가 채워 넣었다. 이에 군이 말하기를 “이는 의심스러운 것을 용인하여 거짓을 무릅쓸 일이 아니다.” 하고 친족들을 알아듣도록 타일러 사실을 바르게 되돌렸다. 연전에 동비(東匪) 무리가 창궐하여 마을 사람들을 유혹하고 협박하니 온 세상이 휩쓸리듯 그들을 따랐다. 군이 친척과 벗들을 모아 놓고 나쁜 길과 바른길로 깨우쳐 물들지 않도록 하였다. 여러 아들을 가르칠 때는 시문(時文)을 짓지 못하게 하였으며 행실을 먼저 힘쓰고 문장은 뒤로하도록 하는 한편 집 이름을 즉이재(則以齋)로 지어 어진 사우(士友)들을 따라 학문하게 하였다. 군은 남을 불쌍히 여기고 슬퍼하는 어진 마음에 일 처리가 주밀하고 자세하며 막힌 데가 없이 통달한 데다 강인하고 굳세어 도량도 있고 지조도 있었으나, 한 번도 등용되어 쓰이지 못하고 끝내 향촌에서 일생을 마쳤다. 이에 볼만한 행실이 그저 집안과 종족과 향리 사이에 드러나고 그쳤으니 애석하다! 군이 별세하자 거리에서 곡하는 소리가 마치 산이 무너지는 소리 같았으며 전(奠)을 올리고 뇌문(誄文)을 짓는 사우들이 끊이지 않았다. 벽동촌(碧洞村) 뒤 경탁동(京鐸洞)의 유방(酉方)을 등진 언덕에 장사 지냈다. 군의 부인은 여산 송씨(礪山宋氏)이니, 송은만(宋殷萬)의 딸로 여사(女士)의 풍모가 있었다. 아들은 준기(準基), 준효(準孝), 준규(準奎), 준우(準遇)로, 모두 아버지의 올바른 가르침을 잘 따랐는데, 준기는 더욱 빼어나 기대와 촉망을 받았다. 군이 일찍부터 과거 공부를 하여 과거장에서 명성이 있었으며, 산과 들에서 시 짓고 술 마시는 모임이 있을 때마다 풍모와 운치가 호탕하여 마치 법규로 구속할 수 없는 사람 같았다. 얼마 후에 스스로 개탄하며 지난날의 행적을 후회하여 인적이 드문 물가를 찾아가 왕래하던 사람들을 사절하였으며, 문을 닫아걸은 채 뜻을 구하여 경서(經書)와 예서(禮書)를 깊이 연구하는 한편, 정의림 군을 따라 학문하여 깊이 젖어들도록 갈고닦아 확고하고 순정한 유학자가 될 것을 스스로 다짐하였다. 이에 본성을 보존하고 마음을 기르는 공부가 나날이 깊고 단단해졌으며 지식과 식견이 나날이 참되고 절실해졌는데, 불행하게도 한번 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하고 이에 이르렀으니 애석하고 애석하다! 군이 병들어 움직이지 못하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정의림 군이 오면 지칠 줄 모르고 강론하고 토론하여 간혹 밤을 새우기까지 하면서 몸에 깊은 병을 앓고 있는 줄도 모를 정도였으니, 학문이 나아간 바가 더욱 깊었다. 예학에 정밀하고 경서에 조예가 깊고 역사에 해박하였으며, 사물의 득실과 세도(世道)의 승침(升沈)에 관한 기미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고 미루어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병들어 책으로 써서 남기지는 못하고 오직 초고로 정리한 〈제의(祭儀)〉 한 권만 집에 보관되어 있을 뿐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시절에 이미 곤액을 당해 旣厄於時 늙도록 시골에서 지냈는데 老守邱樊 천명에 또 액운을 당해 又厄於命 병이 깊어 오래도록 낫지 않았네 疾病沈綿 옛날에도 면하지 못한 것이니 古所不免 어찌하랴 천명인 것을 奈何于天 도를 구했던 그 뜻과 求道之志 현인을 바랐던 그 학문을 希賢之學 모두 말아서 지니고 돌아갔으니 卷而歸之 그 누가 알아주려나 知之者孰 독실한 효성과 우애는 孝友之篤 집안 다스림에 그쳤고 施止家政 드러난 의로운 행동은 行義之著 마을 교화에 그쳤네 化止鄕井 말하노라 나의 벗이 있어 曰有卬友 전할 수 없는 것을 홀로 전했으니 獨傳其不可傳 드러낸 덕이 어찌 칠분뿐이리오 奚但象其七分兮 저 사 척의 높은 봉분은 有崇四尺 실로 어진 분이 묻힌 곳이니 實惟仁人之藏 행인들 지날 때면 경의 표하며 서성거리리라 宜行過之式焉而彷徨兮 병신년(1896, 고종33) 8월에 팔계(八溪) 정재규(鄭載圭)는 쓰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