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약은 고을이 정한 규약이니, 그 조목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 덕업(德業)은 서로 권하며, 둘째 과실(過失)은 서로 규제하며, 셋째 예속(禮俗)에서 서로 사귀며, 넷째 환난(患難)에서 서로 구제하는 것이니, 대개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며 상도(常道)를 지키고 변고(變故)에 대응하는 큰 절도이다. 아! 정전제(井田制)가 폐지된 이후 민심은 흩어지고 향풍(鄕風)은 유실되어, 이른바 “나가고 들어올 때 서로 짝하며, 지키고 망볼 때 서로 도우며, 질병이 있을 때 서로 부조한다.”라는 좋은 풍속을 더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이 때문에 남전(藍田)의 여씨(呂氏)가 이 규약을 제정하여 한 고을을 교화하였으니 풍속을 바로잡고 민심을 안정시키고자 한 것이다. 회암(晦菴) 주희(朱熹) 선생이 이를 특별히 드러내어 《소학》에 실었고, 율곡(栗谷) 선생이 또 참작하여 당신이 살던 고을에 시행하였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은 법을 전현들이 창시하고 시행하였겠는가. 옛날에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선생이 자임하여 임금과 백성을 요순(堯舜) 시대처럼 만들고자 하면서 또한 이 향약을 풍속을 변화시킬 방도로 삼았으니, 그 법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더욱 잘 알 수 있다. 우리 서림(西林, 충청남도 서천(舒川))이 비록 구석진 바닷가에 있는 작은 고을이지만 다행히 충후하고 신실한 선비들이 많아, 내가 부임한 이후에 혹 담대멸명(澹臺滅明)과 같은 이가 찾아오기도 하고 혹 서유자(徐孺子)와 같은 이와 대면하기도 하여 교화를 일으키고 풍속을 구제하는 일에 대한 모든 것을 서로 강구한 적이 많았다.그러던 어느 날 어떤 이가 와서 이르기를 “향교에서 계(稧)를 만드는데 그 이름은 바로 향약입니다.” 하니,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말하기를 “그 계야말로 훌륭합니다!” 하였다. 현재 정학(正學)이 밝혀지지 못하여 사설(邪說)이 크게 성하고 오랑캐가 횡행하여 금수가 따라서 핍박하고 있으니, 정학을 지키고 사설을 물리치며 오랑캐와 금수를 모두 몰아내는 방법으로는 우리 내부를 닦는 것만 한 것이 없고, 우리 내부를 닦는 방도로는 이 향약보다 좋은 것이 없다. 진실로 모든 고을과 모든 마을이 향약을 설행함으로써 천리(天理)가 다시 밝아지고 인심이 다시 바르게 되어 삼강오륜이 실추되지 않게 할 수 있다면, 비록 대번에 치세를 이루지는 못하더라도 여러 음(陰) 아래에 반드시 밝게 드러나는 하나의 양(陽)이 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국세(國勢)가 높아지고 안정되며 국운(國運)이 빛나고 자라는 것이 이것에서 비롯되지 않겠는가? 하물며 우리 성상께서 삼대(三代)의 치세를 이루고자 하시어, 한결같은 마음과 위대한 말씀을 간절하고 정성스럽게 윤음에 담아 왕왕 우리 군에 보내주심에 있어서랴. 나는 재목감이 아니어서 성상의 뜻을 받들어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돕지 못하였기에 밤낮으로 두려워하며 진실로 몸 둘 바를 몰랐다. 이제부터는 다행히 선비들의 힘을 입어, 강명(講明)하고 시행하는 것들이 모두 아름다운 법도가 아닌 것이 없으며 향음주례(鄕飮酒禮), 향사례(鄕射禮), 독법(讀法)과 같은 것도 차츰 따라서 시행할 수 있게 되었다. 선비들이 바른 학문을 읽히고 백성들이 본업에 힘쓴다면 모든 사람의 마음이 하나의 성곽을 이루어 온 경내가 안도할 것이요, 불행히 혹 외국이 우리를 넘보는 일이 있더라도 진양(晉陽)은 배반하지 않고 즉묵(卽墨)은 함락되지 않을 것이니 어찌 사특한 무리의 방자함을 걱정할 것이며, 어찌 짐승들이 날뛰는 것을 두려워하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약(約)’은 약속하여 맹세한다는 뜻이고, ‘계(稧)’는 맺어서 합한다는 뜻이니, 만약 약속해 놓고도 실천하지 않는 허점이 있거나, 맺어 놓고도 사사로이 하는 폐단이 있게 된다면 이는 결코 전현들이 창시하고 강구하여 시행한 본의가 아닐 것이니, 모범을 보이는 향교로서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주자는 말하기를 “거행하기만 하고 폐하지는 말라.” 하였고, 《시경》에는 “시작이 있지 않은 것이 없거늘 능히 끝마침이 있는 경우가 드물도다.” 하였으니, 모든 군자들이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오로지 “군수는 선한 말을 기꺼이 듣고 기꺼이 따라야 한다.”라는 것을 알고 있는 만큼 한마디 말이라도 없을 수 없기에 이에 서문을 짓노라. 영력(永曆) 252년 무술년(1898) 동짓달 하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