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향음례(鄕飮禮)가 있었으니 곧 지금의 향약계(鄕約稧)이다. 스승이 전수한 심법(心法)과 후학이 강습한 문자가 서적에 실려 있으니, 진실로 이에 뜻을 둔다면 스스로 몸으로 행하고 마음으로 터득하여 이룰 수 있다. 아! 도(道)가 막힐 때도 있고 통할 때도 있으며, 이 학문이 쇠퇴할 때도 있고 융성할 때도 있으니, 곧 천운의 순환이다. 주(周)나라의 도가 쇠퇴하고 송(宋)나라의 덕이 융성해지자 유현(儒賢)들이 나와서 이 도를 연구하여 밝혔으니, 주 부자(朱夫子, 주희(朱熹))의 백록동규(白鹿洞規)와 여 선생(吕先生)의 남전향약(藍田鄕約)은 다양한 재주를 도야하고 빛나는 자질을 가꾸어 문명하고 태평한 시대를 이룩하는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로 보자면 본디 예악(禮樂)과 문물이 중국에 비견되었고 우리 조선 중엽에 미쳐서는 더욱 찬란하였다. 숭문(崇文)의 정치는 유래가 깊으니 삼대(三代)에는 국도에 국학(國學)이 있고 주(州)에 서(序)가 있고 향(鄕)에 향교(鄕校)가 있고 여(閭)에 가숙(家塾)이 있었다. 태산북두처럼 덕망이 있고 하해(河海)처럼 위대한 인물이 연원(淵源)을 이어 나와 이분들이 실로 금성탕지처럼 나라를 보전하고 약석처럼 세상을 다스렸기에 지금까지 500년의 훌륭한 역사를 간직한 나라에 이른 것이다. 아! 저 홍수의 거친 흐름과 미친 물결이 이미 세상을 빠르게 뒤집어 놓았고, 긴긴밤 몰아친 풍우가 아직도 그치지 않았다. 어지러움이 극에 달하면 다스려지기를 생각하여 자나 깨나 태평성대를 그리워하는 것은 천리에 있어서 당연한 것이고 사람들 마음에 다 똑같은 바이다. 우리 고향 한 고을이 궁벽한 바닷가에 있어서 위대한 선비와 훌륭한 유현으로서 봉황이나 기린 같은 자질이 있는 분은 없었지만 북으로 가서 학문한 호걸들이나 남으로 가서 유람한 문장가들이 스승을 이어 일어나고 세상을 보고 진작하여 예학을 배우고 예법을 읽혔으니, 그 얼마나 다행인가. 비록 성현의 경지에 들어가는 명망을 이루지는 못했어도 보물을 품은 듯한 정성만큼은 느슨히 하지 않았다. 우리 한두 동지가 개연히 선대의 그런 훌륭한 학문에 뜻을 두어, 여러 선비들이 모인 자리에서 의논하여 학당을 짓기로 결의하였다. 옛날의 향음례에 의거하여 향약계(鄕約稧)라 명명하고서 옛날 남전향약에 따라 의론을 세우고, 난정수계(蘭亭修稧)를 토대로 윤색하였다. 봄에는 학문을 강하고 가을에는 기예를 읽히면서 영원히 폐하지 않는다면 고을에서 인재를 양성했던 옛 교육과 서로 믿고 도와주었던 옛 풍속을 우리 고을에서 거의 다시 보게 될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우리들은 이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주자 백록동원규(朱子白鹿洞院規)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 이상은 확립하여 가르칠 조목이다. 널리 배우고[博學之], 자세히 묻고[審問之], 신중히 생각하고[愼思之], 명백히 변별하고[明辯之], 독실하게 실행한다[篤行之]. 이상은 학문의 요체이다. 말은 성실하고 믿음직스럽게 하며[言忠信], 행동은 독실하고 공경스럽게 하며[行篤敬], 분노를 참고 욕심을 막으며[懲忿窒慾], 선으로 옮겨 가고 과실을 고친다[遷善改過]. 이상은 수신(修身)의 요체이다. 의리에 있어 올바르게 할 뿐 이끗을 꾀하지 않으며[正其義 不謀其利], 도를 드러낼 뿐 공을 따지지 않는다[明其道 不計其功]. 이상은 일 처리의 요체이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시행하지 말며[己所不欲 勿施於人], 행하다가 안 되는 것이 있거든 자기에게 돌이켜 이유를 찾는다.[行有不得 反求諸己]. 이상은 남을 접하는 요체이다. 여씨남전향약 조규(呂氏藍田鄕約條規) 덕업은 서로 권하며, 과실은 서로 규제하며, 예속에서 서로 사귀며, 환난에서 서로 구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