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참으로 황공한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려 백번 절하고 아룁니다. 신이 일찍이 《주례(周禮)》의 글을 읽어 보니, 〈천관총재(天官冢宰)〉에 팔병(八柄)과 팔칙(八則)의 설치에 대한 부분에 이르러 왕정(王政)의 대법(大法)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에 “토지와 부역으로 백성을 제어하고, 부세와 공물로 재용을 제어한다 하니, 이는 전정(田政)으로 토지를 경영하는 제도가 아니겠습니까. 그 내용에 “일정한 직무가 없는 한민(閑民)은 남을 위해 품팔이한다.”하니, 이는 적정(籍政)으로 백성을 안배하는 방도가 아니겠습니까. 그 내용에 “재용(財用)을 균등하고 적절하게 쓰고 상사(喪事)가 있거나 흉년이 들면 거둔 것을 나누어 준다.”하니, 이는 곡정(穀政)으로 백성을 풍요롭게 하는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수인(遂人)과 수사(遂師)는 전야에 대한 직무를 관장하여 농기구를 점검하고 농정(農政)을 닦아 연말이 되면 재용과 부세를 거두어 성과를 평가하였으며, 사마(司馬)와 사훈(司勳)은 군사에 대한 직무를 관장하여 봄이면 군사들을 정돈하고 가을이면 무기를 정비하여 전쟁에 이르면 상벌을 분명하게 하고 공훈에 보답하였으며, 늠인(廩人)과 창인(倉人)의 직무는 구곡(九穀)의 비축량을 계산하여 나라에 쓸 일이 있으면 반포하고 그해 농사의 풍흉을 보아 급한 곳을 구휼해 주었으니, 이중에 하나라도 선왕의 천하를 다스리는 대경(大經)과 대법(大法)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농지의 구획을 정확히 하고 도비(都鄙)를 균등하게 하여 민공(民貢)을 제정하니 전정을 폐할 수 없는 까닭이고, 호적과 지도를 관장하고 군사를 단련시켜 왕의 국도를 지키니 군정(軍政)이 없을 수 없는 까닭이며, 풍흉에 따라 구휼과 조세를 달리하여 급한 곳을 진휼하니 곡정을 또한 느슨히 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그러므로 하우(夏禹)가 구주(九州)를 바칠 때 공부(貢賦)를 관장하여 강령을 정하였고, 기자(箕子)가 구주(九疇) 중에 팔정(八政)을 서술하면서 ‘군대[師]’라는 조목을 포함시켜 위무(威武)를 말했으며,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늦봄이 되면 창고를 열어 곤궁한 자에게 식량을 나누어 준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사랑해야 할 것은 백성이 아니겠습니까? 백성이 풍족하면 군주가 누구와 더불어 부족하겠습니까? 나라의 근본이 견고하면 나라가 어찌 편안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본래 궁벽한 골짜기의 미천한 출신으로 어리석고 보잘것없는 물건이니, 어찌 감히 나라를 다스리는 방책을 함부로 언급하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주상전하께서는 국운(國運)이 무궁하시고 예지(睿智)가 한이 없으시며, 온 나라에는 원하고 추대하는 찬송이 드높고 백관들은 빛나는 공적을 아뢰며, 훌륭한 인재들이 즐비하여 조정에서 소신을 아뢰니, 어리석은 저의 쓸데없는 말을 어찌 다시 올리겠습니까. 그렇지만 길가에 고인 작은 물도 하해(河海)는 버리지 않으며, 꼴 베는 나무꾼의 말도 성인은 반드시 물으니,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 감히 생각을 다 아뢰겠습니다. 삼가 아뢰건대, 일에는 그만둘 수 있는 것이 있고 또한 그만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만둘 수 있는데 그만두지 않는 것은 진실로 옳지 않고, 그만두면 안 되는데 그만두는 것 또한 옳지 않습니다. 저 삼정(三政)은 마땅히 우선되어야 하지만 혹 백성들에게 폐단이 된다면 그만둘 수 없어도 그만두는 것이 옳습니다. 민심(民心)은 힘써 돌봐야 하지만 왕정의 급무에 관련이 크다면 그만둘 수 있어도 그만두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나라에 이미 전제(田制)가 있으니 어찌 군정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군정이 없다면 이것은 나라를 지키는 군대의 큰 법이 아닙니다. 백성들이 이미 병력이 족함을 알았다면 어찌 곡정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곡정이 없으면 이것은 위급한 백성을 진휼하는 아름다운 제도가 아닙니다. 나라가 바탕으로 삼는 것은 백성이요, 백성이 의지하는 것은 나라입니다. 임금의 한 몸은 모든 교화의 원천입니다. 지극한 정치가 일어날 수 있느냐와 정사에 있어서 무엇을 급선무로 할지는 오직 성상의 깊은 뜻과 밝은 재량이 어떠한지에 달려 있으니, 신이 어찌 감히 주제넘게 조목조목 진달하겠습니까. 아! 전부(田賦)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기축년(1709, 숙종35)에 측량한 뒤로 지금까지 200여 년입니다. 좋은 농지가 변하여 나쁜 땅이 되거나 척박한 땅이 변하여 옥토가 된 경우가 아주 많아 묵은 땅과 개간한 땅이 일정하지 않은데도 단락(段落)은 때가 있어서 농지는 없는데 결수(結數)가 있는 경우도 있고 농지는 있는데 결수가 없는 경우도 있으며, 백지징세(白地徵稅)는 문권(文券)에 따라 마을 사람이나 친족이 대신 징수하도록 떠넘겨져 억지로 수봉(收捧)합니다. 비록 조정에서 조세를 감면하는 은전이 있어도 잠깐 면했다가 바로 생기니 백성에게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군적(軍籍)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숙묘(肅廟) 이후에 오위제(五衛制)를 폐지하고 삼영법(三營法)을 설치하였습니다. 전국의 기병(騎兵)과 보병(步兵)의 총수를 계산하면 기병의 상번(上番)은 2만 3,700여 명으로, 각각 3명의 보인(保人)을 가지고 있으니 다해서 9만여 명입니다. 보병의 상번은 1만 6,200여 명으로, 각각 1명의 보인을 가지고 있으니 다해서 3만여 명입니다. 합산하면 12만여 명으로, 곧 평상시 기병과 보병의 상번의 수입니다. 근래에 인심이 각박해져서 교활한 무리들이 군역을 피하려고 꾀를 부려 매양 도망하거나 숨는 자가 많고, 또한 상민들이 유학을 사칭하거나 교원에 허위로 등록하거나 세력가에게 칭탁하여 정역(丁役)을 면하려는 자가 십에 팔구를 차지하니 대신할 사람을 채워 넣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를 군역에 채워 넣고 죽은 사람에게 군포를 배당하며 한 몸으로 여러 번 군역을 부담하는 경우가 있고, 액수만 채울 뿐 전혀 실상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력이 있는 자는 모면하여 빠져나가고 세력이 없는 자는 충당되어 면제받지 못하니, 대대적으로 샅샅이 찾아 정리하지 않으면 장차 군정의 씨가 마를 것입니다. 이와 같다면 도리어 군정이 없는 것을 염려하는 것이 낫고, 군적이 없어서 폐단이 없는 것이 낫습니다. 환곡(還穀)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신라와 백제 이후로 이미 전해 내려온 법으로 그 시작은 선왕이 백성을 살펴서 도와주고 넉넉하게 해 주려는 의미가 아닌 적이 없었습니다. 취모보용(取耗補用)한 것은 부득이함에서 나왔으나 가을에 곡식을 받아 창고로 들일 때도 말[斗]과 휘[斛]를 사용하여 공평하게 받았고, 봄에 백성에게 꾸어 줄 때도 말과 휘를 사용하여 공평하게 주었으니 이것이 바로 옛날의 아름다운 제도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조적(糶糴)은 균등하지 않습니다. 그 폐단이 읍(邑)마다 같지 않고 창(倉)마다 차이가 있어서 일일이 거론하기가 실로 어려우나 대략 말씀드리겠습니다. 간악한 향리들의 농락과 교활한 아전들의 방자함이 얼마나 심한지 모르니, 곡식을 거둬들일 때는 섬[石]과 휘로 많이 거두고 꾸어 줄 때는 되[升]와 말로 박하게 주어, 국가의 막중한 곡식을 도리어 아전들의 사심을 채우고 몸을 살찌우는 탐욕거리로 만들었습니다. 백성의 기름을 짜고 골수를 빨아먹으니 고통의 신음 소리가 들판에 가득하며, 이리처럼 탐하고 쥐처럼 훔쳐서 창고가 모두 비었으니 어찌 통곡하고 한심한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이 세 가지 폐단은 눈이 있는 사람이면 모두 볼 수 있고 입이 있는 사람이면 모두 말하는 것이니, 못 가운데 기러기는 슬피 울고 있고 영주(永州)의 뱀은 아직도 존재합니다.백성이 생산하는 재물은 한계가 있는데 중간에서 가렴주구(苛斂誅求)하는 것이 끝이 없다면 유한한 재물로 무한한 욕심을 채우는 것이니 백성들이 어찌 곤궁하고 고달프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비록 하늘이 낸 자질을 갖추고 계시지만 깊은 구중궁궐 안에서 팔짱을 끼고 계시니, 누가 간사하고 누가 정직하며 어느 곳이 편안하고 어느 곳이 곤궁한지 어떻게 아시겠습니까. 아! 궁하면 변하고 막히면 통하는 것은 하늘과 사람의 상도(常道)이니, 일단 바로잡을 수 있는 방도가 있습니다. 전부(田賦)를 다스리고자 하신다면 개량(改量)하라는 명을 속히 내리시어, 실상대로 분등(分等)하여 위로는 관리들이 갉아먹을 방법이 없고 아래로는 백성들이 균등하게 내는 제도가 있어서, 전지가 있는 자는 그 짐[卜]과 뭇[束]에 따라 세금을 내고 전지가 없는 자는 억울하게 징수하여 터무니없이 내는 일이 없게 하며, 그런 뒤에 제대로 살피지 못한 수령은 국법으로 다스려 파직하고 내친다면 경계의 문란함이 조금도 없을 것이고, 또한 풍족한 사람과 어려운 사람이 모두 알맞음을 얻을 것입니다. 군적(軍籍)을 다스리고자 하신다면 해당 도의 수령에게 명하여 군기(軍器)와 군량이 누락된 것을 모두 보충하여 먼저 분명하고 엄정하게 하고, 그런 뒤에 50년 전의 군적을 소급하여 조사하면 그 근저(根底)가 저절로 드러날 것이니, 유학이라고 사칭한 자나 세력가에게 청탁한 한정(閒丁)을 모두 찾아내어 충원한다면 나라가 군정을 얻는 것이 분명 옛날과 같아질 것입니다. 환곡(還穀)을 다스리고자 하신다면 무슨 곡(穀)인지 언제 조(條)인지를 막론하고 반은 유치하고 반은 분급한 전례를 일제히 따른다면 백성의 이로움이 풍년과 같을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창리(倉吏)가 농락하는 폐단을 반드시 금지하고 만약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대명률(大明律)에 의거하여 20석을 포흠(逋欠)한 관리는 엄벌하고 멀리 유배시키되, 기간을 한정하지 말고 용서하지 않는다면 아전들의 악행이 틀림없이 종식될 것입니다. 곡정이 실제적이고 정밀해지면 백성들은 거듭 징수당하는 원통함이 없을 것이고, 조적이 무너지지 않게 되면 나라에 관용의 정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신처럼 우매한 식견으로는 문제를 바로잡을 방도가 이것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개량과 재용 마련의 방도는 오직 성상의 재량에 달려 있으니, 한(漢)나라의 상평(常平)이나 수(隋)나라의 의창(義倉)이 또한 백성을 다스리는 아름다운 제도이자 좋은 법이 되지 않겠습니까. 취모하여 비용을 마련하는 것은 비록 경사(京師)가 지급해야 하는 비용을 보충하는 재원이지만 진실로 혁파해야 옳으니, 예가 아닌 제사와 복이 없는 기도는 그만 중단하여 그 제사에 들어가는 비용을 취하고, 쓸모없는 직책과 급하지 않은 관직은 없애서 그들에게 주던 봉록을 거둔다면 취모를 대신하여 비용을 지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실로 이와 같이 할 수 있다면, 백성은 거꾸로 매달린 듯한 고통이 드물어서 위태로운 곳에 서로 빠지는 폐해가 없을 것이요, 나라는 태산(泰山)과 반석(盤石)처럼 안정되어 만사가 무너질 것이라는 경계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뒤에는 지극한 정치가 일어나고 교화(敎化)가 크게 행해져 위로는 밤늦게까지 정사에 시달릴 걱정이 없고 아래로는 구덩이에서 나뒹구는 환란이 없어서, 장차 모두가 천수를 누리는 태평성대의 경지에 오를 것입니다. 신은 우매한 자질로 재탁(裁度)할 줄을 알지 못하나 삼가 전하의 책문(策文)을 읽었기에 삼가 무릅쓰고 엎드려 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