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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비서류찬 조선교섭자료 秘書類纂朝鮮交涉資料
일러두기

동학당의 소요는 본래 고부군의 민란으로부터 번진 것인데, 오늘에 와서는 마치 고부민란을 동학당이 일으킨 꼴이 되어 있다. 이 일기는 정월 10일의 부청(府廳) 습격에서 시작하여 이후 황토산(黃土山)의 격전까지 4개월간의 사건을, 이 소요의 중심점인 고부군에서 2리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보고 들은 대로 기록한 것이다. 민군(民軍)의 수령 전명숙(全明叔)은 진실로 동학당 장장(鏘鏘)한 장부로서 황토산의 전략은 대부분 전명숙의 지휘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현재 경군(京軍)이 역적이라고 질시하는 자는 오직 전명숙 한 사람이고 나머지는 그의 선동에 의한 오합지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마땅히 고부의 민요(民擾)를 동학당 소요와 별개로 보지 않으면 다행이다. 음력 4월 12일 호남채호(湖南菜湖)에서 파계생(巴溪生) 갑오년 정월 10일 새벽녘, 한 무리의 난민이 고부읍으로 난입하여 군수의 침소를 침범했다. 군수는 창황히 담을 넘어 도망갔는데 좌우에 따르는 사람도 없었다. 난민들은 부대를 나누어 수색하였으나 끝내 잡지 못하였다. 이때 관사(官私)의 구별 없이 한 사람도 이를 막아내는 사람이 없었고 이부(吏部) 이하의 관속이 모두 그들에게 나포되었다. 고부는 바닷가가 아니기 때문에 인천이나 부산에 재류하는 일본 상업인에게는 관계가 적은 지방이라서 그 지방 이름조차 알고 있는 사람이 적지만, 이곳은 김제 및 만경(萬頃) 등에 연속된 대평야로서 28개의 촌락으로 구성되어 있고 토지는 비옥하여 농산물이 풍부하며 줄포(茁浦)ㆍ염소(鹽所)ㆍ동진(東津)ㆍ사포(沙浦)의 네 항구로부터 원근 각지에 수출하는 양이 적지 않은바[상납액 1만 8,000여 석, 세고(稅庫)는 부안 줄포에 있음], 무역상 중요한 곳의 하나이다. 군수는 함경도 방곡령으로 유명한 조병식(趙秉式) 씨의 조카로 성은 조(趙)요, 이름은 병갑(丙甲)이다. 이 나라 내정이 극도로 문란해진 것은 소위 공(公)을 빙자하여 사욕을 채우는 일 때문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 그 가혹한 세금과 잘못된 정치는 실로 우리 일본인이 상상도 할 수 없는 터이다. 다음에 조병갑의 실정에 관한 한두 가지의 소문을 기록하겠다. 지난가을 이 지방은 풍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병갑은 방곡령을 선포하고 측근을 시켜 미곡을 많이 사들였다가 쌀값이 폭등할 때를 노려 이를 방매해 순식간에 많은 이익을 얻었다. 또 세미(稅米)를 징수할 때에도 극악무도한 짓을 하여 작년 10월경 민심이 적잖이 불온하였다. 같은 해 9~10월경 승려로 하여금 벽보를 배부하게 하고 보수를 걷었다는 소문이 있다. 또 수리관개를 빙자하여 하천에 보를 막아 밭마다 수세를 강제로 징수한 일이 있어 이 또한 민원(民怨)을 산 가장 큰 원인이 된 것 같다. 10일 첫닭이 울기를 기다려 동진강(東津江) 강가에서 세력을 정비한 민군은 모두 흰 무명을 머리에 두르고 길이 5자 남짓한 죽창을 지녔다. 처음 모인 사람은 약 500명 정도였는데 수령 이하 모두 도보(徒步)였다. 성부(城府)의 관문을 무난히 통과하여 조당(朝堂)이라고 부르는 군수가 사무 보는 곳의 앞까지 왔다. 군수의 침소를 짓밟고 나아가 내부의 여러 건물을 샅샅이 수색하였다. 그러나 날은 아직도 밝지 않았다. 놈이 이미 달아나 뒤를 쫓았는데, 어느 쪽으로 갔는지를 몰라 먼저 경로(京路)로 뒤쫓았으나 잡지 못하고, 오시(午時) 무렵에야 반대 방향인 정읍 쪽으로 도망쳤음을 알았다. 수령[7명 중 우두머리는 전모(全某), 그 외는 아직 미상]이 먼저 조당에 들어가서 심부름꾼을 보내 이부와 기타 악정에 조력한 자들을 소환하였고 오지 않는 자는 잡아들였다. 진영은 정숙하였고 호령은 명석하였으며 여느 반란군 같지 않았다고 한다. 먼저 악정의 시말(始末)을 엄중히 조사하기 위해 매일 구류된 사람들을 국문하였다. 진영은 부(府)의 내외에 있었고 모두 장막을 치고 밤에는 화톳불을 밝혔다. 양식으로는 놈들이 그 제언(堤堰)의 수세로 강제 징수하여 놓았던 벼 1,400여 석이 벽두(劈頭)에 그들의 식량으로 제공되었다. 11, 12, 13, 14일에 가담한 촌락이 15개 마을, 전체 군사가 1만여 명에 이르렀다. 먼저 장정을 뽑고 늙은이와 어린아이는 돌려보냈다. 이를 통솔하는 자는 한 마을에 5명씩이고 인근 군의 도처에서 동정을 표했으며 대체로 악평하는 자는 없었다. 그러나 아직 자진하여 이들에게 합세하여 악정을 없애려는 자는 없었다. 15일 조병갑이 전주 감영으로 달려갔는데, 이에 앞서 그는 단신으로 도망쳐 군내의 명망가인 전 부사 정(鄭) 모의 집에 숨겨 달라고 호소하여 정씨 덕분에 변장을 하고 정읍 방면으로 도망쳐 겨우 감영에 투신하였던 것이다.(고부에서 일본식으로 13리 거리) 이 때문에 정씨는 화를 입어 현재 감옥에 있다. 조병갑은 감영에 이르러 먼저 감사에게 말하기를, “간악한 무리들이 반란을 일으켜 죽창을 들고서 부문(府門)을 습격하여 군속(郡屬)이 모두 곤경에 빠졌습니다. 바야흐로 화가 제게 미치게 되어 겨우 벗어나서 여기에 이르렀으며 바라건대 병사 1,000명을 빌려 주시면 곧 달려가 이를 진압하겠습니다.”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감사는 듣지 않고 정부에 장계를 올려 그 지시를 기다리고 조병갑은 영문(營門)에 숨어 있었다. 그러면 반란군은 그 후 어찌 되었던가. 17일 민군은 마수역(馬首驛)에 모였다. 수령 이하 많은 의논이 있었으나, 군사기밀이기 때문에 들을 수가 없었다. 이날 다시 13명의 정예병을 뽑았다. 20일 아침 저들 무리 30~40명이 내가 있는 줄포를 지나갔는데 각기 죽창을 갖고 있었다. 들으니 그들은 강 건너에 사는 고부 농민으로서 본영으로 모이러 가는 것이라고 했다. 이날 완영(完營, 즉 전라도 감영)에서 판관 민(閔) 모가 감사의 명을 받아 내려오고 무장현감(茂長縣監) 역시 같은 명령에 따라올 것이라는 소문이 있다. 민군의 성패는 생각하건대 이 하루 이틀 사이의 운동 여하에 따라 결정될 것 같다. 이번에 판관이나 현감의 처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들의 기세는 더욱 맹렬해질 것이다. 22일 그저께 아침에 통과했던 민군의 일부가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이날 민군에게 불리한 소문이 일어났다. 아아! 지금 조금만이라도 건전한 수령(首領)이 있다면 벌써 일찍 나아갔어야 할 일이었는데, 이리저리 우물쭈물하여 민심이 점점 해이해진 것이 아닌가. 그러나 만약 한 군의 총대표로서 서울이나 전주 감영에 가서 정면으로 일을 해결하려고 했다면 인명을 쓰레기처럼 생각하는 이 나라의 습관을 볼 때 비리 여하를 살필 틈도 없이 목을 치지나 않았을까? 이것이 제일 두려운 일이다. 차라리 전군을 이끌고 먼저 감영에 가느니만 못할 것이다. 감사가 만약 그들을 위해 힘을 써 주지 않는다면 가만히 나아가 대궐 아래 엎드려 크게 품의하되, 병력으로 우리를 대한다면 깨끗이 싸우다가 죽을 따름이라는 기개 없이는 일을 일으켜도 무익하다. 이상과 같은 사정으로 그들은 더욱 완전히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것을 우려하고 다만 해산될 운명에 처할 것으로 여겨졌다. 이후로는 이 사실을 적는 것도 게을리하고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아 붓을 놓은 지도 이미 30여 일이 되었다. 그러나 바야흐로 식은 재가 다시 타오르려고 하는 것을 보기에 이르렀다. 이후의 상황에 의하면, 민군은 서로 교대하여 인원이 줄지 않을 뿐 아니라 죽창을 갖고 삼삼오오 모여 서로 왕래하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이들에 관해 들리는 말로는, 한 번 진영에 들어오면 거의 별천지에 들어온 듯하여 집에 돌아와서도 가래와 호미를 드는 것이 내키지 않고, 집안을 돌볼 마음이 거의 없어지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또 사건이 일어난 지 이미 2개월이 되고 인원도 늘어나자, 그들의 진영 근처에는 자연히 물건을 파는 장사치가 모이고, 음식점을 비롯하여 잡화점 따위가 몰려 갑작스럽게 장을 이루어 매우 성황을 이루는 형편이라고 말한다. 대체로 이와 같으므로, 날마다 소와 말을 벗삼아 들에서 세월을 보내며 놀이에 익숙하지 못했던 지방인의 습성으로는 세월을 잊고 야영하면서 즐긴다 해도 괴상할 것이 못 된다. 그중에도 머지않아 와해될 운명에 이를 것이라 생각하던 국외자(局外者)에게도 뜻밖의 일로 여겨진 것은 두령이 꾸며낸 교묘하고 지혜로운 수단이다. 두령이란 전명숙ㆍ정익서(鄭益瑞)ㆍ김 모 세 사람이다. 전명숙은 상관이고 다른 두 명이 그를 보좌하는 듯하다. 듣기로 세 명은 평소 변변치 못하여 가산(家産)을 다스리지도 못했다. 전명숙은 현재 동학당의 한 사람으로 동학당에서도 다소 명망이 있는 자이다. 다른 두 사람은 그 지방의 사족(士族)으로 정(鄭)은 글을 배웠다. 두 사람은 젊어서부터 친구이며, 사건을 일으킨 시초부터 크고 작은 일이 모두 이 세 명의 수중에 속했다. 그러나 이들은 책임을 자신에게만 국한하지 않고 각각 마을의 동장ㆍ집강(執綱) 등도 함께 책임을 지게 하여 하루아침에 실패하게 된다면 18구역 면의 동장ㆍ집강이 같이 책임을 지게 되므로, 백성들을 함부로 흩어지거나 싫증내지 않게 하여 한층 굳게 단결하는 듯했다. 감영에서는 군사 50명을 변장시켜 동학당 진영에 잠입하게 하여 기회를 보아 3명을 체포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그들에게 정체가 들통이 나서 50명이 모두 포로가 되었다. 이 싸움 중에 군사 1명은 즉사하고 이를 통솔했던 자도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있다. 이때부터 사방의 출입을 엄하게 하여 동진강 나루를 막고 군내 중요한 곳은 모조리 그들의 수중에 장악되어 나그네라 할지라도 보는 대로 진영에 끌고 가서 병정으로 부린다고 한다. 감영은 한 번 실패했으므로 이번에는 병정 300명을 정읍에 매복시키고 근방에 있는 9군의 병정을 소집하여 오늘 오후경에 정읍에 집합할 것이라는 소문이 있다. 이를 인솔하는 자는 3명의 포도사(捕盜使)로 군병(郡兵)은 군의 영장(營將)이 인솔한다고 한다. 어젯밤 이후 줄포로 도주해 온 자가 여러 명이 있다. 민군의 수령은 앞서 비밀리에 58주(州)의 동학당에게 격문을 띄워서 자기들의 목적은 다만 한 군의 이해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우선 전운영을 파괴하고 나아가 폐정을 바로잡는 데 있다고 했다. 병사들 양식은 먼저 군의 세곡 창고를 빼앗아 이를 충당한다는 것이다. 인심이 흉흉하여 미곡상 등도 따라서 감소되었다. 나는 지난날 심부름꾼을 충청도까지 보냈는데 이미 돌아올 기일이 지났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혹시나 중도에 길이 막혀 늦어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1월 25일 종래 민군은 마수역에 진영을 설치하였으나, 공격과 수비에 이롭지 못한 점이 있어 백산(白山)이라는 곳으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백산은 조선의 비결(祕訣)에도 적혀 있을 정도의 땅으로 삼면이 강물로 둘러싸여 있고 일면만이 겨우 인마가 다닐 수 있으며, 근방은 유명한 평야로 백산만 우뚝 높다. 비결에 이르기를, “고부의 백산은 만민을 살릴 수 있다.”라고 하였다. 민군이 부안부를 습격한다는 풍문이 있어 경계 호위를 엄중히 하라는 포고령이 내려 현령은 주야로 침식이 편안하지 못했다. 이번의 변란으로 뜻밖의 요행을 얻은 것은 부안의 지방민이었다. 사건이 일어난 이래 오로지 민심을 진정시키려고 각종 세금의 독촉을 중지하고 송사(訟事)의 재판도 멈추어 백성들에게 알랑거리는 것 같았다. 일전에 포도사가 내려오고 영장이 9군의 병정을 이끌고 민군을 친다는 설이 있었는데, 전적으로 헛소문이었다. 그 후 새 고부군수가 부임하여 민군의 진영에 글을 보내, 새로이 명을 받고 이 지방에 도임한 뜻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이니 지금부터는 그대들과 이 지방의 정사를 의논하려고 하니 민군 중에서 이부(吏部) 이하 중요한 자를 선발하라고 부탁하였다고 한다. 전 완영감사는 송사ㆍ하옥 등의 정사를 중지하고, 본영에서 물러나 모청(某廳)에 있다고 했다. 감사는 작년 겨울의 상서(上書)에서 여러 수령 중에서 고부군수의 치적이 가장 뛰어났다고 하여 조병갑을 칭찬하였는데(여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이번의 실정으로 인하여 완전히 정부를 기만한 것이 들통이 나 될 수 있는 대로 은밀히 진압하려는 의도에서 지난번의 병사도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파견했으나 오히려 민군의 포로가 되어, 상부에 대해 함부로 위무(威武)를 더럽힌 꼴이 되어 매우 궁색한 형편이 되었다. 이에 민군은 만약 일을 끌면서 조병갑의 죄적을 다스리지 않는다면, 곧장 경성으로 가서 아뢸 것이라고 감사를 협박하였다는 것이다. 3월 초1일 민군 수백 명이 줄포의 세고를 파괴하였다. 그들이 어떻게 하여 양식에 궁하지 않았는지 들어 보니, 조병갑이 받아들인 미곡을 전부 탈취하여 이에 충당하고 있어서 아직 2개월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등불이 바로 꺼지기 전에 한 번 활발히 타오르는 것을 본다. 그들의 형상이 실로 이와 비슷하지 않은가 한다. 3월 11,12일경 나의 소회였다. 한 번 성했다 한 번 멸했다 하는 소문 속에 그들은 3월 13일 완전히 해산하였다. 도장(都將)은 처자를 거느리고 도망가고 나머지 무리는 체포되었고 졸개들은 귀농하여, 모두 일이 끝난 것을 축하했다. 그런데 급보가 하늘에서 날아왔으니 때는 3월 20일, 이날 덕흥리의 장꾼이 돌아와서 이르기를, 동학군 수만 명이 무장(茂長)의 굴치(屈峙)를 넘어서 흥덕을 지났다고 한다. 다음 날은 고창에 모여 점차 서쪽에서 올라와 일부 군대는 정읍에서 고부로 들어가고 일부 군대는 사포를 지나 지포(芝浦)로 왔다. 23일 나는 아침부터 3~4명의 조선인과 동쪽 교외로 산책을 나갔다. 정오경 귀로에 올라 시외의 한 주막 앞에 왔을 때, 수백 명의 조선인이 집합해 있는 것을 보았다. 무슨 연유인지 몰라 한 사람에게 물어보니, 동학당 수만 명이 바야흐로 이곳을 지나가려고 하며 선도(先導)가 이미 도달했다고 하였다. 도중에 장터 객주(客主)의 사환이 와서 빨리 돌아가라고 재촉하였다. 문밖에 다다르니 늙은 객주가 황급히 소매를 끌어당기며 빨리 어디론가 피하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가 걱정하는 만큼 나의 신상에 위난이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도리어 늙은 주인을 위로하며 잠시 사랑에서 쉬고 있었는데 곧 포성이 울렸다. 사람들이 문밖으로 나갔다. 나도 나가서 서성거리며 바라보니, 24,25정(町) 남짓 떨어진 동쪽 교외로 통하는 대로에서부터 깃발을 펄럭이면서 위세를 사방에 떨치며 밀어닥쳐 왔다. 옆 사람들이 자주 나를 위태롭다는 눈길로 보았다. 나도 그 뜻에 따라 잠시 내가 끌고 온 한 배로 피하여 봉창으로 내다보니, 척후의 깃발이 있고 청홍백황색의 구별이 있으며 상하로 흔들고 좌우로 받치거나 급하게 또는 느리게 하여 한 부대의 진퇴가 다시 이에 응하였다. 그들이 지닌 병기는 죽창ㆍ활ㆍ화살ㆍ창이었다. 총은 구제(舊制)의 화승총이었다. 이때 나의 생명은 내가 하기에 따라서 매우 위태로울 수 있었다. 누구의 말에 의거했는지 단서도 없이 도장은 일본인에게 예리한 검과 한 개의 육혈포가 있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인을 불러오라고 하여 내 숙소에 수십 명이 난입해 계속 나를 찾았으나 다행히 내가 없었기 때문에, 객주와 내 친구인 신현계(辛玄溪) 등이 그것은 뜬소문이라고 번번이 변명하였다. 이런 사령(使令)이 세 번이나 왔다가 그쳤다는 것이다. 지난번 송도(松都)의 민란 때 일본인 한 사람이 횡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래 외로운 나그네가 속으로 한심해하던 차에, 한 번의 민란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자 다시 이번의 거사가 일어났음을 알게 되었고 또한 그들이 외국인에 대하여 강한 모멸감을 갖고 있는 것이 일본의 겐지(元治)ㆍ게이오(慶應) 연간(1864~1868년)의 부랑인과 거의 같은 데가 있음을 알았으니, 어찌 마음이 평안할 수가 있겠는가. 하물며 내 종형이 갑신년 경성사변 때에 횡사하여 슬프고 두려운 마음이 아직도 떠나지 않고 있음에랴. 그들은 점심을 먹고 난 후 정연하게 고부로 향해 떠났다. 출발에 임하여 하나의 격문 같은 것을 사방의 출구에 부착하였는데, “폐정 혁신의 요점은 우리 태조의 혁신정치로 돌아가면 된다.”라는 것이다. 글이 꽤 길었다. 도장은 아직 성년에도 이르지 못한 소년 장부라고 한다. 이날로부터 소문이 차차 무성해져서 혹 이르기를, “후군(後軍)이 날을 정하지 않고 뒤따라올 것이고 이때 통과할 인원은 3,000여 명이다, 25일 동학당이 고부의 군기고를 약탈했는데 실수로 화약에 불이 붙어 수십 명의 부상자와 사망자를 냈다, 이날 제주의 동학당이 사포에 상륙하였다.”라고 했다. 민심이 흉흉하였다. 이때 감영이 모병(募兵)의 명령을 내리자 이에 응하는 장정이 무수히 많았다. 27일 동학군의 후진이 서상(西上)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나는 2,3일 전에 도착한 마쓰무라(松村)를 데리고 변산의 경치를 찾아 구경하였지만 대개 생각은 동학군에 있었다. 4월 2일 숙소로 돌아왔다. 과연 29일에는 동학당이 통과하여 매우 번거롭고 시끄러웠다고 한다. 경군(京軍)이 장포강구(長浦江口)의 군창(郡倉)으로 상륙하여 전주 감영과 서로 통하였다는 설이 있다. 동학군은 고부를 출발하여 전주 감영과 십 리쯤 떨어진 곳에 대진(對陣)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4월 4일 한 대군(大軍)이 동진강을 건너 부안에 들어가고 같은 날 경군은 고부로 들어갔다. 4월 5일 어제 저녁 뜻밖에 전주 감영으로부터 파견된 일단의 군인이 이 지방에 들어왔다. 포성이 2,3발 들리는데, 아마 적군의 유무를 정찰하기 위한 것 같다. 지방민이 도망가는 상황을 글로는 이루 표현할 수가 없다. 나도 마쓰무라와 함께 배로 갔다. 이날 밤 뱃사람 복장을 하고서 상륙하였다. 시가는 삼엄하여 참으로 군영 안에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삼삼오오 모여 어두운 곳에서 이야기하는 자들은 지방민이 군의 상황을 문답하는 것이 아니면, 인가를 정리하여 피할 땅을 말하는 것이리라. 화톳불이 그리 멀지 않은 산언덕에서 밝았다 꺼졌다 하는 것은 초병이 정녕 용기를 내서 바람소리ㆍ학 울음소리와 싸우고 있는 것이리라. 초승달은 희미하고 초목은 바야흐로 잠들려고 할 때, 홀로 걸어서 배로 돌아와 보니 마쓰무라는 아직도 자지 않고 있었다. 4월 6일 동학군의 낙오자 여러 명이 체포되었다. 이날 밤 이곳에 주재하는 300여 명의 전군(全軍)이 북쪽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4월 7일 아침 패주하여 온 병사들이 빈번히 배를 구하려고 애걸하였다. 매어 놓은 배를 나 먼저 타겠다고 닻을 올리고 출항하는 것을 보았다. 얼마 안 있어 내가 타고 있는 배에도 왔다. 처음에는 어느 편의 군대인지도 모르고, 왜 이렇게 되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언덕으로 도망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작은 길로 달음질쳐 오는 자 등 그 수가 200여 명이 되었다. 얼마 안 되어 내 친구 한 사람이 나를 찾아와서 사건 내용을 말하는 데, 어젯밤 이곳에서 30리쯤 떨어진 고부의 황토산에서 격전이 벌어졌는데 경군이 대패하여 사상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걸어서 도망친 병졸은 겨우 몸만 빠져나왔다는 것이다. 전투 상황을 들어 보니 다음과 같다. 4월 4일 동진강을 건너 부안성을 함락시키고 적을 기다리고 있던 동학군은 부안의 지형이 불리하므로 전군을 고부로 옮겨 우익진(羽翼陣)을 펼쳐서, 이곳 줄포에 주둔하는 경군과 전주 감영과의 통로를 차단하였다. 5일 경군은 이광양(李光陽, 감사의 처남)ㆍ이재혁(李在奕)ㆍ송봉암(宋鳳岩) 등 영병(營兵) 250명을 중견으로 하여 무려 7,000~8,000명의 고용병을 이끌고 동학군과 대진(對陣)하였고 명령을 전하여 줄포의 경군과 함께 합공하려고 하였다. 6일 밤 줄포의 경군이 전선에 도달하였다. 한 발의 신호포가 울리면서 전투가 벌어졌다. 밤은 깊어 가고 어둠이 짙어져서 판별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상한 것은 적진의 응사가 느린 것이었다. 10발을 쏘면 겨우 한 발을 응사하였다. 경군이 돌진하여 일거에 가성(假城, 이때 동학군이 짚으로 가성을 만들었다)에 들어가자, 적이 이미 전후에서 탄환을 비 오듯이 쏘아 이광양 이하 장병 대부분이 죽어 사상자를 헤아릴 수 없었고 패잔병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허무하게도 황토산 언덕에는 선혈이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리하여 이곳으로 도망쳐 온 패잔병들은 그날 아침 우연히 세미를 싣기 위해 온 조선 기선에 구조되어 그날 인천으로 출발하였다. 4월 8일 동학군은 흥덕을 지나갔는데 부내에서 밥을 지어 먹인 사람이 1만 8,000명이라고 한다. 고창을 지나서 나주로 들어갔다. 4월 10일 경군이 고창으로 진군한다는 설이 있어 민심은 흉흉하였고 집을 정리하고 떠나는 자가 많았다. 4월 11일 방곡령을 선포하였다. 앞으로 상황은 다시 다른 날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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