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도(東徒) 동란의 때인 금일에 자진하여 그 진압의 선후책(善後策)을 아뢰는 것은 매우 섣부른 계획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미 아군이 파견되었고 따라서 며칠이 못 되어 진정될 것이라는 것이 틀림없으므로 지금부터 그 선후책을 강구하는 것은 반드시 무용할 것 같지 않으며 특히 진주 지방의 실상도 있으므로, 오늘에 와서 이것을 아뢰는 것은 도리어 그렇게 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대개 동학당이라는 것은 유ㆍ불ㆍ도 세 가지를 합한 일종의 종교 미신자(迷信者)로서 그것이 미신인 만큼 만사에 완고ㆍ집요한 기풍이 있습니다. 그리고 교조 최제우(崔濟愚)가 이 도(道)를 창도(唱道)한 지 어언 40여 년, 풍기가 퇴폐하고 정도(政道)가 혼란함에 따라 마음이 이것에 기울어지는 사람이 많아 지금은 조선 남도에 만연하여 그 당(黨)에 이름이 오른 자가 수만 명을 밑돌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형세이므로 다른 야심을 품고 초야에 숨어 있는 자 역시 이 무리를 이용하려고 하며 또 이들의 명성이 점차로 요란해지자, 다른 민란 난민도 이 동학도의 명의를 이용하여 지방관들을 위협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진짜 동학도와 가짜 동학도의 구별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진짜 동학도도 결코 정사(政事)에 관계없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가짜 동학도보다 혁명의 씨를 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부르짖는 바는 항상 “보국안민(輔國安民)”의 4글자로 그들은 일반 조선인 중에서 가장 완강한 인민이기 때문입니다. 이상과 같은 형편이므로 이번 우리 군대의 파견은 쉽게 그 당란(黨亂)을 진압하는 일이라고 소관(小官)은 확신하여 의심치 않는 바입니다만, 이러한 행동으로써 아주 그 화근을 뿌리 뽑아 영구한 평화를 유지하려고 함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 나라 지방의 폐정(弊政)도 하루아침에 개혁의 실효를 거두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됩니다. 과연 그렇다면 모처럼 이번에 일단 평정된다고 하여도 몇 달이 못 되어서 다시 토구(土寇)의 봉기를 면하기 어려울 것인바, 별수 없이 다른 선후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선후책(善後策)의 목적으로 이에 대비하는 방책은 우선 민란을 평정한 후라 하여도, 지방 요지에 우리 병사를 주둔시키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현재 진주 부근의 인민과 같은 자들은 모두 일본군의 주둔을 절실히 바라여, 지난번에는 별지에 기재한 바와 같은 서면을 아군에게 투입한 자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군이 확실히 떠나려고 할 때에는 그 지방 관민이 다시 별지와 같은 청원을 하였습니다. 또 토포사(討捕使)로서 이곳에 출장한 대구판관 지석영(池錫永)도 별지와 같이 몇 통의 전보를 관계기관에 보내서 아군의 주재를 간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진주 지방에만 국한하지 않고 아마도 어느 지방에서도 같을 것으로 가정할 때는 사실상 이미 아군을 내륙지방에 주재하게 할 필요가 있음은 쉽게 인정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 쪽에서도 일단 이것을 이용하여 병참선로(兵站線路) 외의 각지 요소에 오랫동안 아군을 주둔시킬 수 있다면, 장래에도 역시 오늘과 같이 우리 병력을 가지고 이 나라 내치에 간섭할 권리를 사실상 각국에 시인시킬 단서가 되어 매우 좋은 경우라고 생각됩니다. 또 이와 같이 한다면, 이 병사가 주둔하는 비용은 이 나라에서 부담하든 또는 당분간 우리나라에서 지불하든 어느 쪽이든 간에 그 비용액은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그 조직을 일종의 둔전병(屯田兵) 같은 것으로 하여 이들 병사들에게 지방 경찰 사무도 위임하게 한다면, 제법 저렴한 비용으로 우리나라가 이 나라에 갖는 실제 권력도 증대하고 그 기초를 공고하게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행히 현재 각지에서 그 청원도 있고 하니 중앙정부에서도 어떻게 하든 방법이 서지 않고서는 아니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관계기관과 협의를 하게 되는 일도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만일을 위하여 각하께서 참고하시도록 비견(卑見)을 개진하여 둡니다. 경구(敬具). 1894년 12월 3일 부산(釜山)에서 일등영사 가토 마스오(加藤增雄) 조선국 곤양군(昆陽郡) 이교(吏校)ㆍ노령(奴令) 및 읍촌(邑村) 주민 등장(等狀) 아래와 같이 생각하는 바를 삼가 아룁니다. 경전에서 이르기를 “새는 죽을 때 그 울음소리가 슬프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궁색한 호소를 하는 것도 새와 어찌 다르겠습니까? 대저 본읍은 작은 읍으로 천호도 채 못 되고 또 흉년도 거듭 들어 하루 이틀을 구사일생으로 살아가던 중, 누차 동학교도의 변을 당하여 관리와 백성들은 고기처럼 놀라고 쥐처럼 도주하였으며 가산은 구름처럼 날려 보내고 비처럼 흩어져, 그야말로 일망타진되었으므로 온 경내가 쓸쓸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매우 다행스럽게도 대위주(大尉主)께서 본읍에 행차하시어 동학교도들을 제거하셨으므로 우리들은 대위주를 태산같이 의지하고 반석처럼 안전하게 여겨 모두가 살맛이 나고 죽을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들은 바에 의하면, 대위주께서는 이 읍을 버리시고 다른 곳으로 가신다고 합니다. 대위주께서 읍을 떠나시는 날은 곧 본 성이 함락되는 날이므로 모두가 죽는 때입니다. 이와 같은 형세를 생각해 볼 때, 군중의 눈물은 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찮은 저희들이 동학교도를 초멸하러 가는 명령을 받든 행차를 어찌 감히 그 사이에서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실이 이와 같기 때문에 그 사유를 들어 호소하오니, 특별히 이러한 충정을 잘 살피신 후 몇백 명만 본읍에 주둔시켜 죽음이 가까워지는 이 목숨들을 구제해 주십시오. 대위주께서는 그 처분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갑오년 10월 일 정부 초3일 일본 군병과 함께 부산항에 도착하여 진주ㆍ하동 등지에 있는 도적의 무리들을 누차 토벌하여 그들은 지금 이미 도주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시 모여들고 있는데, 그들의 기량으로 보아 만일 다시 모인다면 백성들은 백 배나 더 많은 해독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날에 파견한 병력이 영병(營兵) 100명뿐으로, 그들은 하동에 주둔하고 있으나 매우 피곤하여 지쳐 있을 뿐만 아니라 갑옷마저 없으므로 일본 군병을 빌려 그들을 진주ㆍ하동 등지에 주둔시키라고 누차 전달(電達)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회신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매우 두렵고 우울합니다. 따라서 별도로 외서(外署)로 칙령을 내려 일본 공사와 상의, 다시 일본 군병 수백 명을 파견하여 진주와 하동 등지에 주둔시켜 두고 수시로 동학교도를 대응하고 제압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을 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백성들이 바라는 것도 모두 이와 같은 만큼 처분하시겠다는 회답을 기다리겠습니다. 초4일 토포사(討捕使) 정부 간혹 일본 육군 대위와 함께 주선(周旋)을 하였습니다. 지금 대위의 서신을 받아 보니, 일본 군병 6,7백 명을 3부대로 나눈 다음 불일간에 인천을 출발하여 양호(兩湖)로 가서 동학당을 격파하게 하고 자신은 군대를 인솔하여 부산으로 향하고 통병(統兵)으로 하여금 하동(河東)을 수비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통병이 여러 날 동안 휩쓸고 다녔으므로 병든 사람이 과반수나 되기 때문에, 병영으로 공문을 보내어 하동을 수비하기 위해 병력을 파견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동은 요충지에 처하여 동학교도들이 출입하는 관문이므로, 만일 호남의 세력이 꺾이면 그들은 반드시 하동ㆍ진주 등지에서 독을 퍼뜨리게 될 것이고, 만일 그렇게 되면 천 명의 병력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을 방지할 길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 군병이 철수하면, 백성들이 믿을 곳이 없게 되며 적들이 다시 모여들 것은 필연적인 형세입니다. 그러므로 이곳 사태는 매우 위급하므로 빨리 조처를 취하여서 다시 일본 군병을 빌려서라도 진주와 하동에 주둔시키시기를 천만번 비옵니다. 11월 26일 보냄 19 진(晋) 토포사 영영(嶺營) 일본 군병이 기어이 철수하면 이곳에는 수비할 군대가 없어집니다. 폐일언하고 만일 일본 군병의 병참이 없으면 하동ㆍ곤양(昆陽) 등지는 난리로 인한 재앙으로 인하여 되돌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을 정부에 알리시어 죽음이 가까워지는 수만 백성의 목숨을 구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일본 군병이 주둔하고 있는데도 그들은 조금도 머리를 돌릴 생각이 없는데, 하물며 일본 군병이 철수한 뒤에는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매우 시급한 일입니다. 10월 22일 하동 토포사